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오늘은 신간 《키워드 오덕학―자생형 한국산 2세대 오덕의 현재 기록》을 소개합니다. 덕후 또는 오덕은 ‘특정 분야의 정보나 관련 상품,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집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일본어 ‘오타쿠’에서 유래해 이미 오래 전부터 생명력을 얻고 있는 한국식 표현이지요. 우리의 오덕 문화는 일본의 영향을 받았으되, 그 말이 쓰이는 맥락은 태반이 혼란스럽거나 혼동되거나 심지어는 적잖게 달라지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의 ‘오덕’은 일본의 ‘오타쿠’와는 또 다른 맥락성을 지니고 자생해가고 있는 중인데요. 《키워드 오덕학》은 ‘웹툰(WEBTOON)/오타쿠/코스프레/야오이 그리고 BL/OSMU(ONE SOURCE MULTI USE)/기록과 통계/백합(百合)/모에(萌)/지역 캐릭터/짤방/병맛/츤데레에서 얀데레까지/서브컬처(subculture)’에 이르는 총 13가지 키워드(열쇳말)를 통해 오덕 문화가 우리네 현실과 닿아 있는 접점이 무엇인지 상세히 살펴봅니다. 한마디로 《키워드 오덕학》은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의 ‘오덕 문화’를 충실히 소개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타쿠에 대한 부정적 인식

 

'덕후'의 어원이라 할 수 있는 '오타쿠'(おたく)는 일본에서도 멸칭으로 시작되었다. 칼럼니스트 나카모리 아키오는 《만화 브릿코》 1983년 6월호부터 실은 칼럼 〈'오타쿠' 연구〉에서 오타쿠를 '안경에 파묻혀 영양실조 걸린 하얀 돼지 같은데' '엄마가 사준 옷 차려입고' '세기말적으로 어두컴컴하다가 만화 행사장에선 잔뜩 모여 활개 치는' '남창 같은 구석이 있어 여자를 사귈 수 없을 것 같은 놈들'이라고 묘사했다. 명색이 연구란 말을 제목에 달아놓은 글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감상적 악담을 쏟아낸 까닭에 연재가 중단되긴 했으나 이 칼럼은 '오타쿠'라는 용어의 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다 1989년 미야자키 츠토무가 도쿄·사이타마 연속 여아유괴 살인 행각을 벌이자 일본 사회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일본 경찰은 처음으로 프로파일링 수사기법을 동원해 범인을 검거했다. 그런데 그의 집에서 5763개의 비디오테이프가 발견되고, 그 안에 호러 영화와 로리콘 성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언론은 '오타쿠=잠정적 범죄자'란 부정적인 인식을 유포하기에 이른다. 미야자키 츠토무는 '롤리타 콤플렉스 살인귀'라고 불렸다. 이 때문에 한동안 일본에서 오타쿠는 시각 기호로 창작된 캐릭터에 집착해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범죄 예비군 정도로 인식되었다. 2008년까지 NHK는 오타쿠를 금지어나 다름없는 방송 문제 용어로 구분하기도 했을 정도다.


하지만 이후 오타쿠에 대한 인식이 재정립되고 그들이 심취한 산업의 규모가 재조명되면서 인문학적 연구가 거듭되고 있다. 이로써 오타쿠는 '꽂히는 취향에 일정 이상으로 몰입하는 사람'을 뜻하는 표현으로 일반화하는 지리멸렬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한때 일본의 신어사전은 오타쿠를 '만화, 애니, 비디오게임, 아이돌 등 허구성 강한 세계관을 좋아하는 이들을 일컫는다'라고 정의한 바 있지만, 현재 오타쿠의 관심 대상은 철도나 밀리터리, 성우, 특정 인물 등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우리의 덕후 문화, 어디까지 왔나?

 

'덕후' 또는 '오덕'은 '특정 분야의 정보나 관련 상품,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집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일본어 ‘오타쿠'에서 유래해 오랜 시간을 거쳐 생명력을 얻고 있던 한국식 표현이었다. 그런데 인터넷 커뮤니티 공간을 넘어 다수의 일반 한국 대중 사이에서 '오덕'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된 건 TV 프로그램 〈화성인 바이러스〉(tvN, 2009. 3. 31~2013. 11. 26)였다. 2010년 1월 27일자 〈화성인 바이러스〉 프로그램은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진 안는 베개(끌어안고 잘 수 있는 등신대 베개)를 들고 나와 "이 캐릭터와 혼인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출연자를 소개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서 조롱처럼 돌아다니던 '안여돼'(안경 여드름 돼지)형 인물이 화성인(=상식 밖 인물)의 대표주자 '덕후'의 표상으로 정립되는 순간이었다. '오덕' '덕후' 부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대중에게 고정된 것이다.

 

이를 보면 한국의 '오덕' 또한 일본 ‘오타쿠’의 전철을 밟은 듯하지만, '오덕 문화'는 거기에 머무르고 있지만은 않았다. 웹툰이 상업적 정립 10년을 넘긴 2013년을 거치며 미끼 상품에서 벗어나 콘텐츠와 상품으로서 가능성을 타진하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덕후 문화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향유층과 함께 나이를 먹기 시작했다. 문화 코드란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 정의되던 범위 바깥으로 확장하며 경계를 무너뜨리고 급기야 멸칭마저도 유희화하는 현상을 겪게 마련이고 그러지 못하는 문화는 역설적으로 박제화하거나 사멸하는데, 오덕 문화는 다행스럽게도 확장되기 시작했다.


근래 화제를 모은 TV 예능 프로그램 가운데 〈능력자들〉(MBC, 2015. 11. 13~2016. 9. 8)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인류는 덕후들의 능력으로 인해 진화되었다" "당신의 덕심이 바로 당신의 능력이다"(프로그램 소개 중에서)라며 '덕후'를 별다른 주석문 하나 없이 전면에 내세웠다. 재밌는 건 〈능력자들〉이라는 프로그램의 제목 자체다. 말 그대로 덕후를 '능력자'로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작진은 여기서 한술 더 떠 "개개인의 전문성이 나라의 경쟁력이 된다"라고까지 피력했다. 새로운 프로그램의 등장 정도로 여길 수도 있겠으나, 어떤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상전벽해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변화로 비치는 현상 이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이란 바로 덕후들, 바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TV 미디어가 '능력자' 이전에 '화성인'으로 분류했던 이들을 의미한다.


아스카(〈신세기 에반게리온〉 여주인공 가운데 한 명)를 향한 애정을 감추지 않는 연예인과 〈도라에몽〉에 미쳐 사는 몸짱 훈남 연예인처럼 사회적 인지도와 실력을 갖춘 그럴싸한 오덕층의 출현은 스스로를 덕이라 생각해본 적 없는 사람이 대부분일 일반 대중에게는 나름대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라? 우와? 세상에?' 하며 놀라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그런 사람이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많다는 생각에 도달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들이 '사회성 결여' 같은 비상식적 면모와 거리가 멀다는 점도 인지하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모두는 어느 무언가에는 '덕'이다. '덕질'이 즐거운 유희가 되는 시점에 '오덕·덕후=안여돼' 프레임은 힘을 잃게 된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 창궐하던 사방천지의 덕질 놀이가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TV라는 절대적 대중문화 살포 도구(!)에까지 침투하고 있다. '오덕' '덕후' '덕질'이라는 말이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나 〈능력자들〉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한 포인트다. 〈능력자들〉에 출연한 이들은 겉보기에 멀쩡하고 자기 일에도 충실했다. 더구나 관심 대상을 향한 애정과 노력은 실제 해당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조차 혀를 내두르다 못해 "너 이쪽으로 와라"라며 취업 제안을 즉석에서 받을 만큼 전문성마저 갖추고 있었다. 오덕들의 노력과 지식은 '덕질'이라는 범주 안에 놓이지 않아 왔을 뿐 덕후 문화가 애먼 논란 속에 정체를 겪고 있던 시기부터 이미 쌓이고 있었던 것들이다. 우리 시대의 흐름이 이들이 쌓아온 면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칭찬할 수 있는 데까진 온 것이다.


 

오덕 문화가 우리네 현실과 닿아 있는 접점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오덕 문화가 새로운 경제 동력이 되고 있다. 이들이 몰입하는 분야를 기반으로 한 애니메이션, 게임 같은 콘텐츠 시장이 꾸준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9년이면 이 분야만 약 1700억 달러 규모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오타쿠 시장의 규모를 알려주는 단적인 자료가 있다. 2004년 8월 24일 노무라종합연구소(野村総合研究所)가 발표한 〈마니아 소비층은 애니메이션, 만화 등 주요 5개 분야에서 2,900억 엔 시장—오타쿠층의 시장 규모 추계와 실태에 관한 조사〉라는 보도자료를 보면 '애니메이션/만화/게임/아이돌/조립PC' 다섯 개 분야에 걸친 오타쿠들의 소비 시장 규모는 2900억 엔(약 2조 90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콘텐츠 관련 네 개 분야, 즉 애니메이션, 아이돌, 만화, 게임 산업 전체의 시장 규모는 약 2조 3000억 원이며 이 가운데 오타쿠 소비층이 금액 기준 11퍼센트를 차지했다. 이처럼 오타쿠는 구매 의욕이 높을 뿐 아니라 커뮤니티 형성의 핵심, 차세대 기술 혁신의 장, 신상품 실험 대상으로서의 가치도 높아 산업 관점에서 기대되는 역할이 큰 모집단이라 할 수 있다. 오타쿠든 한국화한 오덕이든, 이들에게 통하는 코어한 부분을 이용하려면 이들에 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오덕들의 문화와 역할은 일본의 오타쿠들과는 많은 부분에서 비슷하되 다르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더욱 달라질 것이다. 이 때문에 《키워드 오덕학》의 저자는 '오덕'을 '오타쿠'와 단순 동의어로 놓고 용어를 해설하기보다는 우리나라의 오덕 문화가 우리네 현실과 닿아 있는 접점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려 노력했다. 이 책의 특징은 일본에서 유래한 '바닥 문화'를 파고드는 차원이라기보다 우리나라에서 오덕 문화와 개념들이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가에 주목했다는 점이다. 이 책의 제목이 《키워드 오타쿠학》이 아닌 《키워드 오덕학》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우리에겐 우리에게 맞는 '오덕' 담론이 필요하다. 아울러 앞으로도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 책이 그 시발점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저자의 바람을 공유하고자 한다.


 

지은이 

 

서찬휘
본명 임채진. 1979년생. 1998년 이후 지면과 형식을 가리지 않고 만화 이야기를 해온 만화 칼럼니스트. 자생한 한국산 2세대 오덕으로 한국 오덕 문화의 흐름과 성격을 역사라는 맥락 안에서 꾸준히 탐색하고 정리해왔다. 만화, 애니, 성우, 애니송, 라이트노블 등을 덕질하다 현재는 만화를 중심으로 정착 중. 만화 정보 웹진 《만화인manhwain.com》 운영을 비롯해 대학 강의, 인터뷰, 팟캐스트 진행, 전시 기획, 세미나 기획 및 진행, 캘리그래피 등 만화와 연관성 있는 일들에 다양하게 참여하고 있다.

 

 

차례

 

들어가며 _자생형 한국산 2세대 오덕의 현재 기록

 

01. 웹툰(WEBTOON)
‘MADE IN KOREA’ 만화 형식 웹툰의 정립 과정과 대외 브랜드화 현황에 관하여

-생각할 거리들

 

02. 오타쿠
‘화성인’에서 ‘능력자’까지, ‘덕후’의 즐거운 위상 변화

-생각할 거리들

 

03. 코스프레
불분명한 유래 집착과 일본 콤플렉스를 넘어서

-생각할 거리들

 

04. 야오이 그리고 BL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섹슈얼리티 판타지

-생각할 거리들

 

05. OSMU(ONE SOURCE MULTI USE)
똑바로 서지 못한 원 소스, 멀티 유즈가 무시한다

-생각할 거리들

 

06. 기록과 통계
한국 만화가 진정 튼튼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

-생각할 거리들

 

07. 백합(百合)
소녀(여성) 간의 우정과 유대에 천착한 판타지 픽션

-생각할 거리들

 

08. 모에(萌)
극단적으로 부품화한 취향 코드와 언캐니밸리

-생각할 거리들

 

09. 지역 캐릭터
한국에서 ‘쿠마몬 성공신화’를 바라고 싶다면

-생각할 거리들

 

10. 짤방
이미지 속 맥락의 만화적 재해석

-생각할 거리들

 

11. 병맛
조롱을 내재화한 이 시대의 산물

-생각할 거리들

 

12. 츤데레에서 얀데레까지
상반된 마음의 간극을 부품화하다

-생각할 거리들

 

13. 서브컬처(subculture)
오타쿠 컬처? 문화콘텐츠?

-생각할 거리들

 

마무리하며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지난번에 새로운 연재물 [독립, 하셨습니까?]의 기획의도를 소개했습니다. 인터뷰와 문화 리뷰+칼럼이 뒤섞인 글을 쓰겠다고 밝혔는데요, 오늘부터 본격적인 연재가 시작됩니다. 첫 순서로 <조선명탐정> <의뢰인>의 제작자이자 첫 장편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의 감독, 19살 연하의 동성애인과 결혼선언을 하여 주목받고 있는 김조광수 씨의 삶을 소개합니다.

 1. <당연한 명제에서 열린 결말으로>
 2. <동성애와 드라마의 행복한 공존, 김조광수의 영화 두결한장> 



동성애와 드라마의 행복한 공존, 
김조광수의 영화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 이 글에는 영화 내용에 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성애가 멜로와 만날 때

김조광수 감독의 공식적인 프로필 사진. 사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은 보기 드문 편이다. 변화무쌍한 표정을 볼라치면, 한때 그가 배우를 꿈꾸었다는 사실이 자연스럽다.

김조광수는 "퀴어영화는 멜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계급과 출생의 비밀, 집안의 결혼 반대, 불치병과 시한부 등 소위 '막장' 코드는 조만간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시효가 다할지도 모른다고요. 이런 막돼먹은 요소들이 이토록 오랫동안 시청자들을 사로잡아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간단히 말하면, 사랑과 드라마에는 '장애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넘지 못할 것 같은 벽에 부닥쳐 수없이 좌절하다가도 절대 좌절하지 않는 주인공이 보란 듯 역경을 넘어설 때의 쾌감과 대리만족은 현실세계에서 그만한 기염을 토해야 할 일도 없고, 하루하루가 절대 드라마틱하지 않은 이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인 판타지임이 틀림없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제는 드라마의 결말이 예측 가능해지니 정황을 뒤집는 '반전코드'는 물론, 개연성도 없는 황당한 결말로 모두를 배반하는 일까지 생기는 것이지요. 뻔한 이야기 전개를 비틀고 또 비틀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입니다. '갈 데까지 가는' 상황이 점점 임계치를 높여가면서, 막장이나 반전을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다고 봐야겠지요.

사실 동성애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장식'이나 '감초' 캐릭터로 쓰인 건 꽤 오랜 일이지만, 동성애자의 사랑을 전면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지 않은 일입니다. 김수현 작가의 <인생은 아름다워>가 안방극장에 최초의 본격 동성애를 등장시킨 신호탄이자 논란의 불씨를 댕겼지요.

동성애가 옳은지 그른지는 논할 수 있는 명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존재에 이유가 없듯,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범죄가 아닌 한에서야) 누군가의 허락이나 재단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요. 일부 기독교인은 그것이 신의 뜻이라 믿고 동성애를 죄악으로 여깁니다만, 성서를 경전으로 받아들이는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도 퀴어신학(동성애에 관한 신학적 탐구를 다루며 테드 제닝스 등이 대표적인 학자)이 태동하는 걸 보면 동성애를 탄압하는 것은 꽤 정치적인 측면이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동성애라는 '외부(?)의 적'을 설정하고 위기를 면하려는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섣부른 '정죄'가 교회 내에 존재하는 동성애자들을 도리어 시험에 들게 하고 신의 사랑을 의심하게 한 것이 작금의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동성애를 전면으로 다루는 퀴어영화는 이 보편적이지 않은 사랑 자체를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꽤 도전이며, 때로 누군가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끔 해주는 교과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화를 만들고 상영하는 자체가 성소수자 인권운동과 닿아있지요.) 퀴어영화는 야오이(게이 판타지를 그린 만화의 일종)에 열광하는 '빠순이'들이나 향유하는 하위문화의 일종으로 여겨져 왔지만, 근래 그 관객층이 넓어지며 작품 또한 다양해지는 추세입니다. 퀴어영화의 대중화와 함께 성소수자의 사랑을 무조건 슬프거나 절망적인 상황으로 그리지 않는 '힘 빼기'의 흐름 또한 뚜렷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영화 제작자이자 영화감독을 겸업하는 김조광수(청년필름 대표)가 있습니다.

그의 첫 장편영화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은 그야말로 대중적입니다. 저예산영화로 많은 개봉관을 확보하지 못했음에도 개봉  개봉 3주 만에 퀴어영화로는 최다 관객 기록을 돌파해 8월 초순까지 5만 명이 넘는 관객과 만났습니다.  
 

<두결한장>의 성취, 퀴어영화를 보는 즐거움

감독은 관객이 퀴어에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크게 개의치 않아요. 결혼과 죽음이라는, 일종의 통과의례를 통해 성적 소수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기쁨과 슬픔, 아픔을 덤덤한 시선으로 조금은 밝게 그려냅니다. 감독의 분신과도 같은 주인공 '민수'는 의사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지만, 그가 게이라는 사실은 부모조차 알지 못합니다.

김남길, 이제훈, 유아인 등 남자 스타를 발굴해내는 안목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 제작가 겸 감독인 만큼, 그간 배우로서 존재감이 뚜렷하지 않던 김동윤을 '재발견'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평범한 삶을 원하는 부모님의 열망 앞에 못 이기는 척 결혼하지만, 그 결혼은 실은 동료 의사이며 레즈비언인 '효진'과의 계약에 의한 것입니다. 오랜 동성연인이 있는 효진은 이성애 부부가 아니기 때문에 정식으로 아이를 입양해 키울 수 없어 결혼관계에서 입양하는 것처럼 꾸미려는 것입니다. 적당한 시기에 이혼하고, 아이 양육권을 효진이 가지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이 결혼에 잠재된 폭탄이 있으니, 그것은 민수의 부모님입니다. 휴일 아침,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 살림살이를 헤집고 아들에게 밥을 제대로 해먹이는지 점검하는 시어머니 덕분에 이 가짜 결혼생활은 언제 들통 날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죠.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한눈에 반한 연인 '석'을 사랑하면서도 사람들이 알아챌까 두려워 사랑을 드러낼 줄도,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말할 용기도 없는 민수의 '비겁함'입니다. 물론 쉬이 그럴 수 없다는 건 이해하지만, 민수의 그런 행동 때문에 그를 좋아하는 친구 '티나'는 결국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고 맙니다. 민수와 티나에게는 한국판 '섹스 앤드 시티'를 연상시키는 일군의 게이 친구들이 있으니, 그들이 생전의 티나를 추억하는 장면에서 관객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헛갈리는 상황에 봉착해요. 죽음을 맞이하고서야 티나의 성정체성은 가족에게 '커밍아웃' 되고, 각자의 방식으로 친구를 보내며 민수와 다른 이들도 한 발짝씩 자라나게 되지요.

원초적인 생활의 모습에서부터 흥겨운 피날레 결혼식 장면까지, 그의 영화는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과 판타지를 넘나들면서도 생의 무게와 삶의 흥겨움 어느것 하나 놓치지 않는 장점이 있다.

퀴어영화는 다양한 사랑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데서부터 출발해, 누군가를 사랑함에도 사랑으로 인해 자신이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과 맞닿은 지점에서 긴장감이 생겨나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가족이나 친구에게 드러내 소개하고 싶은 건 자연스러운 욕구지만, 과연 축복받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고, 때론 소중한 사람을 잃을 각오까지 해야 비로소 직면할 수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영화 <두결한장>은 흥겹고, 페이소스마저 예쁘게 포장되어 이야기에 폭 빠질 수 있도록 해줍니다. 김조광수가 처음부터 감독으로 데뷔한 것이 아니었고 제작자로 오랜 기간 일한 덕분에 균형감각(대중의 취향과 감독의 의도, 투자자와의 조율 사이에서 적당한 지점을 찾는 능력)이 빛을 발하는 것이겠지요.

정작 영화를 만든 감독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못 하고 글을 끝맺어야겠군요. 저는 그가 게이라는 사실을 맨 마지막에 말하고 싶었습니다.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사실이지만 연하인 연인과의 결혼 때문에 본의 아니게 받게 된 대중의 관심을 도입에서부터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가 누구보다도 당당한 이유는,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스스로 행복을 성취한 게이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단지 그 이유로 그를 비난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하지만 그는 게이 역할 배우를 캐스팅하면서 수없이 거절당했습니다. 어떤 배우는 굳이 만남을 청해 그의 면전에서 "동성애는 죄라서 이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답니다. 종교적인 이유나 신념으로 그를 비난하는 일은, 나중에 천국에 가서 해도 늦지 않을 텐데요.

아무튼 내년 즈음, 그는 결혼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굳이 청첩장이 없어도 갈 수 있고, 게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춤과 음악이 있는 흥겨운 축제로 만들려 한답니다. 축의금은 성소수자 인권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데 쓰겠다고 하네요. 같이 가서 축하해주지 않으실래요?
 
* 이 글은 김조광수 감독을 인터뷰하고, 그의 인터뷰집 《나는 게이라서 행복하다》도 참조해 썼지만 인터뷰를 인용하지는 않았습니다. 검색하면 손쉽게 여러 매체에 실린 그의 이야기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조금 다른 시각에서 쓰고 싶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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