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남북이 DMZ 내 감시초소(GP) 11곳을 시범철수한 뒤 북한군 병사가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걸어서 귀순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각배를 타고 북한 주민 4명이 왔습니다. 목선을 타고 유유히 귀순해서 주민에게 핸드폰도 얻어 쓰고 주민이 신고해 귀순했다고 하죠. 그동안 군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헐레벌떡 대처했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군 발표에 따르면 목선에 탄 북한 주민 4명은 지난 9일 함경북도에서 출항해 12일 밤 9시쯤 북방한계선(NLL)을 넘었습니다. 길이 10m 정도의 작은 배라고 하죠. 이들은 지난 10일 NLL 북방에 있던 북측 어선군에 합류해 위장조업 활동을 하며 기회를 엿보다 12일 NLL을 넘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13일 오전 6시에 울릉도 동북방 55km 해상에서 정지했으며 오후 8시쯤 기상 악화로 표류했다고 합니다. 이후 다시 육지 방향으로 항해를 시작해 14일 오후 9시쯤 삼척항 4~5km 해상에서 대기하다가 15일 일출 이후 삼척항으로 출발해 오전 6시 20분쯤 방파제 인근 부두 끝부분에 배를 댑니다.


출처 - 뉴시스


상륙 직후 이들은 산책 나온 주민에게 발견됐습니다. 당시 목선에는 4명이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신고자가 방파제에 나와 있던 1명에게 어디서 왔냐고 묻자 그는 북한에서 왔다고 순순히 답했다고 하며, 이 과정에서 다른 1명은 서울에 사는 이모와 통화하고 싶다며 휴대전화를 빌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죠. 이들이 타고 온 목선은 오전 7시35분 해양경찰청 경비정에 의해 동해항으로 예인됐습니다. 삼척항 도착 사흘째인 지난 18일 목선을 타고 온 4명 중 2명은 귀순했고, 나머지 2명은 북한 송환 의사를 밝혀 북한으로 돌아갔습니다. 귀순한 1명은 가정불화 때문에, 나머지 1명은 한국 영화를 보다 북한 당국에 적발돼 처벌이 두려워 귀순했다고 하죠.


출처 - 강원도민일보


이번 목선 귀순의 문제는 57시간 동안 군이 까막눈이였다는 겁니다. 2012년 노크 귀순 때도 그랬죠. 그런데 이번 목선 귀순의 경우 상황이 좀 다릅니다. 목선이 삼척항으로 향할 당시 NLL 부근에 경비함 여러 척이 경계 작전 중이었고, P-3C 초계기와 해상 작전 헬기 등도 정상적으로 초계 활동을 펼치고 있었으니까요. 최근 늘어난 북한 어선의 조업 때문에 NLL 침범을 감시하기 위해 경계 작전 강화까지 한 상태였는데 이런 상태에서 목선 하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들여보냈다는 건 좀 어이없는 경계태세가 아닌가 합니다.


출처 - MBC


국방부의 발표처럼 규모가 작은 목선인 경우 첨단 무기인 초계기나 해상 헬기의 레이더가 잡기 힘든 건 사실일 수 있습니다. 이들의 주 타깃은 잠수함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해군력만큼은 막강하다는 일본 해상 자위대조차도 한일 배타적경제수역(EEZ)에서 조업하는 북한 어선을 적발하지 못하고 일본 주민이 신고하면 그제야 부랴부랴 출동하는 일이 왕왕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인 만큼 숙달된 군인의 현장 판단과 이를 컨트롤하는 지휘부의 경계태세가 중요한 문제 아닐까요?

 

출처 - 연합뉴스

 

이번 목선 귀순의 경우 해안감시 레이더 영상에 희미한 표적으로 잡혔지만 군은 이게 북한 어선인지 식별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첨단 장비를 갖췄더라도 판독과 대처 결정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인데, 그 부분에 있어선 분명 아쉬운 점과 대처가 필요한 대목입니다. 아울러 군과 정부의 이랬다저랬다 하는 발표와 대처도 문제였습니다. 군은 지난 17일 북한 주민들이 기관 고장으로 표류해왔다고 발표했지만, 이틀 사이에 기획 귀순이라고 정정했습니다. 통일부 또한 이들이 탄 배가 삼척항 인근 바다에서 조업 중이던 우리 측 어선에 의해 발견됐다고 밝혔지만 최초 발견자는 산책 중이던 주민으로 드러났습니다. 경계선이 뚫린 마당에 더욱 세심하고 정확한 조사와 발표가 필요했는데 그마저도 미흡했던 셈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결국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물론이고 이낙연 국무총리 나아가 국군통수권자인 문재인 대통령까지 북한 목선 귀순 사건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합동조사로 모든 진상을 밝혀내겠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으로도 국민들께 큰 심려를 드렸다며 깊은 사과를 드린다고 했으며,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삼척항 경계 실패와 관련해 책임자 문책과 처리 과정에서 허위보고나 은폐가 있었다면 철저히 조사해 법과 규정에 따라 엄정 조치하겠다면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0일 정경두 국방부 장관을 만나 북쪽에서 우리 쪽까지 오는 과정에서 제대로 포착하거나 경계하지 못한 부분, 그 후 제대로 보고하고 국민께 제대로 알리지 못한 부분에 대해 문제점이 없는지 철저히 점검해달라고 지시했습니다.

 

출처 - SBS


거룻배가 우리나라로 별 탈 없이 넘어올 수 있었다는 점, 승선자 중 2명은 귀순하고 2명은 그냥 북한으로 돌아가는 등 자칫 안보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는 점 등 이번 목선 귀순은 자칫 큰 문제로 비화할 여지가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군은 자꾸 벌어지는 이런 문제에 대해 냉정하고 철저하게 분석하여 대책을 세우고 관련 책임자를 엄중히 문책해야 할 것입니다. 작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의 의미를 군이 고민할 때입니다.

남북 간에 평화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북한 측이 전향적인 자세로 남북정상회담 4월 말 개최에 합의했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비핵화와 북미관계 정상화를 위해 미국과 대화할 의지가 있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특사단 파견으로 맺어진 남북 합의문은 상당히 긴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남과 북이 4월 말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제3차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하고 구체적 실무협의를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명박근혜 시절 동안 끊긴 정상간 핫 라인을 다시 설치해 제3차 남북정상회담 이전에 첫 통화를 하기로 했습니다. 무엇보다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북한의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명백히 밝혔습니다. 이를 위해 미국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용의를 표명했으며, 대화가 지속되는 동안 추가 핵실험 및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 등 전략 도발을 재개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습니다. 이와 함께 핵무기는 물론 재래식 무기를 남측을 향해 사용하지 않을 것을 확약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평창 올림픽의 화해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해 남측 태권도 시범단과 예술단의 평양 방문을 초청했습니다.


출처 – JTBC 유튜브


이러한 북한의 전향적인 입장 변화가 미국의 역대 최대 규모의 대북 제재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트럼프 정부는 이번 제재가 효과가 없다면 제2단계로 넘어가겠다고 했는데, 북한뿐 아니라 중국과 대만 소유 선박 28척 및 해운 무역업체 27곳이 포함된 바 있습니다.


출처 - BBC


그 때문이든 아니든 '4월 전쟁설'을 운운하던 보수 세력의 예측과 루머가 무색하게 북한은 가장 전향적인 자세로 문재인 정부와 합의했습니다. 오히려 김정은 쪽에서 먼저 남한이 한미합동군사훈련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이해한다며 이쪽의 걱정거리 하나를 불식시켰다고 하죠.

 

남북한의 정부의 세밀한 셈법을 전문가가 아닌 우리가 일일이 주판알 튕기듯이 파악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전쟁 위협이 크게 줄어든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물론 북한 측에서 돌발적인 행위를 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대개 미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등의 이유가 있었죠. 현재 북한이 상대해야 하는 이는 트럼프인 까닭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긴 합니다. 

 

출처 - 한겨레

 

현재 상황으로만 놓고 볼 때는 북한이 핵 보유국 지위나 기타 핵 관련 고집만 부리지 않는다면 트럼프가 북한의 제안을 받아주지 않을 명분이 없을 정도입니다.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의 선제 조건으로 비핵화를 강조한 바 있으니까요. 평창 올림픽 당시에도 미국은 이방카 트럼프 미 백악관 보좌관이 참석한 가운데 이와 같이 선언한 바 있습니다.


출처 – 한겨레


한편 7일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 5당 대표 오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4월 말로 예정된 남북 정상회담 합의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정상회담 장소를 판문점 평화의 집으로 북한이 먼저 제안한 것이라고 하죠. 이 자리에서 유승민 바른미래당 대표조차 어느 정도 성과를 인정한 이번 대표단 방북에 대해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대표는 6월 지방선거용 아니냐며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하지만 홍 대표야말로 6월 지방선거를 의식해 어떻게든 남북 화해 분위기에 흠집을 내려고 야단인 걸 국민들이 모르겠습니까? 

 

출처 - 경향신문

 

문재인 대통령은 정상회담 개최 합의에 따른 이면합의는 절대로 없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동시에 지나친 기대에도 선을 그었습니다. 정상회담은 국제 대북제재 속에 해야 하고 비핵화 로드맵에 대한 한미 간 합의를 따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출처 - 연합뉴스


남과 북이 서로 만족했다고 자평했을 정도로 예상 밖으로 진전된 합의에 국민적인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이만한 합의를 대한민국이 선도했으니 이제 미국이 나서서 진지한 자세로 대화에 임해주길 바랍니다. 성공적인 남북정상회담으로 한반도의 전쟁 위협을 종식할 수 있게 되길 빕니다.

 

무박 4일, 49시간의 마라톤협상을 끝으로 백척간두의 전쟁 위협 상황이 해소되었다는 뉴스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신 분이 많으실 줄 압니다. 목함지뢰 사건이 터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20일에는 포격이, 그 후에는 50척의 잠수함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실시간으로 듣다 보면 '안보'에 어지간히 무관심한 국민이라도 '이러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서부전선 포격 도발에 전역을 앞둔 몇몇 장병이 전역을 미루는가 하면, 페이스북에는 예비군복을 입고 참전의 의지를 불태우는 이들의 인증사진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SK 등 일부 기업은 전역을 미룬 장병들을 특채 형식으로 입사시킨다 하여 '어떤 의미'에선 훈훈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출처 - YTN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하려는 뜻은 고귀한 것이겠지요. 복잡한 국제관계에서 안보를 위한 '무력'이 필요한 순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일주일간 급격한 남북 관계 경색으로 사회 분위기는 너무나 위험했습니다. 핀다로스의 어록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겪어보지 못한 자에게 전쟁은 달콤한 것이다. – 핀다로스



하루 만에 240만 명 사상, 한반도 전쟁 나면 민족 공멸


보수 진영의 호전론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북한과의 전쟁을 너무 가볍게 입에 담습니다. "언제든 올 테면 와라! 모조리 물리쳐 주마!"라면서요. 만일 전쟁이 일어난다면 남북한 사이의 상식적인 전력차를 생각할 때, 십중팔구 한미 연합군이 승리하겠지요. 하지만 전쟁에 승리하는 게 관건이 아닙니다. 전쟁이 나면 사람이 죽습니다.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죽는다는 간명한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출처 - 허핑턴포스트

 

한반도 전쟁 시뮬레이션 해봤더니…하루만에 240만명 사상(시사in) :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7482

 

지난 2010년 천안함 사태로 남북 간 전쟁 위기감이 확산할 때 주간지 《시사in》이 한반도 전쟁 시뮬레이션 결과를 분석하여 기사를 낸 적이 있습니다. 1994년 1차 북한 핵위기 당시 클린턴 행정부가 만든 한반도 전쟁 시뮬레이션 결과도 우발적이든 계획적이든 남북한 사이에 전면전이 발생할 경우, 막강한 화력을 지닌 한미 연합군이 승리한다는 결과를 높은 확률로 점쳤습니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맛볼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는 허울뿐인 승리입니다.

 

전쟁을 선포하는 건 늙은이들이지만, 싸워야 하고 죽어야 하는 건 젊은이들이다. – 허버트 후버

 

시뮬레이션은 개전 24시간 안에 군인 20만 명을 포함해 수도권을 중심으로 150만 명이 사상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24일이 아니라 24시간입니다. 개전 1주 이내에 군인만 100만 명이 사망할 것이고, 같은 기간에 남한에서만 500만 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모든 것이 집약된 수도권을 중심으로 전 인구의 10퍼센트가 1주 만에 문자 그대로 사라진다는 얘깁니다. 

 

또한 1000억 달러의 경제적 손실, 3000억 달러의 피해 복구 비용이 든다는 예측이 나왔습니다. 이 땅에서 전쟁이 발생하는 순간 120조 원의 경제적 손실이 생기고, 360조 원의 복구 비용이 든다는 얘깁니다. 이러한 추정치도 20년 전인 1994년 기준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와 인구의 수도권 집중을 생각하면 인명 피해는 물론 경제적 피해 역시 과거의 추산을 훨씬 웃도는 천문학적인 단위로 뛰겠지요.

 

부자들이 전쟁을 일으키면, 죽는 건 가난한 이들이다. – 장 폴 사르트르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누군가는 이기겠지요. 하지만 그 승리를 남한이나 북한이 고스란히 챙길 수는 없습니다. 반사적 이익을 미국, 일본, 중국 등이 누리겠죠. 전쟁 규모에 따라 다르긴 하겠으나, 이 글을 쓴 저희나 보고 계신 여러분이 살아 있지 못할 가능성도 큽니다.

 

현대 전쟁에서 더 이상 아름답거나 조화로운 죽음은 없다.

당신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개처럼 죽을 것이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전쟁은 실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쟁을 대체 왜 그렇게 목청 높여 부르짖는 걸까요? 전쟁이란 순간적인 감정이나 분위기에 휩쓸려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는 순간,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존재가 사라지는 끔찍한 일이 일어납니다. 아무 잘못이 없다 하더라도요. 전쟁은 그런 것입니다.

 

스필버그 감독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를 통해 이렇게 말한 바 있지요.

 



극단으로 치닫는 안보 상업화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이 전역을 연기하며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나라를 수호하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들의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한다거나 의심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언론과 정부가 이들을 다루는 방식은 비정상적이며 극단적으로 위험했습니다.

 

출처 – 미디어오늘


육군은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전역을 연기한 육군 병사의 사례를 소개하며 박수를 보냈습니다. 《연합뉴스》는 이런 소식이 훈훈한 감동을 준다며 소개했습니다. YTN은 2030 세대의 군복 인증 물결이 지뢰 도발에 이어 포격 도발로 긴장이 높아진 가운데 우리 군에 힘을 보태고 있다며 미담으로 보도했습니다. 《조선일보》는 2030 세대의 안보 의식이 40대보다도 높다며 오랜만에 젊은이들을 칭찬하기 바빴습니다. 한편 《조선일보》는 2002년 제2연평해전 때는 북한의 유감 표명이 사과가 아니라며 분기탱천하더니 이번에는 유감이 곧 사과 표명이라며 박근혜 정부에 아부하기 바빴습니다. 북한이 유감 표명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라도 되는 것처럼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말입니다.

 


출처 - 조선일보



출처 - 아이엠피터


전문가들은 안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행태는 정부나 언론이 할 역할도 아니며, 사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이대훈 성공회대 교수는 바람직한 애국이나 국방의 의무인 것처럼 부추기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며, 정치적 목적이나 이념적 목적으로 청년층의 군사적 극단주의를 부추기는 사회는 건강하게 유지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정부와 언론은 긴장 국면에서 위기감을 조장하기보다 이건 우리가 해결할 문제이니 진정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이야기를 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정부는 전쟁 위협을 강조하고, 언론은 그 광풍에 편승해 클릭 장사를 했습니다. 혼란에 빠진 국민을 뒤로한 채 정부는 자기 입맛에 맞춰 이번 위기를 통해 얻을 것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시민의 질타를 받던 기업들은 애국심에 호소하며 은근슬쩍 자기 치부를 가리기에 바빴습니다. 이번에 전역을 연기한 장병들을 특채하겠다고 밝힌 SK의 최태원 회장은 광복절 특사로 논란 속에 사면된 바 있지요. 이러다 '5포 세대, 7포 세대' 하며 현실에 짓눌린 젊은이들이 앞으로 '참전 스펙'마저 쌓아야 하는 건 아닐지 잘 모르겠군요.

 

미국에서 심각한 안보 위기 상황으로 비화했던 9.11 테러 당시 많은 시민이 테러리스트에 대한 복수를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뉴욕 시장이 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일상으로 돌아가십시오." 세월호 사고의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많은 시민에게 우리의 위정자들도 똑같이 얘기했습니다. 일상으로 복귀하라고 말입니다. 같은 말이지만 왜 이렇게 담긴 의미가 다른 걸까요?

 

안보 상업화가 점점 더 심해지는 대한민국의 상황을 국민이 두 눈을 부릅뜨고 주시해야 합니다. 국민의 생명마저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는 미치광이들이 우리에게 각자도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얘기해줍시다. "바보야, 문제는 너희야!"


"테러라고 하지 말자. 민주화 운동이다." 이 말이 끔찍한 의미로 쓰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한 2014년이었습니다. 신은미 토크 콘서트 테러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한 고등학생의 비행(非行)을 마치 도시락 폭탄을 일제의 심장을 향해 던진 윤봉길 의사라도 되는 양 추켜올리며 일베와 극우 인사들이 내뱉었던 저 말은, 2014년에 군사독재의 망령과 공안정치의 부활도 모자라 마침내 백색테러까지 부활했음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았습니다. 

 

출처 - 주권방송



백색테러의 기원,

프랑스대혁명부터 제주 4.3사건까지


백색테러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암살, 파괴 등을 수단으로 하는 테러의 일종으로, 그 행위를 저지른 주체가 극우나 우파인 경우를 지칭합니다. 프랑스대혁명 중 혁명파에 가한 왕당파의 보복에서 이 말이 유래했는데요, 프랑스 왕가의 상징이 흰 백합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백색테러는 위정자가 체제에 저항하는 이들에게 가하는 탄압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죠. 현대에는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에 대한 탄압을 지칭하는 용어로도 사용합니다. 미국의 악명 높은 인종차별 단체 KKK단이 현존하는 대표적 백색테러단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출처 - 유튜브


어떻게 보면 백색테러의 부활은 감히 이 땅에 서북청년단이란 백색테러단체를 재건하겠다는 소리가 공공연하게 나오면서부터 예견된 일일지도 모릅니다. 해방 직후 결성된 서북청년단은 경찰을 도와 좌익 색출 업무를 하고 좌익 세력에 대한 테러를 주도했습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백색테러 중 하나인 제주 4.3사건 당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토벌대의 상당수가 서북청년단이었고,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도 서북청년단 정회원으로 활동한 바 있습니다. 그들은 공공연한 인터뷰에서 이승만을 찬양하며 한국에 우파는 있지만 극우가 없다며, 네오나치 같은 극우가 한국에도 필요하다는 헛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토크 콘서트에서 자행된 백색테러


이런 시류 속에서 백색테러가 부활했습니다. 2014년 12월 10일, 전북 익산에서 열린 신은미 황선 토크 콘서트 현장에 사제 폭탄을 투척한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놀랍게도 테러범은 19세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출처 - 미디어오늘


테러의 시작은 시쳇말로 '중2병' 걸린 한 소년의 인터넷 허세인 줄 알았습니다. 자주 가던 사이트에서 한 학생은 자신이 구한 인화물질들의 사진을 찍어 올리며 "신은미 폭사당했다고 들리면 난줄알아라"라고 썼습니다. 사람들은 관심병이 도진 이가 왔구나 싶어 폭발물이 그렇게 쉽게 만들어질 것 같으냐며 무시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신은미 황선 토크 콘서트에서 폭발물 테러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오군(18)은 강연 도중 뜬금없이 말을 끊으며 "북한이 지상낙원이라고 하셨죠?"라고 묻습니다. 그런 소릴 한 적이 없는 강연자들은 부정했지만, 오군은 끈질기게 강연을 방해하여 사람들에게 제지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오군은 준비해온 냄비에 불을 붙여 던졌고, 폭발로 토크 콘서트장은 아수라장으로 돌변했습니다. 맨 앞에 있던 분이 순간적으로 냄비를 손으로 쳐 바닥으로 떨어뜨려 인명 피해가 나지는 않았으나 폭발물을 사람이 정통으로 맞았다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출처 - 유튜브


오군은 현장에서 더 난동을 피우다 체포되었는데 당시 황산 1리터를 소지하고 있었다고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폭발물 테러로 화상을 입은 사람들이 나왔고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오군은 경찰서에서도 자신의 행위를 자랑스러워하며 수갑 찬 사진을 인증샷으로 인터넷에 올리기까지 했습니다. 명백한 백색테러라는 얘기지요.

 

한국 사회의 극단적인 양극화와 역행적인 정치 상황과 맞물려 축적된 상호 간의 증오가 결국 이런 형태로 터지고 만 것입니다. 적어도 민주화 이후에는 사라졌던 백색테러가 부활했다는 것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죽여도 괜찮다고 하는 사회 해체적인 선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014년 세월호 사건이 사회 안전에 대한 근본을, 농협 인출 사태가 경제 안전에 대한 근본을 뒤흔들었다면, 이번 백색테러는 자신이 믿고 지지하는 의견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근본을 뒤흔든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대한민국은 극단의 분기점에 서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박근혜 정부의 테러 대응방식

―테러범은 열사로 추앙받고, 피해자는 종북으로 검찰 소환당해


우리 사회에 설사 적색테러가 일어났다 한들 다르지 않습니다. 백색이든 적색이든,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해하려는 행각은 대한민국에서 단죄된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테러 없는 사회, 최소한의 사회 안정을 위한 당연한 조치겠지요.

출처 - 뉴시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상상을 초월하는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행보를 보였습니다. 사회 안정이라는 국가의 근본을 생각해야 할 일국의 대통령이 진영 논리를 따라 가해자를 옹호하는 입장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12월 15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테러 사건을 거론하면서 콘서트가 종북 성향이라는 말만 했을 뿐 테러 행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넘겼습니다. 

 

실정법을 위반해 사회 전체에 위기를 야기할 수 있는 가해자의 범법 행위에는 눈을 감은 채 억울한 피해자를 종북몰이했으니 개인으로서는 물론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자각이 전혀 없다고 봐야겠지요. 대통령의 한마디 때문에 테러의 피해자인 신은미, 황선은 오히려 테러를 당해도 마땅한 '종북주의자'로 낙인 찍혔고, 경찰과 검찰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피해자 두 명을 소환하기에 이릅니다. 출국금지까지 했으니 참 가관입니다.




출처 - 시사in


폭발물 테러를 저지른 오군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일베와 우익 사이에서 열사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회가 미쳐도 단단히 미쳐 돌아갑니다.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은 "종북주의자에게는 관대하고 이를 보다 못한 청년에 대해서는 법을 집행하는 게 정상인가"라는 망언을 했습니다. 인터넷 《독립신문》의 신혜식 대표는 테러범인 학생을 위한 모금을 시작했고 대한민국어버이연합, 엄마부대봉사단 등 때 되면 나오는 보수 단체들도 선처를 호소하는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오, 애국열사 장하다. 19살 어린 의사가 빨갱이를 척결했다. 헌재 재판관보다도 더 훌륭하다." 이런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사건 당시가 2014년인지 1947년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새누리당 내에서 백색테러를 옹호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차 없이 다 제명해야 한다." “청와대에선 정윤회 건 터져 나오고 우파들은 황산 테러 옹호하고, 일부 우파님들 제발 정신 차리세요. 옹호할 걸 옹호하세요. 어떻게 폭력과 테러를 옹호합니까"라고 비판한 하태경 의원 같은 사람이 있긴 했지만요.

출처 - 헤럴드경제


종편과 언론도 미쳐 돌아가긴 마찬가지였습니다. TV조선 같은 종편은 인터넷 《독립신문》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을 보였고, 《헤럴드경제》는 폭탄 테러범에게 '용감한'이란 수식어를 붙였다가 비난이 빗발치자 부랴부랴 기사 제목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진짜 속내야 어쨌든 최소한 테러는 안 된다 폭력은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언론이 보여야 할 마땅한 모습일 텐데, 퇴행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그런 기대조차 사치인가 봅니다.



사회 안전을 위협하는 테러는 단죄된다는 엄격함을 보여야


지난 2006년 박근혜 대통령이 지원 유세 도중 얼굴에 칼을 맞은 적이 있었습니다. 살짝 베였다고는 하나 이 역시 명백한 테러 행위입니다. 당시 '커터 칼 테러'를 저지른 할머니는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입니다. 박근혜 정부는 계획대로 되었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줬을 폭발물 테러범에게 과연 어떤 처벌을 내릴까요?

출처 - 위키피디아


위 사진은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 현장을 포착한 사진입니다. 퓰리처상을 받기도 해 유명해졌지요. 이네지로 암살 사건은 일본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대표적인 백색테러 중 하나입니다. 1960년 일본 좌익 정치인인 아사누마 이네지로가 TV 연설회 도중 극우 소년인 야마구치 오토야의 칼에 찔려 살해당해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테러범의 나이는 불과 17세였습니다. 야마구치 오토야는 소년원에서 천황폐하 만세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후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 보수로서는 불리한 상황이었는데도 예상을 깨고 다음 선거에서 우익인 자민당은 과반을 넘겨 압승합니다. 일본의 후진적 정치와 자민당의 장기 집권이 이어지고 있지요. 우리나라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왜 이리도 50년 전 일본과 겹쳐 보일까요. 2015년 새해가 밝았지만, 대한민국의 앞날이 참 암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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