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오늘은 신간 《키워드 오덕학―자생형 한국산 2세대 오덕의 현재 기록》을 소개합니다. 덕후 또는 오덕은 ‘특정 분야의 정보나 관련 상품,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집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일본어 ‘오타쿠’에서 유래해 이미 오래 전부터 생명력을 얻고 있는 한국식 표현이지요. 우리의 오덕 문화는 일본의 영향을 받았으되, 그 말이 쓰이는 맥락은 태반이 혼란스럽거나 혼동되거나 심지어는 적잖게 달라지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의 ‘오덕’은 일본의 ‘오타쿠’와는 또 다른 맥락성을 지니고 자생해가고 있는 중인데요. 《키워드 오덕학》은 ‘웹툰(WEBTOON)/오타쿠/코스프레/야오이 그리고 BL/OSMU(ONE SOURCE MULTI USE)/기록과 통계/백합(百合)/모에(萌)/지역 캐릭터/짤방/병맛/츤데레에서 얀데레까지/서브컬처(subculture)’에 이르는 총 13가지 키워드(열쇳말)를 통해 오덕 문화가 우리네 현실과 닿아 있는 접점이 무엇인지 상세히 살펴봅니다. 한마디로 《키워드 오덕학》은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의 ‘오덕 문화’를 충실히 소개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타쿠에 대한 부정적 인식

 

'덕후'의 어원이라 할 수 있는 '오타쿠'(おたく)는 일본에서도 멸칭으로 시작되었다. 칼럼니스트 나카모리 아키오는 《만화 브릿코》 1983년 6월호부터 실은 칼럼 〈'오타쿠' 연구〉에서 오타쿠를 '안경에 파묻혀 영양실조 걸린 하얀 돼지 같은데' '엄마가 사준 옷 차려입고' '세기말적으로 어두컴컴하다가 만화 행사장에선 잔뜩 모여 활개 치는' '남창 같은 구석이 있어 여자를 사귈 수 없을 것 같은 놈들'이라고 묘사했다. 명색이 연구란 말을 제목에 달아놓은 글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감상적 악담을 쏟아낸 까닭에 연재가 중단되긴 했으나 이 칼럼은 '오타쿠'라는 용어의 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다 1989년 미야자키 츠토무가 도쿄·사이타마 연속 여아유괴 살인 행각을 벌이자 일본 사회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일본 경찰은 처음으로 프로파일링 수사기법을 동원해 범인을 검거했다. 그런데 그의 집에서 5763개의 비디오테이프가 발견되고, 그 안에 호러 영화와 로리콘 성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언론은 '오타쿠=잠정적 범죄자'란 부정적인 인식을 유포하기에 이른다. 미야자키 츠토무는 '롤리타 콤플렉스 살인귀'라고 불렸다. 이 때문에 한동안 일본에서 오타쿠는 시각 기호로 창작된 캐릭터에 집착해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범죄 예비군 정도로 인식되었다. 2008년까지 NHK는 오타쿠를 금지어나 다름없는 방송 문제 용어로 구분하기도 했을 정도다.


하지만 이후 오타쿠에 대한 인식이 재정립되고 그들이 심취한 산업의 규모가 재조명되면서 인문학적 연구가 거듭되고 있다. 이로써 오타쿠는 '꽂히는 취향에 일정 이상으로 몰입하는 사람'을 뜻하는 표현으로 일반화하는 지리멸렬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한때 일본의 신어사전은 오타쿠를 '만화, 애니, 비디오게임, 아이돌 등 허구성 강한 세계관을 좋아하는 이들을 일컫는다'라고 정의한 바 있지만, 현재 오타쿠의 관심 대상은 철도나 밀리터리, 성우, 특정 인물 등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우리의 덕후 문화, 어디까지 왔나?

 

'덕후' 또는 '오덕'은 '특정 분야의 정보나 관련 상품,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집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일본어 ‘오타쿠'에서 유래해 오랜 시간을 거쳐 생명력을 얻고 있던 한국식 표현이었다. 그런데 인터넷 커뮤니티 공간을 넘어 다수의 일반 한국 대중 사이에서 '오덕'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된 건 TV 프로그램 〈화성인 바이러스〉(tvN, 2009. 3. 31~2013. 11. 26)였다. 2010년 1월 27일자 〈화성인 바이러스〉 프로그램은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진 안는 베개(끌어안고 잘 수 있는 등신대 베개)를 들고 나와 "이 캐릭터와 혼인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출연자를 소개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서 조롱처럼 돌아다니던 '안여돼'(안경 여드름 돼지)형 인물이 화성인(=상식 밖 인물)의 대표주자 '덕후'의 표상으로 정립되는 순간이었다. '오덕' '덕후' 부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대중에게 고정된 것이다.

 

이를 보면 한국의 '오덕' 또한 일본 ‘오타쿠’의 전철을 밟은 듯하지만, '오덕 문화'는 거기에 머무르고 있지만은 않았다. 웹툰이 상업적 정립 10년을 넘긴 2013년을 거치며 미끼 상품에서 벗어나 콘텐츠와 상품으로서 가능성을 타진하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덕후 문화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향유층과 함께 나이를 먹기 시작했다. 문화 코드란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 정의되던 범위 바깥으로 확장하며 경계를 무너뜨리고 급기야 멸칭마저도 유희화하는 현상을 겪게 마련이고 그러지 못하는 문화는 역설적으로 박제화하거나 사멸하는데, 오덕 문화는 다행스럽게도 확장되기 시작했다.


근래 화제를 모은 TV 예능 프로그램 가운데 〈능력자들〉(MBC, 2015. 11. 13~2016. 9. 8)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인류는 덕후들의 능력으로 인해 진화되었다" "당신의 덕심이 바로 당신의 능력이다"(프로그램 소개 중에서)라며 '덕후'를 별다른 주석문 하나 없이 전면에 내세웠다. 재밌는 건 〈능력자들〉이라는 프로그램의 제목 자체다. 말 그대로 덕후를 '능력자'로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작진은 여기서 한술 더 떠 "개개인의 전문성이 나라의 경쟁력이 된다"라고까지 피력했다. 새로운 프로그램의 등장 정도로 여길 수도 있겠으나, 어떤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상전벽해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변화로 비치는 현상 이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이란 바로 덕후들, 바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TV 미디어가 '능력자' 이전에 '화성인'으로 분류했던 이들을 의미한다.


아스카(〈신세기 에반게리온〉 여주인공 가운데 한 명)를 향한 애정을 감추지 않는 연예인과 〈도라에몽〉에 미쳐 사는 몸짱 훈남 연예인처럼 사회적 인지도와 실력을 갖춘 그럴싸한 오덕층의 출현은 스스로를 덕이라 생각해본 적 없는 사람이 대부분일 일반 대중에게는 나름대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라? 우와? 세상에?' 하며 놀라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그런 사람이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많다는 생각에 도달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들이 '사회성 결여' 같은 비상식적 면모와 거리가 멀다는 점도 인지하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모두는 어느 무언가에는 '덕'이다. '덕질'이 즐거운 유희가 되는 시점에 '오덕·덕후=안여돼' 프레임은 힘을 잃게 된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 창궐하던 사방천지의 덕질 놀이가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TV라는 절대적 대중문화 살포 도구(!)에까지 침투하고 있다. '오덕' '덕후' '덕질'이라는 말이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나 〈능력자들〉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한 포인트다. 〈능력자들〉에 출연한 이들은 겉보기에 멀쩡하고 자기 일에도 충실했다. 더구나 관심 대상을 향한 애정과 노력은 실제 해당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조차 혀를 내두르다 못해 "너 이쪽으로 와라"라며 취업 제안을 즉석에서 받을 만큼 전문성마저 갖추고 있었다. 오덕들의 노력과 지식은 '덕질'이라는 범주 안에 놓이지 않아 왔을 뿐 덕후 문화가 애먼 논란 속에 정체를 겪고 있던 시기부터 이미 쌓이고 있었던 것들이다. 우리 시대의 흐름이 이들이 쌓아온 면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칭찬할 수 있는 데까진 온 것이다.


 

오덕 문화가 우리네 현실과 닿아 있는 접점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오덕 문화가 새로운 경제 동력이 되고 있다. 이들이 몰입하는 분야를 기반으로 한 애니메이션, 게임 같은 콘텐츠 시장이 꾸준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9년이면 이 분야만 약 1700억 달러 규모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오타쿠 시장의 규모를 알려주는 단적인 자료가 있다. 2004년 8월 24일 노무라종합연구소(野村総合研究所)가 발표한 〈마니아 소비층은 애니메이션, 만화 등 주요 5개 분야에서 2,900억 엔 시장—오타쿠층의 시장 규모 추계와 실태에 관한 조사〉라는 보도자료를 보면 '애니메이션/만화/게임/아이돌/조립PC' 다섯 개 분야에 걸친 오타쿠들의 소비 시장 규모는 2900억 엔(약 2조 90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콘텐츠 관련 네 개 분야, 즉 애니메이션, 아이돌, 만화, 게임 산업 전체의 시장 규모는 약 2조 3000억 원이며 이 가운데 오타쿠 소비층이 금액 기준 11퍼센트를 차지했다. 이처럼 오타쿠는 구매 의욕이 높을 뿐 아니라 커뮤니티 형성의 핵심, 차세대 기술 혁신의 장, 신상품 실험 대상으로서의 가치도 높아 산업 관점에서 기대되는 역할이 큰 모집단이라 할 수 있다. 오타쿠든 한국화한 오덕이든, 이들에게 통하는 코어한 부분을 이용하려면 이들에 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오덕들의 문화와 역할은 일본의 오타쿠들과는 많은 부분에서 비슷하되 다르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더욱 달라질 것이다. 이 때문에 《키워드 오덕학》의 저자는 '오덕'을 '오타쿠'와 단순 동의어로 놓고 용어를 해설하기보다는 우리나라의 오덕 문화가 우리네 현실과 닿아 있는 접점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려 노력했다. 이 책의 특징은 일본에서 유래한 '바닥 문화'를 파고드는 차원이라기보다 우리나라에서 오덕 문화와 개념들이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가에 주목했다는 점이다. 이 책의 제목이 《키워드 오타쿠학》이 아닌 《키워드 오덕학》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우리에겐 우리에게 맞는 '오덕' 담론이 필요하다. 아울러 앞으로도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 책이 그 시발점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저자의 바람을 공유하고자 한다.


 

지은이 

 

서찬휘
본명 임채진. 1979년생. 1998년 이후 지면과 형식을 가리지 않고 만화 이야기를 해온 만화 칼럼니스트. 자생한 한국산 2세대 오덕으로 한국 오덕 문화의 흐름과 성격을 역사라는 맥락 안에서 꾸준히 탐색하고 정리해왔다. 만화, 애니, 성우, 애니송, 라이트노블 등을 덕질하다 현재는 만화를 중심으로 정착 중. 만화 정보 웹진 《만화인manhwain.com》 운영을 비롯해 대학 강의, 인터뷰, 팟캐스트 진행, 전시 기획, 세미나 기획 및 진행, 캘리그래피 등 만화와 연관성 있는 일들에 다양하게 참여하고 있다.

 

 

차례

 

들어가며 _자생형 한국산 2세대 오덕의 현재 기록

 

01. 웹툰(WEBTOON)
‘MADE IN KOREA’ 만화 형식 웹툰의 정립 과정과 대외 브랜드화 현황에 관하여

-생각할 거리들

 

02. 오타쿠
‘화성인’에서 ‘능력자’까지, ‘덕후’의 즐거운 위상 변화

-생각할 거리들

 

03. 코스프레
불분명한 유래 집착과 일본 콤플렉스를 넘어서

-생각할 거리들

 

04. 야오이 그리고 BL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섹슈얼리티 판타지

-생각할 거리들

 

05. OSMU(ONE SOURCE MULTI USE)
똑바로 서지 못한 원 소스, 멀티 유즈가 무시한다

-생각할 거리들

 

06. 기록과 통계
한국 만화가 진정 튼튼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

-생각할 거리들

 

07. 백합(百合)
소녀(여성) 간의 우정과 유대에 천착한 판타지 픽션

-생각할 거리들

 

08. 모에(萌)
극단적으로 부품화한 취향 코드와 언캐니밸리

-생각할 거리들

 

09. 지역 캐릭터
한국에서 ‘쿠마몬 성공신화’를 바라고 싶다면

-생각할 거리들

 

10. 짤방
이미지 속 맥락의 만화적 재해석

-생각할 거리들

 

11. 병맛
조롱을 내재화한 이 시대의 산물

-생각할 거리들

 

12. 츤데레에서 얀데레까지
상반된 마음의 간극을 부품화하다

-생각할 거리들

 

13. 서브컬처(subculture)
오타쿠 컬처? 문화콘텐츠?

-생각할 거리들

 

마무리하며 

 

 

일요일 저녁 <개그콘서트>가 시청자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면 요즘 금, 토 저녁은 드라마 <미생>이 시청자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케이블 드라마라는 핸디캡을 훌쩍 뛰어넘은 만듦새와 막장 요소나 사랑 타령 없는 현실감 있는 전개가 큰 장점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원작인 웹툰 <미생>부터 드라마 <미생>을 관통하는 가장 큰 장점은 직장에서 노동자가 겪는 고뇌와 일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배우들임에도 캐릭터에 딱 맞는 훌륭한 연기를 선보여 드라마 <미생>을 보며 시청자가 공감하게 하는 한편 배우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기사화될 정도입니다.

 

특히 장그래, 안영이, 장백기, 한석율 등 사회 초년생이 자신의 처지에서 겪는 직장과 일의 의미는 남다른 면이 있습니다. 직장 생활을 좀 오래하신 분들이라면 이들의 실수를 보며 옛날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기도 하고 흐뭇한 미소를 보내기도 하실 겁니다. 때로는 아, 저거 진짜 위험한데... 저러면 안되는데... 싶은 부분도 있을 줄 압니다. 

 

오늘은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들이 직장에서 겪은 일들을 어떻게 하면 더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는지 저희가 출간한 《현명한 직장 생활을 위한 노동법 사용 설명서》 내용과 연관 지어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출처 – TVN 드라마 미생



시말서, 장백기처럼 쓰다간 큰코다친다


자타공인의 엘리트로서 사수인 강 대리에게 인정받고 주인공인 장그래처럼 주목받으며 일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해 고민이 많은 장백기. 완벽주의적인 모습과 달리 지난 에피소드에서는 술을 마시고 지각해서 동기인 한석율에게 대출을 부탁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는 법. 장백기는 사수인 강 대리에게 걸려 혼쭐이 납니다. 지각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철강팀 상사는 장백기에게 시말서를 써오라고 불호령을 내립니다.


출처 – TVN 드라마 미생


여기서 잠깐. 드라마 <미생>뿐 아니라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심심찮게 대면하는 문서가 바로 시말서입니다. 시말서는 말 그대로 일의 시작(始)과 끝(末)을 적은 글(書)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쓰는 경위서와 같은 개념인데, 직장에선 일반적으로 반성문의 의미가 강합니다. 사실 시말서의 범위는 무척 넓습니다. 드라마 미생의 장백기처럼 지각 같은 소소한 일에 시말서를 쓰라고 하는가 하면, 규정위반 등 경고장이 나갈 수도 있는 일임에도 시말서를 쓰라고 할 수도 있고, 중징계감인 일을 봐주는 차원에서 시말서로 갈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말서 처분 자체는 쓰는 사람에게 큰 불이익이 없습니다. 주의나 경고 같은 처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말서 쓰는 일 자체를 우습게 봤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시말서가 누적되면 인사고과가 나빠집니다. 당연히 승진에도 불리합니다. 또한 시말서가 누적되면 징계수위가 높아질 가능성도 그만큼 커집니다.


시말서는 형사사건으로 치자면 일종의 자백이자 진술서에 해당합니다. 크든 작든 어떤 사실을 자신이 저질렀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행위인 것이죠. 언론 기사나 뉴스에서 보신 적이 있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자백 한 번 잘못했다거나 진술서 한 번 잘못 썼다가 모든 죄를 옴팡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억울한 일이 시말서 한 번 잘못 썼다가 직장생활에서 실제로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출처 - 노컷뉴스


앞서 말씀드린 바처럼 시말서는 그 범위가 굉장히 넓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이유에서 시말서를 쓰는 것인지 분명히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자기 잘못 이상으로 처벌받을 빌미를 남기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만약 큰 사건에 연루되어 쓰는 시말서라면 표현에 따라 법적 처벌까지 감수해야 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시말서를 잘 쓸 수 있을까요? 《현명한 직장 생활을 위한 노동법 사용 설명서》의 저자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우선 회사가 원하는 시말서는 '확실하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것을 단단히 약속하는 시말서입니다. 경위가 복잡하거나 당사자가 구체적인 내용을 부인할 수도 있는 일인 경우 회사는 시말서를 사실관계에 대한 '증거'로 활용하고자 하기 때문에 되도록 자세하게 경위를 적고 구체적인 내용을 시인하는 시말서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회사가 원하는 대로 적었다가 나중에 큰 곤란을 겪을 수 있고, 너무 방어적으로만 썼다가 회사에 밉보이거나 반성의 기미가 없다며 더 무거운 징계 처분으로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


먼저 잘못한 일에 비해 시말서 정도로 끝나는 게 다행이다 싶은 상황인 경우 그 잘못이 시말서를 썼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말서를 신중하게 아주 잘 써야 합니다. 남들이 이해해줄 만한 불가피한 사정이나 있을 수 있는 실수에 대해 강조하는 편이 좋습니다. 물론 구체적인 경위를 쓰도록 하되 명백한 사실을 중심으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입장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는 부분은 어느 정도 자신의 입장에서 정리하는 게 좋습니다. 단, 시말서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비록 이런저런 사정으로 어쩌다 보니 이런 일들이 생겼지만 결과적으로 심려를 끼쳐 드리게 되어 매우 죄송하게 생각하고 앞으로는 더 성실하게 역량을 발휘하는 믿음직한 직원으로 인정받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같은 미사여구로 마무리해줘야 합니다. 무조건 사실을 부인하거나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좀 억울한 면이 있더라도 잘못한 게 전혀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결과적으로 죄송하다’라는 표현 정도는 넣어주는 편이 좋습니다. (…)


어떤 경우는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시말서를 쓰라고 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시말서 작성을 거부할 수도 있지만 이로 인해 일이 커질 수도 있기 때문에 시말서를 제출하되 ‘이런저런 사유로 이 문제는 본인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점을 분명히 표현해야 합니다. 물론 무작정 잘못을 부인하는 자세보다는 자세한 사실관계를 적고 근거를 대면서 설명하는 편이 바람직합니다. 그리고 불쾌한 감정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나 강한 어조보다는 객관적인 표현과 겸손한 어조를 유지하는 게 좋습니다. 역시 마지막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결과적으로 심려를 끼쳐 드리게 되어 매우 죄송하게 생각합니다”라는 표현으로 마무리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억울한 상황에서도 다른 이들을 배려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고, 이런 점은 향후에 징계와 관련한 법적 분쟁이 생길 때에도 근로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현명한 직장 생활을 위한 노동법 사용 설명서》 232~234쪽

36. 시말서를 쓰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중에서

 

드라마 미생의 장백기처럼 단순 지각으로 시말서를 쓰는 경우라면 간결히 반성문 성격으로 쓰면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책에 나온 표현과 어조를 숙지하여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적어도 자기 잘못이 아닌 일로 나중에 억울한 상황이 벌어지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요.



직장내 성희롱 대처,

안영이 같은 상황에선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사실을 직접 표현하라


자원팀 마 부장은 남자 직원들에게 폭언을 일삼고 여자 직원들에게는 성희롱 조의 언어폭력을 일삼아 직장에서 공공의 적으로 통합니다. 마 부장의 눈에는 여자인 주제에 우수한 안영이가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보고하러 오면 분내 난다, 하이힐 시끄럽다, 시집이나 가겠냐 등등 여성성을 무시하는 발언을 내뱉곤 합니다. 지난 에피소드에서 마 부장은 경쟁사인 삼정의 팀장과 안영이가 마치 사귀기라도 했던 것처럼 성희롱 조의 말을 꺼냅니다. 이때 안영이는 정색하고 “업무와 상관없는 말씀이십니다”라고 대답하고 나가죠.


출처 – TVN 드라마 <미생>



직장 내 성희롱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직접 맞닥뜨릴 경우 대처하기가 어려운 문제입니다. 특히 최근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성추행하는 위계에 의한 성추행이 부쩍 뉴스에 나고 있습니다. 신체 접촉과 같은 무거운 성추행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가벼운 성희롱의 경우에도 현명하게 대처하려면 어떻게 하는 편이 좋을까요? 《현명한 직장 생활을 위한 노동법 사용 설명서》 저자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가벼운 성희롱이더라도 불쾌감이 느껴졌다면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자신의 감정만 전달하는 것이 좋습니다. 웃으면서 "왜 이러세요~ 이러지 마세요~" 한다거나 정색하면서 "성희롱으로 고발할 거예요!" 하는 방식은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웃으면서 대꾸하면 가해자들이 피해자가 불쾌해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좋으면서 그런다'고 생각하며 점점 더 심한 성희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정색하며 대응할 때는 직장 안에서 이런저런 불리한 상황에 처해질 가능성이 많아집니다.

 

따라서 웃거나 정색하지 않고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의사를 전달하되 고발하겠다는 말을 하거나 잘못했다는 것을 직접 지적하면 가해자가 매우 불쾌하게 여기고 불이익을 주려 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이런 행동을 당하니 기분이 언짢다'라고 자신의 감정만 전달하는 편이 가장 좋습니다.


피해자 입장에서 지속되는 성희롱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거나 가해자에 대한 조치 등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상황이라면, 기록을 남기고 회사 내 고총처리기구나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게 좋습니다. 이와 함께 가해자에게는 이메일이나 내용증명을 보내는 편이 좋습니다. 사업주가 가해자이거나 회사 내에서 적정한 처리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외부 기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일단은 법적 조치보다는 회사 내에서 원만하게 문제가 해결되는 방법을 먼저 찾는 편이 좋습니다. 법적 분쟁 형태로 넘어가게 되면 이제는 '가해자'를 상대로 하는 싸움이 아니라 '회사'가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한 것을 문제 삼는 모양새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회사가 가해자를 보호하려 들고 오히려 피해자를 상대로 적극적인 대응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고용노동부나 인권위원회에 진정 고발을 접수하거나 민형사 소송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현명한 직장 생활을 위한 노동법 사용설명서》 249~350쪽

54. 회사에서 성희롱을 당했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중에서




웹툰 미생의 뒷이야기,

회사가 산업재해 처리를 해주지 않으려고 한다면?


[특별5부작] 미생 – 사석 : http://webtoon.daum.net/webtoon/viewer/27410


드라마 <미생>의 시작과 함께 원작인 웹툰 <미생>도 특별 5부작이 연재되었습니다. 현재 완결된 이 에피소드는 오 차장의 대리 시절 뒷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요. 본편에서 등장했던 검은 넥타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오 차장의 직속 상사가 과로로 사망했는데 회사는 산업재해 처리를 꺼립니다.

출처 – 다음 웹툰 미생


대표적인 과로사회인 한국이지만 그로 인한 폐해는 오롯이 개인이 지고 있습니다. 일에만 매달리다 보면 가족은커녕 자기 몸조차 돌보지 못하게 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산업재해를 당한 것도 억울한데, 산재는 신청과 증명 모두 노동자가 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노동 관련 법 개정에 신경을 써야 하는 이유입니다.


산재 신청은 근로자가 하는 것이고 업무상 재해 사실을 주장하고 입증하는 것도 근로자가 해야 합니다. 근로복지공단이 신청한 내용에 대해 '조사'를 하기는 하지만 보험급여를 지급하는 입장이고 예산을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산재 인정이 되도록 발 벗고 나서서 조사하거나 근로자에게 도움이 되는 증거를 찾아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근로자 주장에 허위 사실은 없는지, 입증이 부족하거나 객관적이지 못한 건 아닌지를 확인하는 데 더 적극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재해를 당한 근로자는 스스로 입증을 해야 하는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현명한 직장 생활을 위한 노동법 사용설명서》 421~422쪽

69. 회사에서 산재 신청을 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중에서


산재를 증명하려면 정황이나 자료가 충분히 필요한데 의학적 입증뿐 아니라 실제 업무와의 연관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회사가 보유한 자료가 필요합니다. 고로 산재는 회사의 협조 없이 규명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하지만 회사는 어지간해서는 산재 신청을 해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회사 이미지가 나빠지거나 경영상의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고 판단하거나 재해 근로자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등의 사유로 비협조적이거나 방해하는 행동을 취할 수 있습니다. 특히 건설업 같은 경우 재해율이 공사 입찰을 받는 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산재 승인이 나지 않게끔 조장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동료에게 압력을 가해 진술서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재의 경우 처음부터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시길 권합니다.


산재 신청을 하는 과정에서 입증이 불명확한 상황인 데다 회사 역시 비협조적인 상태라면 전문가를 찾아 방법을 논의하는 편이 좋습니다. 덜컥 접수부터 해버리는 것보다는 충분히 입증 자료를 준비한 후 접수하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 근로복지공단에 신청할 때 충분한 입증을 통해 주장하지 않으면 승인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또한 최초 신청 단계에서 허술한 준비로 승인을 받지 못하면 이후 불복을 제기할 때 결과를 바꾸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산재 신청은 처음부터 충실한 준비를 거쳐 신중하게 제기해야 합니다.


《현명한 직장 생활을 위한 노동법 사용설명서》 423

69. 회사에서 산재 신청을 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중에서

 

어떻게 해야 산재로 인정되는지, 업무상 질병에 대한 구체적인 인정 기준은 어떻게 되는지 등의 세부 사항은 《현명한 직장 생활을 위한 노동법 사용설명서》  부록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 다음 웹툰 미생


웹툰 <미생> 특별편에서 과로로 죽은 오 차장의 직속 상사는 산재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대신 회사는 위로금이란 명목으로 산재 보상금을 털어버렸죠. 지급하는 금액이 같더라도 회사 차원에서는 산재로 인정되는 것보다는 위로금을 주는 쪽이 이익이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제목과 마찬가지로 '미생'인 우리의 절대다수는 어딘가에서 노동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노동자의 권리를 명시한 노동법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입니다. 그리고 뭉치면 더 커집니다. 오늘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노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이 두 가지 아닐까요?

 

 

정규직 집단해고 OECD 34개국 중 4번째로 쉽다

 

지난 12월 4일자 《한겨레》에 우리나라 정규직의 실태를 다룬 기사가 났습니다.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 이어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서서 "정규직이 과보호되고 있다"며 고용 유연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여론몰이를 하고 있는 이때에 아주 적절한 기사를 기획해서 낸 것이죠.

 

기사 내용에 따르면 법과 제도상으로 우리나라의 정규직에 대한 정리해고는 쉬운 편에 속했습니다. 고용노동부가 한국고용노사관계학회에 용역을 맡겨 발표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노동시장 지표 비교연구〉 보고서(2013년)를 보면 정규직 집단해고는 34개국 중 4번째로 쉬운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합니다. 

 

  

출처 - 한겨레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법에서 보장된 정리해고뿐 아니라 명예퇴직, 권고사직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해고를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올해 4월 케이티(KT)는 지난해 적자를 이유로 8300명을 명예퇴직시킨 바 있습니다.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과 '파견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은 모두 합리적인 이유 없이 불리하게 차별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나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있으나 마나 한 조항이라는 게 노동계의 평가입니다.  

출처 - 경향신문

 

이런 상황에서 드라마 <미생>, 영화 <카트>에서 극명하게 다뤄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 등 노동시장 구조 개선을 위한 논의가 본격화될 전망입니다.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노사정위)는 지난 2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제4차 전체회의를 열고 노동시장 이중구조, 임금·근로시간·정년연장, 파트너십 구축 등에 대한 14개 세부 과제를 확정·발표했습니다.

 

세부 과제를 살펴보면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 해결을 위한 과제로 △원하청,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등 동반성장 방안 △비정규 고용 규제 및 차별 시정 제도 개선 △노동이동성, 고용·임금·근무방식 등 노동시장 활성화 방안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또한 임금·근로시간·정년연장 등에 대해서는 △통상임금 제도 개선 방안 △실근로시간 단축 연착륙을 위한 법제도 정비 △정년연장 연착륙을 위한 임금제도 등 개선 방안 등을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아울러 노사정 파트너십 구축과 관련해 △노사정위는 향후 노동기본권 사각지대 해소 △비조직부문 대표성 강화 △중앙·지역·업종별 사회적 대화 활성화 등을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노사정위는 이번에 확정한 세부 과제를 바탕으로 19일까지 큰 틀에서 노사정 기본 합의안을 내겠다고 했습니다. 2015년에 노동시장 구조 개선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주요 현안들에 대해 한꺼번에 논의를 시작하자는 노사정 합의를 이루어내겠다는 의도입니다. 이에 노사정위가 1월 19일 제5차 전체회의를 열어 노동시장구조 개선을 위한 기본방향 합의 문안을 논의할 계획이라고 하니 어떤 변화가 있을지 유의해서 살펴야 하겠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