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할 길은 멀지만 희망은 있어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몇 년간 내수시장 상황이 좋지 않은 탓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이 많아졌습니다. 정부는 기업 친화적인 정책을 펴서 낙수효과를 기대했지만, 넘치는 물은 대기업이 자체적으로 거둬들이니 시민에게 돌아갈 '낙수'는 없었습니다. 높아지는 물가와 팍팍한 살림 때문에 많은 시민이 한숨짓고, 수익이 달리는 중소기업의 연초 시무식은 시무룩한 분위기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 1퍼센트에 대한 99퍼센트의 불만이 갈수록 커지는 상황입니다. 뉴스에 등장하는 대기업 회장의 주가조작 및 횡령사건, 그들을 봐주는 검찰, 국민의 동의 없이 밀어붙이는 민영화 논란, 끝을 모르고 오르는 물가와 등록금으로 말미암아 99퍼센트에 해당하는 국민의 불만은 극에 다다랐습니다. 미국의 시민은 우리보다 먼저 불만을 표출했습니다. 99퍼센트의 돈을 투자라는 핑계로 갈취하며 호화롭게 살아왔던 미국 월가의 금융종사자들을 향해 가진 것 없는 시민이 칼을 뽑아들었습니다. 도덕적 해이가 극에 달한 금융종사자들을 심판하기 위해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흐름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드높습니다. 이러한 때에 99퍼센트 위에 군림하며 여전히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어려운 이웃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베푸는 사람들도 존재합니다. 이른바 '기부 천사'들입니다. 이름처럼 베풂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양심이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것이지요. 1990년대에 IMF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는 이 땅의 가진 자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 세간에 오르내리는 것도 이러한 상황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오늘은 '기부'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오래된 기부문화를 간직한 해외의 사례를 먼저 살펴보고, 우리 사회의 현실을 돌아보면서 올바른 기부문화를 세우려면 과연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해외 기부, 어떻게 이뤄지고 있나

해외에선 어떤 방식으로 기부가 이뤄지고 있을까요? 우선,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고 소비자의 권익을 향상하는 방향으로 다양한 환원 방식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최근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넘어서 기업의 사회참여(CCI)로 이어저, 더욱 개개인의 삶에 밀착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미국에서는 굵직한 재벌들의 통 큰 기부가 하나의 문화를 이뤄왔습니다. 존 D. 록펠러는 스탠더드 오일이라는 독점기업을 만들어 석유 이권을 챙기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거대한 트러스트는 독립 석유업자, 정유사, 운송회사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회유, 공갈, 협박, 인수·합병 등의 술책으로 자신의 이권만을 강화하면서 경쟁사를 고사시켰습니다.

여성 저널리스트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은 악덕기업인 스탠더드 오일과 석유재벌 록펠러의 음흉한 뒷거래와 비열한 상거래 문제를 파헤쳐 《매클루어 매거진》에 19번에 걸쳐 탐사보도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로써 록펠러의 실체를 미국의 국민이 오롯이 이해하게 되었고, 독점기업이 자본주의적 질서를 얼마나 파괴하는지를 실감했습니다. 국민의 반감을 스탠더드 오일은 연방정부에 의해 해체되고 맙니다.

그런데 부당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던 록펠러는 '기부'를 통해 자신의 선한 이미지를 다시 세우려 했습니다. 그는 시카고 대학교를 설립했고, 록펠러재단을 세워 의학 연구에 크게 이바지하는 한편, 교회와 학교 등의 문화사업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미국 최초의 의학연구소인 록펠러의학연구소를 세운 사람도 록펠러였습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축적한 돈을 사회에 환원하여 록펠러만큼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이를 찾기는 어려울 정도입니다.

앤드류 카네기와 존 D. 록펠러(출처: 위키피디아)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 또한 노동자를 착취하며 축적한 자금을 이용하여 엄청난 기부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는 당시로써는 천문학적 액수인 2500만 달러를 기부하여 워싱턴 카네기협회를 설립했습니다. 워싱턴 카네기협회는 공공도서관 건립을 지원하는 단체입니다. 이 협회 덕분에 미국 전역에 2500개의 도서관이 생겼습니다. 이 외에도 카네기는 카네기회관, 카네기 공과대학, 카네기교육진흥재단 등을 설립하여 교육과 문화 분야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카네기홀은 지금도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공연장 가운데 하나로 유명 인사들이 오르는 무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기부'는 개인과 회사의 어두운 면모를 감추면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한 방편이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기업이 이런 의도로 기부합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리 돈을 버는 과정이 투명하고 정당하지 않으면 기부를 한들 예전만큼 직접적인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시민의식이 그만큼 성숙해졌기 때문이지요.

기부라는 방법은 세대를 거쳐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세계 부자 순위에서 앞다투는 인물인,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과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 빌 게이츠입니다.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출처: 위키피디아)

2010년 《포브스》는 세계 셋째 부자로 워런 버핏을 선정했습니다. 2006년에 그는 자신의 재단의 85퍼센트에 해당하는 370억 달러를 '빌앤드멜린다게이츠재단'을 포함한 여러 자선재단에 기부하겠다고 약정서에 서명했습니다. 서구에서는 부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설립하는 게 일반적인 일이지만, 버핏은 잘 운영되고 있는 재단을 찾아서 조건없는 기부를 약속했습니다. 어떠한 이익을 바라지 않는 순수한 기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버핏은 실질적인 기부 외에도 상속세 폐지에 반대하면서 세금을 더 내겠다고 해서 많은 사람에게 찬사를 받았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운영체제(OS)인 '윈도'와 '엑스박스(XBOX)라는 게임기를 만든 마이크로소프트의 설립자인 빌 게이츠도 기부에 관한 한 빼놓을 수 없는 명사입니다. 빌 게이츠는 항상 세계 최고의 부자 순위에 이름을 올렸는데요,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최고의 부자로 1995~2007년까지 연속으로 1위, 그리고 2009년에 다시 1위 자리에 올랐습니다(2010~2011년에는 2위).

세계적인 갑부인 빌 게이츠가 부자 순위에서 떨어지게 된 이유는 2000년 빌앤드멜린다게이츠재단을 설립하여 기부 사업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이 재단은 공공도서관과 고속통신망 개선에 힘쓰는 한편 대학생 장학금 조성, 중국의 결핵 퇴치, 소아마비 퇴치, 빈곤층을 위한 모바일 금융서비스 사업, 결핵 백신 개발연구, 말라리아 백신 개발연구, 어린이 치료약품 연구비, 빈민 지역 교육환경 개선, 저소득층 장학사업에 이르는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한국의 기부문화, 어디까지 왔나

우리 사회에서 기부에 대한 인식은 어떨까요? 최근 들어 기부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많이 나아진 편이지만, 여전히 부정적인 시각이 공존합니다. 우선 대기업 총수의 기부활동에 대해서 죄를 지은 후 그것을 면피하려는 방편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음 창업자 이재웅 씨는 SNS를 통해 경제 5단체의 구명운동을 비판했다.

2011년 11월에 SK 총수 형제의 비리가 밝혀지면서 검찰이 수사에 나선 뒤 처벌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경제 5단체는 탄원서를 내고 SK 총수 형제의 선처를 요청했습니다. SK 최태원 회장이 비리를 저지르고 사면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난 범죄여서 세간의 비난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대기업 총수들이 처벌받을 때마다 경제단체의 탄원이 이어지는 것에 대해, 다음커뮤니케이션의 창업자 이재웅 씨는 "배임, 횡령, 비자금이 기업가정신과 무슨 상관"이냐며, 그들의 비리를 눈감아준 사외이사나 감사위원회에게도 일침을 날렸습니다.

대기업 총수들은 구속될 때마다 면피용으로 기부를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이 제대로 이행된 적은 없다.

이렇게 우리나라에서는 기업의 총수들이 범법을 저지르다 사면될 때마다 하는 '의례적인 기부 약속'이 있습니다. 사회환원을 약속하거나 기부재단을 만들겠다는 공언입니다. 현대기아자동차의 정몽구 회장은 불법을 저지르고 사면되면서 5000억 사재를 출연해 기부재단을 만들었습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도 특별사면된 후 1조 원 규모의 사재를 출연해 재단을 만들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대기업 총수들이 잘못을 인정하면서 기부를 약속하고, 재단을 만드는 일이 무엇이 잘못된 것이냐 하는 반론도 있을 법하지만, 불법적인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사면을 받을 때마다 '기부'와 관련된 이야기를 입버릇처럼 하는 것은 왠지 씁쓸하지 않습니까?

대기업 총수 외에도 우리 사회에서 기부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을 남긴 사건은 또 있습니다. 사람들이 십시일반 하여 모은 돈을 좋은 일에 써달라며 재단에 기부했는데, 이를 유용하고 착복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무한도전>은 여러 방법으로 성금을 조성해 기부해왔습니다. 해마다 그들의 활동 내용을 담은 달력을 만들어 판매한 기금을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사용해달라며 기부를 해왔죠. 그런데 <무한도전>의 기부금을 받은 '전국소년소녀가장돕기시민연합중앙회'는 학생들에게 돈을 되돌려받는 수법으로 8000여만 원이라는 거액을 챙겼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연말이면 여기저기서 보이는 '사랑의 열매', 다들 아실 겁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라는 단체는 연말연시가 되면 성금을 걷어서 이를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해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2011년 3월,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예산을 부적절하게 사용한 직원 32명이 징계처분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업무용 법인카드를 워크숍 경비, 부서회식비 등으로 부적절하게 사용했습니다. 많은 시민이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십시일반으로 모은 귀중한 성금을 터무니없이 사용한 것이죠.

또 있습니다. 미소금융재단 사업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시민단체가 자생적으로 운영하는 무담보 소액대출사업인데요, 저소득·저신용자들에게 무담보로 저금리의 창업운영자금을 빌려주어 자활을 돕는 사업입니다. 그런데 미소금융재단 사업의 사업자 선정 절차부터 잡음이 일기 시작하더니 결국 대표가 서민 대출용으로 지원받은 23억여 원을 빼돌리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서민을 위해 사용해야 할 대표가 소중한 자금을 자신의 주머니에 챙기는 인면수심의 일을 벌인 셈입니다.

그래도 이름 없는 기부는 이어진다

기부가 면피용으로 전락하고, 각종 기부단체가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지만, 따뜻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이름 없는 천사들의 기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기부 방식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과거에 단체나 학교 위주의 기부가 성행했다면, 이제는 시민이 '작은 기부재단'을 만들어 돕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부모님께서 남기고 가신 유산으로 부모님 명의의 재단을 만들어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재단이 이런 일을 맡아서 운영하고 있는데요, 2002년 첫 사업을 시작한 이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랍니다. 또한 돈으로 기부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부하는 '재능기부' 같은 방식도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작년에 삼성의 백혈병 환자에 대한 소식이 세간에 알려지자, 이들을 돕기 위해 '드라큘라'라는 모임이 생겼습니다. 이들은 수혈이 필수적인 악성 빈혈이나 림프종 환자들이 큰 비용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헌혈을 하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SNS를 통해 직접 투자를 받는 소셜펀딩

이 외에 소셜펀딩이라는 방식의 기부방식도 생겼습니다. 소셜펀딩은 웹사이트에 특정 프로젝트를 제안하면 방문자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입소문을 내주고, 프로젝트에 공감하는 불특정 다수가 소액을 기부 또는 투자함으로써 프로젝트를 실현하는 방식입니다. 이미 해외에선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많은 엔젤 기부자를 모아 사업화한 사례가 많이 있습니다.

내수시장이 어려워도, 가파르게 오르는 물가 때문에 살림살이를 걱정해도,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남모르게 어려운 이웃을 위해 선행을 베푸는 분들이 존재합니다. 연말연시가 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선행이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립니다. 아프리카 아동을 위해 1억 800만 원을 쾌척한 군밤할머니의 사례나, 12년째 전화로 기부금액이 있는 장소를 알려주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전주의 한 얼굴 없는 천사, 구세군에 2억을 기부한 90살 노부부의 선행 등을 보면 아직도 우리 사회에 희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감합니다.

바람직한 기부문화의 정착을 위하여

지금까지 해외의 기부문화와 한국의 기부문화를 비교해보았습니다. 해외 사례와 비교할 때 우리 사회는 기부문화가 잘 정착되어 있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았습니다. 대기업과 재벌은 여전히 면피용으로 기부를 벌이고 있고, 우리 사회에서는 그런 꼼수가 여전히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민의식을 성장과 더불어 개인 차원의 기부문화도 날로 성숙해지고 있습니다. 남모르게 베푸는 선행, 청년들의 봉사활동, SNS를 이용해 필요한 사람에게 투자금을 유치하는 소셜펀딩과 개인 재단에 이르기까지 그 방법은 날로 다양해지고 참여하는 이들의 수도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여러분도 기부활동에 동참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어려운 학생이나 이웃을 직접 지원하는 방법부터 특정 기관을 정기후원하는 방법, 돈이 아닌 재능을 기부하는 방식 등, 찾으려 한다면 얼마든지 여러분에게 적합한 방법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바람직한 기부문화의 정착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참여로부터 시작됩니다. 추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이웃을 생각하는 따뜻한 기부에 동참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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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 생각비행은 서울디지털포럼에서 재미있는 내용의 발표를 들었습니다. 최근 서구권을 비롯해 한국에서도 유명해진 위키리크스에 관련된 주제 발표였는데요, <위키리크스 대 저널리즘〉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발표였습니다. 강연자는 《위키리크스: 권력에 속지 않을 권리》의 저자 중 한 사람인 마르셀 로젠바흐가 맡습니다. 그는 독일을 대표하는 시사주간지 《슈피겔》 기자로, 줄리언 어산지를 직접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책을 출간했지요. 로젠바흐의 주제 발표는 위키리크스에 대한 느낌과 함께 위키리크스와 같은 폭로 저널리즘이 기존 언론과 어떻게 협력해야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지 그 방향을 제시해주었습니다. 간단한 발표지만 건질 내용이 많습니다.

위키리크스 대 저널리즘
- 마르셀 로젠바흐(《슈피겔》 기자, 《위키리크스: 권력에 속지 않을 권리》 공동저자)
 
위키리크스가 한국에서 관심을 받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간 위키리크스가 여러 가지 비밀 문건을 발표했음에도 한국은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국무부 비밀문건 중 역대 한국의 대통령을 평가하는 내용의 문건을 발표하자 한국도 위키리크스에 관심을 보였다.

위키리크스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크게 환영하기도 하는 반면 혹평도 받고 있다. 평가가 어떠하든 위키리크스가 나온 뒤 그 영향은 무척 크다. 위키리크스 이후 미국에선 오픈리크스가 생겼고, 《월스트리트 저널》에서도 위키리크스와 비슷한 플랫폼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어느 언론에서도 위키리크스와 같은 플랫폼을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제 나는 줄리언 어산지와 만나 이야기하고 경험했던 위키리크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내가 위키리크스라는 존재를 알게 된 계기는 2008년 독일 해외정보국에서 조사한 내용이 위키리크스를 통해 유출된 사건에서 비롯했다. 그 존재를 좀 더 알아보기 위해 조사했지만, 간단한 인터넷 사이트와 발신자 불명의 메일 외에 단서가 없었다. 이후 집요한 조사 끝에 나는 런던에서 어산지를 만날 수 있었고 그와 열띤 토론을 벌였다.

위키리크스는 반(反)미디어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전통적인 미디어에 반대하고, 그것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가 특히 싫어했던 내용은 전쟁보도였다. 어산지는 어떠한 정보를 유통하는 데 있어서 주관적 견해를 넣어선 안 된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처음 공개된 정보는 다듬어지고 각색되어 원래 모습을 잃고 만다. 어산지는 주관적 개입을 철저히 배제하고 원본을 공개함으로써 사람들 스스로 사건을 이해하도록 접근하는 편이 옳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줄리언 어산지가 이야기하는 〈과학적 접근방식〉이었다.

사실 위키리크스가 최초의 폭로 플랫폼은 아니다. 위키리크스 이전에도 그러한 플랫폼을 만든 사람들은 존재했으며, 익명으로 문서를 공개해왔다. 줄리언 어산지는 그런 사람들과 폭넓게 교류했으며 그들로부터 플랫폼을 배웠다. 어산지의 위키리크스가 담당한 큰 역할은 이러한 폭로 플랫폼을 세계화했다는 데 있다.

줄리언 어산지가 이야기한 과학적 접근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첫째로 아무리 중요한 문건을 공개하더라도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센지는 유명한 저널리스트가 아니었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그가 신발을 신지 않고 양말만 신고 다녔기 때문에 알아보는 사람은 몇몇 있었다. 하지만 저널리스트로서 그의 존재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 때문에 어산지는 미디어와 손을 잡았다. 미디어에 기밀정보를 제공한 순간, 줄리언 어산지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둘째로 정보를 줘도 그것을 이용해 재해석할 사람들이 부족했다. 어산지가 이야기한 과학적 접근을 다시 이야기해보자. 그는 제대로 된 기밀정보를 사람들에게 알리면 각자 그것을 해석하고 판단하리라고 생각했다. 어산지는 그러한 역할을 할 사람을 네티즌과 블로거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하나의 외교 문건이 공개되었다고 해보자. 내가 몸담은 《슈피겔》만 해더라도 그 자료를 해석하고 기사화하기 위해 50여 명의 전문 기자가 협업한다. 외교 문건만이 아니다. 그 밖의 여러 문건도 마찬가지다. 문건이 공개되어도, 거기에 쓰인 언어는 전문용어이고, 자신들만 아는 약자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정확한 지식이 있어야 해석 가능한 내용이 많다. 이러한 문건을 한 명의 블로거가 해석하기란 쉽지 않다.

이에 줄리언 어산지는 자신이 비판했던 미디어에 협력하게 되었다. 그는 블로거들이 유일한 원래 정보를 활용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고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키리크스가 미디어와 손을 잡긴 했지만, 아직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우선 편집의 문제다. 어산지는 문서 원본을 공개하는 방식을 원칙으로 삼았으나 내가 속한 《슈피겔》만 하더라도 공익에 맞는 자료만을 공개한다.

다음으로 정보를 제공한 사람의 성격도 다르다. 기존 언론에 정보를 공개한 사람들은 자신이 공개한 정보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를 확인한다. 즉 공개한 정보로 무언가 바뀌길 기대하는 바람이 있다. 하지만 위키리크스에서 제공한 정보와 정보제공자는 그 다음 과정에 대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저 정보를 제공한 데서 끝난다.

이러한 불편한 관계는 결국 위키리크스의 변화를 가져왔다. 위키리크스와 같은 형태의 플랫폼이 기존 미디어에 생겼으며, 이는 위키리크스와 미디어의 윈-윈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미디어가 하지 못했던 점을 보완하는 새로운 모델로 제시된 것이다. 물론 위키리크스 자체는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결론은 위키리크스 그 자체로 성공할 수 있는 모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기존의 미디어와 협력해 성공을 거둘 수밖에 없는 모델이었다. 하지만 위키리크스는 기존 미디어에 분명히 큰 도움을 주었다. 위키리크스는 기존 언론이 알아내지 못한 정보들을 공개했다. 기존 언론이 하지 못한 일은 해낸 셈이다. 이러한 모습은 〈탐사 저널리즘〉의 필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 위키리크스는 전통적인 미디어와 협력하여 성공했다.
- 문서에 대한 관심이 적극적으로 증가
- 위키리크스 자체에 대한 관심도 증가
- 2010년 기부금은 기록적인 수치를 기록
- 여러 논란에도 아무런 피해가 없었음
- 오히려 외교 전문들이 튀니지의 민주화 운동에 힘을 실어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 우리의 경험은 이와 같다.
- 폭로 플랫폼과 미디어의 관계는 윈-윈 모델이 될 수 있다.
- 기존의 저널리즘을 대체할 도구는 없다.
- 폭로 사이트들이 기존의 미디어를 보완하거나 향상할 수 있다.
- 플랫폼 운영자들은 책임감 있게 운영해야 한다.

폭로적 사고방식의 기원을 찾아서


어떻습니까? 로젠바흐의 주제 발표 내용에서 도움을 좀 받으셨는지요? 생각비행은 '탐사보도'라는 화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블로그에서 탐사보도의 의미와 역사, 한국의 대표적인 탐사보도 프로그램 등을 소개해왔습니다.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탐사보도의 간략한 역사와 대표적인 언론인을 한 명 소개하려 합니다.

20세기 초에 언론 발행인들이 탐사보도를 시도한 일은 자연스럽게 얻은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이런 보도 방식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용어조차 정립하지 못한 시기였으니까요. 신문, 잡지 발행인들은 "편안한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고, 고통 받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려고 남용과 사기, 악용의 현장을 캐고 다닌다는 개념을 어떤 말로 부르든 간에 이로 말미암아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리라는 점"을 직감했습니다. 이런 언론 보도를 시행하려면 엄청난 취재비를 들여야 했습니다. 또한 비용이 많이 드는 소송에 휘말릴 가능성도 컸습니다. 무엇보다 원고를 완성하려면 숙련된 기술로 광범위한 편집 작업을 거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잡지와 신문사 발행인들은 곧 자신이 가진 권력과 책임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심층적인 언론 보도는 점점 더 복잡해지는 사회, 불공정한 사회, 부패한 사회를 대중에게 설명하는 수단이 되어 다양한 위험을 무릅쓰고 활짝 꽃 피우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저널리스트 겸 철학자인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은 새로운 종류의 저널리즘이 등장했다고 말했습니다.

“새로운 저널리즘은 공직 활동의 기준을 재계의 특정 영역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추문을 들춰내고, 누구나 사업에 참견할 수 있다고 여기는 탓에 사업가들은 할 말을 잃을 정도로 놀랐다.” _《아이다 미네르바 타벨》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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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다 미네르바 타벨

수많은 기업이 명멸한 극심한 격변기였던 1900년대에 여성 저널리스트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Ida Minerva Tarbell, 1857. 11. 5~1944. 1. 6)은 한 기업의 이면을 파헤치는 탐사보도를 시작했습니다. 여성에게 투표권조차 없던 시대에 여성 저널리스트 타벨과 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 7. 8~1937. 5. 23)의 대결은 현대판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습니다. 록펠러는 독점기업 스탠더드 오일을 이끈 재계의 거물로 미국의 석유산업을 대표하는 어마어마한 인물이었으니까요.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많은 트러스트가 산업화 이후의 산업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트러스트는 산업 너머의 산업이었으며 법 테두리 바깥에서 산업을 독식하는 괴물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타벨은 세계를 지배하는 최고의 경제 집단을 파헤치겠다는,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기획에 착수합니다. 이 기획특집은 20세기를 규정하는 중요한 투쟁 가운데 하나였고, 실제로 미국적 대서사시가 되었습니다.

독점 재벌을 무너뜨여성 저널리스트,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

여기서 잠깐 아이다 타벨을 모르시는 분을 위해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타벨은 펜실베이니아에서 석유 저장 용기 제조업을 시작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석유산업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겪은 인물입니다. 석유업계에 종사하는 아버지와 남동생의 영향으로 소규모 석유 생산업자들과 스탠더드 오일의 부당한 경쟁을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석유 개척기 시대에 새로운 희망을 품고 사업을 시작한 수많은 석유 생산업자, 정유업자, 운반업자는 모두 록펠러의 희생양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생산하는 석유의 95퍼센트를 독점한 스탠더드 오일은 타 기업을 흡수·통합하고 사세를 확장해 거대한 트러스트를 만든 재벌기업의 전형이었습니다. 록펠러가 세운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의 화려한 성장 이면에는 뇌물 수수와 협박, 담합, 위법 행위, 폭력적 행동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타벨은 펜실베이니아 주 미드빌에 있는 앨러게니 대학에서 공부한 재원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 여성이 대학 교육을 받는 일은 드물었으나, 교육의 중요성에 일찍 눈뜬 부모의 영향으로 타벨은 폭넓은 세계를 경험합니다. 파리로 유학을 떠난 타벨은 생계를 유지하려는 목적과 사실을 보도하는 언론의 역할에 대한 관심으로 본국(미국)에 있는 여러 언론 매체에 글을 기고합니다. 이때 《매클루어 매거진》이라는 잡지의 발행인이었던 새뮤얼 시드니 매클루어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인 아이다 타벨을 기자로 발탁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에이브러햄 링컨을 심층적으로 파헤치는 연재기사로 엄청난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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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클루어 매거진

정치권의 부패와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한 심층적인 시사가 쏟아지는 시기에 매클루어와 타벨은 역사 이래 최고의 갑부인 록펠러와 스탠더드 오일의 추문을 파헤치는 연재기사를 기획했습니다. 그 내용을 들은 타벨의 친척과 친구, 동료는 록펠러의 엄청난 재산과 그의 무자비한 성향을 염두에 두고 타벨의 안전을 걱정했습니다. 록펠러의 응징을 경험한 바 있는 노쇠한 아버지도 그녀를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타벨은 그런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용기 있는 행동을 한다며 칭찬하는 말을 듣고 당황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정당한 역사적 작업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한 일을 시작했다. 우리는 옹호자가 아닐뿐더러 비판자도 아니었다. 우리는 모든 독점기업 중에서 가장 완벽한 기업이 과연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탐구하려는 저널리스트였을 뿐이었다.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인가?” 

타벨이 조사를 시작할 무렵,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해 반트러스트 운동이 상승세를 탑니다. 1901년 9월 6일에 무정부주의자로 자처하는 암살자가 매킨리 대통령을 총으로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일로 시어도어 루스벨트 부통령이 대통령 직무를 이어받았습니다. 루스벨트는 저널리스트들과 개혁적 성향의 정치인들과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 연설에서 국가가 큰 기업의 재산 문제와 맞붙어 싸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자선사업을 많이 했다고 해도 그 재산을 얻기까지 저지른 불법 행위를 속죄할 수는 없다.”

루스벨트가 스탠더드 오일을 필두로 하는 트러스트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내자 트러스트를 반대하는 법정 소송이 급증했습니다. 사법부의 활동이 전개됨에 따라 빛을 본 자료가 바로 타벨의 탐사보도였습니다. 폭로기사에서 타벨은 특히 스탠더드 오일과 록펠러의 정직성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우리는 상업적 인간이다. 우리는 예술품을 자랑하지 못한다. 숙련된 기술이나 재배한 작물을 뽐낼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낸 부는 자랑한다. 이 때문에 사업의 성공을 신성하게 생각한다. 사실 성공을 위해서 사용한 방법이라면 무엇이든 점점 더 폭넓은 계층에서 정당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스탠더드 오일이 지금처럼 자본을 축적하기까지 필요했던 결정적인 요인이 있다. 사실을 감추려고 속임수를 쓰고, 궤변을 늘어놓고, 중상모략하는 온갖 방법이었다. 특히 법의 정신에 위배되는 비밀스러운 노력을 계속해서 얻은 특혜가 주요했다. …… 록펠러가 폭력과 속임수를 사용해서 목적을 달성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사람들은 '그건 사업일 뿐이잖아.' 하고 말하면서 록펠러를 옹호한다. 즉 그 말은 학대와 속임수, 특혜에 대한 적법한 변명이 되는 셈이다. …… 그런 사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자선 교리에 의지한다. 우리는 실수를 범하는 유한한 인간이므로 서로 다른 사람의 약점을 용납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인간의 약점 때문에 다른 사람의 어깨에 기대어 눈물을 흘리면서 주머니를 터는 기업가의 모습으로 귀결되고 만다.”

타벨은 갖은 시련과 압박에도 탐사보도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결국 스탠더스 오일에 대한 폭로와 이를 뒷받침하는 록펠러 인물 탐구를 통해서 미국의회와 주의회, 연방정부, 주정부 안에서 개혁적 활동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정부 기관 밖에서도 법원의 판결과 대중 운동이 전례 없이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매클루어 매거진》에 1902년부터 장장 19회에 걸쳐 〈스탠더드 오일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록펠러와 기업의 비리를 통렬하게 파헤친 폭로기사로 말미암아,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는 1911년 연방대법원으로부터 기업분할 명령을 받아 해체되기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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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벨의 폭로기사는 스탠더드 오일의 명성에 흠집을 냈다. 1909년 2월 3일, 루터 대니얼스 브래들리는 《시카고 데일리 뉴스》에 실은 만평에서 스탠더드 오일이 조용히 관련 회사를 포섭하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확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국 언론, 무엇을 배워야 하나

자, 여기서 100년이 지난 우리의 현실을 한번 돌아볼까요? 최근 자동차 부품제조업체인 유성기업 노조원의 파업에 공권력을 투입한 일로 온 사회가 시끄럽습니다. 정당하게 파업을 한 500여 명의 노동자를 30개 중대 2000여 명의 병력을 투입해 연행한 경찰의 행위를 보면 참 기막힙니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 노동자를 탄압하던 정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일부 보수 언론은 “1인당 연봉 7000만 원이 넘는 회사의 불법 파업을 국민이 납득하겠느냐”는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의 발언을 빌려 거짓 정보를 확대·재생산함으로써 유성기업 노동자를 공격했죠.

또 이런 일도 있습니다. GS그룹 계열사인 GS칼텍스가 영세 중소기업이 대부분인 바이오 디젤 사업에 진출한다고 하여 문어발식 확장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SK와 애경이 절반 가까이를 점유한 바이오 디젤 시장에 삼성 또한 진출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져 관계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재벌이 원가 절감을 이유로 MRO 계열사를 만들어 문구나 공구류 같은 소모품마저 손대기 시작하면서 그 분야에서 뿌리내리고 일하던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의 생계를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도된 바 있습니다. 100년 전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이 진실을 알리는 필봉으로 무너뜨린 거대 재벌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괴물로 존재하고 있으며, 날로 그 세력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노동자의 기본권을 무시하고 재벌과 대기업의 배만 불리는 말도 안 되는 경제 논리에 귀를 기울이는 국민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우리 국민의 의식수준도 높아졌고 ‘톨레랑스’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습니다. 모두 지난 100년간 오로지 ‘진실’을 위해 빛과 같이 살다간 언론인들이 토대를 닦은 탐사보도의 힘 때문입니다. 거대 트러스트의 실상을 취재해 스탠더드 오일을 무너뜨린 아이다 타벨의 삶과 기자정신은 부의 힘이 절대적이지 않으며, 부패의 고리를 파헤치는 탐사보도의 역할이 이 시대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역사는 그대로 반복됩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판치는 재벌의 문제를 돌아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아이다 타벨과 그의 기자정신을 깊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진실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일깨워주는 제2, 제3의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지난 11일, MBC 간판 탐사보도 프로그램인 《PD수첩》이 방송한 <검사와 스폰서> 후속편을 다룬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검사와 스폰서, 묻어버린 진실》이 화제의 책입니다. <검사와 스폰서>는 2010년 한국 PD연합회가 주관하는'올해의 PD상'을 수상할 정도로 사회적인 큰 이슈를 제공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하지만 <검사와 스폰서>를 제작한 최승호 PD는 급작스레 PD수첩에서 하차하게 되었고, 다른 PD들 또한 방송에서 모습을 감췄습니다. 사회적인 파문을 일으킨 당사자인 '검사'에 대한 수사는 기일을 넘겨 항소가 기각되는 어이없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책, 《검사와 스폰서, 묻어버린 진실》은 권력의 힘으로 묻혀버릴 뻔했던 검사들의 부정과 비리를 다시금 알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탐사보도'라는 장르를 개척한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을 함께 읽으시면 사회 정의와 미디어의 역할을 바로 보는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먼저 그동안 생각비행이 지속적으로 다뤄온 주제 '탐사보도' 관련 기사를 추천합니다.



검사와 스폰서 사건

2010년 4월 20일, 《PD수첩》은 부산에서 건설업에 종사했다는 한 사람이 57명의 전·현직 검사에게 금품, 향응, 성 상납 등의 스폰서 행위를 해왔다는 제보를 취재하여 방송했습니다. 이른바 '검사와 스폰서'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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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PD(1차방송)


《PD수첩》은 제보자를 비롯한 주변 인물을 집중취재하고 인터뷰하여 검사에 대한 스폰서 행위의 사실관계를 확인했고, 그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실명이 거론된 두 명의 검사는 제보자의 발언은 신빙성이 전혀 없다며 부인했지만, 제보자를 비롯한 주변 인물의 증거와 정황을 보면 이미 결론이 난 상태였습니다.

진실을 향한 《PD수첩의 노력, 그리고 탄압

《PD수첩》이 보도한 내용은 즉각적으로 사회적인 파문을 일으켰고, 수많은 시민이 검찰의 부정·부패에 치를 떨었습니다. 《PD수첩》 홈페이지에 5000건이 넘는 격려의 글이 쏟아졌으며, 사람들은 탐사보도와 언론의 존재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성공회대 김서중 교수는 <검사와 스폰서> 방송에 대해 "집권세력이 왜 MBC를 장악하려는지 잘 보여준 사례"라고 평가했습니다. 《PD수첩》 방영 이후 성낙인 서울대 법대 교수를 위원장으로 스폰서 검사 의혹 규명을 위한 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를 발족하기도 했습니다.

두 달이 지난 6월 8일. 《PD수첩》은 <검사와 스폰서> 2편을 방송했습니다. 이 또한 큰 반향이 일었습니다. 정치권에서도 검찰의 비리문제와 기소독점주의(검사가 법원에 특정 형사사건의 재판을 청구한다는 뜻의 공소를 제기할 권한은 검사만이 가진다고 하는 주의) 같은 부분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여, 6월 18일 여야가 검사들의 향응접대나 금품수수에 대한 수사를 진행할 특별검사(이하 특검)를 도입하기로 합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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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운 PD(2차 방송)


하지만 위원회와 특검의 도입으로 뭔가 해결되리라는 생각은 오산이었습니다. 위원회는 제보자가 주장하는 내용 가운데 향응접대 수백 회 중 10여 회만 인정했고, 100건이 넘는다는 성매매 중 단 한 건만 인정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특검은 위원회에서 인정한 단 한 건의 성매매조차 무혐의로 처리하는 어이없는 행태를 보였습니다. 위원회와 특검은 사건을 조작·은폐했고, 오히려 제보자와 증인들에 대해 계좌 추적을 비롯한 무차별적인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이에 《PD수첩》은 <검사와 스폰서> 문제의 후속편에 해당하는 <검사와 스폰서 - 묻어버린 진실>을 방송합니다. 위원회와 특검의 행태를 비판하고, 좀 더 정확한 사실을 보도하려는 '탐사보도'의 기본에 충실한 방송이었죠. 이 프로그램은 방송 이후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안타깝게도《PD수첩》이 와해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PD수첩》 제작진 11명 가운데 6명이 다른 부서로 발령났습니다. 6명 중에는 <검사와 스폰서> <4대강 6m의 비밀> 같은 프로그램을 제작한 최승호 PD와 홍상운 PD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최승호 PD는 <검사와 스폰서> 방송 이후 소망교회를 취재하는 도중이었다고 하는군요. 《PD수첩》에 대한 탄압은 폭압적이었고 신속했습니다.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이자 탐사보도를 탄압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탐사보도의 화신,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을 추억함

《PD수첩》 프로그램은 명맥을 유지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핵심 인력이 빠진 상태여서 여러모로 부족하다는 평이 자꾸 나오는 상황입니다. 정치적 탄압에 굴복하여 프로그램을 재편한 게 명백한데 MBC는 경쟁력 강화를 위해 스스로 개혁했다는 이상한 헛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바른 소리를 내다 뺨 맞고 온 아들을 엄마가 잘못했다고 쥐어박는 격이지요.
생각비행은 《PD수첩》을 보면서 언론의 사명을 다시금 돌아보았습니다. 진실을 향한 길은 멀고 험합니다. 올곧은 기자정신과 진실을 향한 열정이 없으면 끝까지 가지 못합니다. 언론이 탄압받고 진실의 행방이 묘연할 때마다 생각비행이 소개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이라는 미국의 대표적인 여성 저널리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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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보도 장르를 개척한 위대한 여성 저널리트의 삶과 기자정신을 다룬 책,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과 견검, 떡검, 섹검으로 대표되는 검사의 부정, 부패를 다룬 《검사와 스폰서, 묻어버린 진실》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은 《매클루어 매거진》에 미국의 석유재벌 존 D. 록펠러와 그가 세운 스탠더드 오일이라는 독점기업의 비리를 고발하는 탐사보도  기사를 연재했습니다. 타벨은 유년 시절을 석유 개척기에 보냈으며, 석유를 저장하는 용기를 납품하는 사업을 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소규모 석유 생산업자들과 독점 재벌인 스탠더드 오일의 부당한 경쟁을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석유 개척기에 록펠러는 '트러스트'라는 방식으로 경쟁자를 흡수했습니다. 굴복하지 않는 회사에는 각종 제재를 가해 망하게 하는 악독한 방식을 사용했죠. 결국 힘없는 중소 석유 생산업자들은 스탠더드 오일에 흡수되거나 사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써 록펠러는 미주리 주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90퍼센트 이상을 독점하고 어마어마한 부를 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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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더드 오일의 역사를 연재한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

하지만 록펠러와 스탠더드 오일의 폭압적이고 부당한 행태를 지켜본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은 수많은 자료를 조사하고, 여러 증인을 인터뷰하여 스탠더드 오일이 부당하게 사업을 확장해왔음을 밝혀내기 시작합니다. 이런 사실을 담은 기사를 《매클루어 매거진》에 연재합니다. 현대적 탐사보도의 시작이었죠. 1902년부터 19회에 걸쳐 연재한 기획기사, <스탠더드 오일의 역사> 로 말미암아 철옹성 같았던 록펠러와 스탠더드 오일은 1911년 미국 연방대법원으로부터 기업분할 명령을 받아 해체되기에 이릅니다.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과 탐사보도의 승리였던 셈이죠.

현재 최승호 PD를 비롯하여 《PD수첩》 관계자들이 <검사와 스폰서>를 방송한 이유로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부패 검사에 대한 수사도 위원회와 특검에 의해 은폐되고 조작되어 흐지부지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국민 여러분께서 진실을 알고자 하고 관심을 보여주신다면, 최승호 PD를 비롯한 《PD수첩》 관계자들도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과 같이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봅니다. 시민의 눈과 귀가 되어 부정, 부패를 조사하고 폭로하려는 올바른 프로그램마저 속박하는 이해타산에 발 빠른 이들이 득세하는 현실이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검사와 스폰서, 묻어버린 진실》의 출간은 그래서 더 값지다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탐사보도의 맥을 잇는 프로그램인 《PD수첩》 관계자와 <검사와 스폰서>의 진실을 증언한 정용재 씨를 다시 한 번 기억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생각비행이 펴낸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에 있는 문구로 글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진실은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을 출간한 지도 한 주가 지났습니다. 석유 재벌 록펠러의 거대기업 스텐더드 오일의 어두운 이면을 탐사보도라는 (당시) 새로운 보도 방식을 이용하여 파헤쳐 결국은 무너뜨린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 그녀의 삶과 기자정신을 담은 책,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에 대해 언론사들은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요?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에 대해 가장 먼저 언급한 곳은 연합뉴스였습니다. 연합뉴스<'공룡 석유회사' 무너뜨린 여기자> 라는 제목으로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을 소개하면서 기자정신과 탐사보도의 개척자라는 측면을 집중 조명했습니다.

좌측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바빌로프, 우측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

경향신문에선 좀 다른 방식으로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을 소개했습니다. [책과 삶] 다른 듯 닮은, 오롯이 외길을 걸은 ‘영원한 영웅’ 이란 제목으로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바빌로프라는 인물과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을 엮어서 소개했습니다. 언뜻 보기에 두 인물은 전혀 관련 없어 보이지만 한 사람은 '식량'이라는 주제로 새로운 방향을 개척했던 인물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저널리스트라는 사명으로 '탐사보도'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한 인물임을 이야기하면서 두 사람의 삶을 소개합니다.

그 밖에도 무등일보내일신문한겨레등  여러 언론사에서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의 출간 소식과 책 내용을 알려주셨습니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이라는 인물이 여러 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소개해주신 언론사 기자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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