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길에 편의점만큼이나 많이 보이는 파리바게뜨가 파견법 위반으로 소송 중이라는 사실, 잘 알고 계실 겁니다. 파리바게뜨의 제빵사들이 알고 보니 다른 대기업처럼 법을 교묘히 악용한 불법 파견이었죠. 이에 대해 고용노동부는 지난 9월 파리바게뜨가 협력업체 소속 제빵기사 5378명에 대해 사실상 직접 지휘, 명령을 해 파견법을 위반했다며 직접고용 하라는 처분을 내렸습니다. 아울러 파리바게뜨 제빵기사를 파견한 업체들도 고용노동부로부터 제빵사들의 체불임금 총 110억 1700만 원을 지급하라는 시정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파리바게뜨와 협력업체들은 이를 취소하고 시정지시 처분의 효력을 정지해달라며 가처분 신청을 냈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지난 22일 열린 심문기일에서 파리바게뜨와 파견 협력업체들은 고용노동부의 직접고용 명령을 이행하게 되면 회복할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한다고 주장했죠. 파리바게뜨는 각 지점 업주들을 볼모로 사업이 아예 망할 수도 있다고 겁박했고 현실적으로 당장 뭔가를 바꿀 수 없는 업주들은 차라리 자신들이 빵을 구우면 구웠지 제빵사들을 정직으로 고용할 수는 없다고 버텼습니다. 한편 정부는 행정 지도이기 때문에 강제성이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불법 파견인데도 고용노동부는 협력을 요청하는 시정지시만 내릴 수 있었던 겁니다.


출처 - 노컷뉴스


지난 28일 법원은 제빵기사를 직접 고용하라는 고용노동부의 시정지시를 정지해달라는 파리바게뜨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파리바게뜨와 파견 협력업체들이 낸 직접고용 시정지시 처분 집행정지 신청을 각하한 겁니다. 각하는 소송 요건의 흠결 등을 이유로 본안심리를 거절하는 처분입니다. 재판부는 시정지시는 상대방의 임의적 협력을 통해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행정지도이므로 파리바게뜨에게 불이익 조치가 예정된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또한 근로기준법이나 파견법 등 관계 법령 어디에도 범죄인지나 과태료 부과에 앞서 우선적으로 시정지시를 하도록 강제하는 조항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과태료는 파견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부과되는 것이지 시정지시를 따르지 않았다고 부과되는 것이 아니므로 사업사업주에게 스스로 위법사항을 시정할 기회를 부여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지시의 효력을 정지해달라는 신청 자체가 부적법하다는 겁니다. 시정지시는 시정하라는 협조 요청이지 과태료나 강제시행 등과는 별개의 것이라는 것이죠.


출처 - 뉴스1


그동안 파리바게뜨 제빵기사들의 선택지는 직고용과 합작사, 별도 고용(가맹점주) 중 하나였습니다. 파리바게뜨는 그중 가맹점주, 기존 협력업체와 추진하는 3자 합작사인 '해피파트너즈'를 밀어붙였습니다. 파리바게뜨는 이번 소송과 별도로 제빵사 5309명을 고용하기 위해 합작사의 연내 출범을 차질없이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지금까지 전체 제빵사 중 60퍼센트 이상으로부터 본사 직접고용을 포기하고 3자 합작법인을 통한 고용을 원한다는 동의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물론 이와는 다른 반응도 있습니다. 민주노총 화학섬유노조 소속 파리바게뜨 지회 조합원 700여 명은 직접고용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법원의 각하결정이 당연하다는 반응을 내놨습니다.

출처 - 뉴스1


법적으로 고용노동부의 손을 들어준 판결에 파리바게뜨는 즉시 항고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가 항고를 하지 않겠다며 입장을 번복했는데요, 시정명령 마감 시한까지 제빵기사 고용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사법처리와 과태료를 내야 합니다. 마감 시한은 12월 5일까지이며 과태료는 최대 530억 원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 제빵기사들과의 합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거나 혹은 여느 불법 파견 대기업들처럼 과태료를 내고 말겠다는 심산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일각에서는 제빵기사들의 선택에 따라 과태료 액수가 대폭 낮아질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합니다. 직접고용을 거부하는 제빵기사 수에 비례해 과태료 액수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파리바게뜨를 운영 중인 파리크라상의 지난해 별도 영업이익은 665억 원이며 당기순이익은 551억 원이어서 과태료를 내고 나면 남는 부분이 없다고 알려져 있으니 이 일을 과연 어떻게 풀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출처 - 경향신문

 

양질의 일자리와 고용안정성이 사회의 관심사로 대두한 요즘 우리 삶 가까이에 있는 빵집도 예외는 아닙니다. 임금보다 벌금이 싸서 벌금으로 뭉개고 넘어가는 기업들의 행태를 우리는 너무 많이 봐왔습니다. 이번엔 좀 다를 수 있을까요?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9-4 승강장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사망한 비정규직 청년의 죽음을 기억하는 1주기 추모식이 지난 지난 5월 28일 있었습니다. 하루 12시간 2교대라는 살인적인 근무에 쫓긴 스무 살이 채 안 된 하청노동자의 유품 가운데에는 컵라면 하나가 있었습니다. 밥 먹을 시간조차 없었던 그의 일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모습이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죠.

 

출처 - 오마이뉴스

 

사실 김군의 죽음은 예상치 못한 참사가 아니었습니다. 생각비행이 출간한 《하청사회》의 내용 일부를 인용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김군 사망사고 1년 전 강남역에서도 비슷한 사망사고가 있었습니다. 원칙적으로 스크린도어 점검은 2인 1조로 진행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김군처럼 한 사람이 담당하고 있었죠. 서울메트로의 스크린도어 점검 업무를 수주한 하청업체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극도로 인력을 축소한 상태로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2인 1조 점검이란 애초에 불가능했습니다.

 

 

구의역 지하철 사고와 관련한 기본 근로 조건을 보면, 49개 역사의 스크린도어를 관리하는 직원은 6명으로 1명당 5개 역을 담당하는 셈입니다. 하나의 역을 점검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대개 두세 시간인데 반해 하루 평균 고장 신고는 40여 건에 달했습니다. 여름철과 겨울처럼 온도가 급격히 변하는 계절에는 최대 하루 200여 건 가량의 신고가 접수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황을 정확히 파악해서 근본적인 대응책을 마련해야 했지만, 서울메트로는 유사한 안전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안전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며 비정규직 근로자 개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서울시와 경찰의 조사에 따르면, 구의역에서 김군 혼자 스크린도어 점검 작업을 하고 있을 당시 서울메트로에서는 김군이 작업 중이라는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청사회에서는 힘없는 을들에게 이러한 사고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갑이 비용 절감을 위해서 시행하는 외주화란 결국 ‘위험의 외주화’를 포함하거나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비정규직 청년 김군의 사망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 '위험의 외주화'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습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서울시에서 8월까지 서울교통공사 등 투자출연기관에서 근무 중인 무기계약직과 기간제 노동자들을 정규직화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전까지는 개선했다는 게 고작 고용기간만 연장하고 처우는 비정규직 그대로인 무기계약직이어서, 정규직도 아니고 비정규직도 아닌 눈 가리고 아웅하는 '중규직'이라는 비아냥도 있었죠.

출처 - 경향신문

 

'위험의 외주화'는 지하철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도처에는 위험을 하청업체로 떠넘기는 외주화가 만연해 있습니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사고 1주기 추모 행사가 있던 지난 5월 1일에는 경남 거제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타워크레인이 넘어지면서 노동자 6명이 숨지고 25명이 다치는 끔찍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사망한 작업자 6명은 모두 협력업체 소속 비정규직이었고, 중경상을 입은 25명 역시 대부분 협력업체 비정규직이었습니다. 정규직 근로자가 휴식하는 법정공휴일에 하청업체 근로자들은 쉬지 못하고 근무하다 참변을 당한 것이죠. 또한 5월 20일에는 인천공항에서 변전설비 정기점검을 하던 부산지하철공사 소속 간접고용 비정규직 근로자 3명이 감전사고로 크게 다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게 우리 사회 노동의 현주소가 드러나는 사건이었습니다. 재난의 현장에 본청의 정규직은 존재하질 않습니다.

 

출처 - JTBC


첨단산업에 속하는 스마트폰 제조 현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계적인 기업이 된 삼성전자, LG전자 스마트폰 부품을 만드는 하청업체에서 일하던 젊은이 6명이 업체의 관리 소홀과 보건 조치 미흡으로 생산공정에서 쓰는 독극물인 메탄올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시각을 잃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의 피해 노동자는 비정규직이 아니라 불법 파견이기까지 했습니다. 앞날이 창창한 20대가 시력을 잃은 것만이 아나라 심한 경우 뇌손상까지 입었다고 합니다.

 


출처 - JTBC

 

지난 6월 9일 열린 유엔인권이사회 총회에서는 유엔인권이사회 산하 실무그룹이 조사한 국내 대기업들의 인권 침해 현황을 담은 보고서가 제출되었습니다. 유엔 측은 메탄올 피해자 사례와 노조 탄압 등을 언급하며 원청 대기업들이 인권을 보호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고 지적했습니다.

 

6명의 노동자가 시력을 잃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 사이 본청의 정규직들은 과연 어떻게 지냈을까요? "이게 나라냐?" 싶을 정도로 별탈 없이 지냈습니다. 삼성중공업 타워크레인 사건의 경우 크레인 신호수로 일한 1명만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구속됐을 뿐 원청업체 관련자에 대한 영장은 모두 기각되었습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스마트폰 공장 메탄올 실명 사건의 1심 판결은 불과 일주일 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해자 중 아무도 감옥에 가지 않았습니다. 6명이 눈을 잃고 뇌 손상을 입었지만 불법 파견과 메탄올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실명의 책임이 있는 업체 사장까지 모두 집행유예와 수십 시간의 사회봉사 명령을 받은 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불법 파견사업주들도 집행유예에 끽해야 벌금 100만 원이 다였습니다.

 

6명이 앞을 보지 못하는 채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제대로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는 이상한 노동 현실이 계속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보다 돈이 먼저이기에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는 제도와 장치를 불합리한 규제라고 우기는 기업가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출처 - 뉴시스


지난 3일 문재인 대통령은 제50회 산업안전보건의 날 기념식 자리에서 영상메시지를 통해 제도는 물론 관행까지 바꿀 근본적 개선 방안을 찾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면서 산업 현장의 위험을 유발하는 원청과 발주자가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국민이 납득할 때까지 사고 원인을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밝혔는데요, 이는 생명과 안전에 대한 책임을 더 이상 외주화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원청과 발주자의 책임을 대통령이 직접 언급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긴 하나, 이런 내용은 다른 정권에서도 한 적이 있습니다. 말보다 실행이 중요하다는 점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산업재해를 당하는 노동자 중 하청업체 노동자 비율이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인 만큼,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가 '사람이 먼저다'라는 그들의 슬로건을 실행으로 증명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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