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주도한 혐의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항소심에서 원심보다 무거운 판결을 받고 법정 구속되었습니다. 김기춘에게는 원심의 징역 3년보다 무거운 징역 4년을,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던 조윤선에게는 원심을 깨고 징역 2년을 선고했습니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 문화계에 지원 혹은 지원 배제를 좌지우지했던 조윤선은 블랙리스트 존재를 모른다던 증언 또한 위증죄로 다스려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박근혜의 인식에 따라 청와대에서 좌파 배제 국정 기조가 형성됐고 이 지원 배제 관련 보고를 받고 승인했다며 박근혜의 블랙리스트 공모 관계까지 인정되었습니다. 이른바 청와대 캐비닛 문건이 핵심증거로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블랙리스트에 관련된 모든 행위는 정책이 아닌 위법행위라고 적시한 것이며, 이는 박근혜의 1심 선고에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됩니다.


출처 - 연합뉴스


하지만 또 다른 블랙리스트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습니다. 사법부 블랙리스트 조사위가 발표한 내용을 보고 일선 판사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습니다. 법원행정처가 특정 판사의 성향을 파악하고 핵심그룹, 주변그룹 이렇게 구분해 개입한 정황이 여러 차례 확인되었으며 블랙리스트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았을 뿐 특정 판사와 그룹의 차단, 견제, 고립을 논의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문건에는 이름, 직책, 연수원 기수, 생년월일, 출신학교, 경력 등은 물론 우리법, 노동법, 젠더법, 인권법에 대한 특성, 보수 진보 성향, 우리법연구회 회장 역임, 여성친화적 가치관 등 꼼꼼하게도 사찰해 리스트를 만들어놓았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관리에 방해가 되는 판사 익명 카페 자진 폐쇄 유도 방안 등도 검토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리스트를 통해 대법원은 이른바 강성으로 불리는 진보 법관들을 배제하고 보수 법관들을 요직에 추천한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조선일보》 등 수구 언론은 블랙리스트란 단어가 쓰이지 않았으니 사법부 블랙리스트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머리기사를 올렸지만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어린아이조차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일선 판사들은 여기까지 드러난 이상 특검을 통해 진상조사를 해야 하며 법원행정처에 대한 강도 높은 개혁으로 행정처가 법관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반헌법적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습니다.


출처 – JTBC 유튜브


사법부 블랙리스트 조사에서도 청와대 캐비닛 문건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국정원 댓글 사건 항소심 선고 전후로 대법원이 청와대와 교감한 정황이 새롭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사법부 블랙리스트에는 국정원 댓글 사건 항소심 판결 전후로 법원행정처가 청와대와 연락해 의견을 나누고 정치권, 언론, 법원 내외부 동향을 파악하고 대응 방안을 검토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선고 전 항소기각을 기대한다는 청와대의 요구에 법원행정처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어서 우회적, 간접적 방법으로 재판부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합니다.

 

출처 - 경향신문

 

이 요구를 한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 바로 우병우였습니다. 그는 전원합의체라는 특정한 선고 방식까지 요구했는데 이 요구가 받아들여져 그해 4월 국정원 댓글 사건은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회부됐습니다. 박근혜, 우병우, 국정원, 대법원 등 민주주의 국가의 근간인 삼권분립을 그들이 얼마나 유린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출처 - 한겨레


이에 따라 이미 사퇴하긴 했지만 이를 대법원 안에서 총괄 지휘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여론이 거셉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판에 참여해 청와대와 거래를 한 대법원장은 물론 대법관들도 모두 책임을 져야 한다며 인사조처를 넘어 형사책임까지 주문하고 있습니다. 사법부 블랙리스트 문건 작성만으로도 직권남용죄가 성립할 것으로 보인다며, 재판을 두고 대법원이 청와대와 거래를 했다는 건 업무 방해, 직권 남용 위반 소지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법은 사회 최후의 양심의 보루입니다. 법관이 양심에 따라 공정히 판결할 때라야 법이 그 사회에서 권위를 가질 수 있죠. 문체부 블랙리스트와 마찬가지로 사법부 블랙리스트도 철저한 조사가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매년 4월 25일은 법의 날입니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법 앞에 평등'이라는 말이 무색한 역사를 살아온 우리는 법에 대해 할 말이 많습니다. 권력의 횡보를 막고 폭력의 지배를 배제하고 인권을 옹호하며 공공복지를 증진하려면 무엇보다 법적 질서가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지난 3월 10일 대한민국 국민의 이름으로 국정농단으로 한국 사회를 문란케 한 현직 대통령을 파면한 역사적 결단은 의미가 큽니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주문으로 3개월여 탄핵심판 절차가 마무리됐습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던 대통령이 법적 절차에 의해 구속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법치주의의 원칙을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싶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최순실로 대표되는 비선과 현직 지도부의 결탁으로 대한민국 사회를 어지럽히던 일부 세력이 법의 철퇴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습니다. 국정농단 이후 이어지는 사건들을 보면 준법정신, 법의 존엄성 이전에 법에 미안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일투성이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 노컷뉴스


우선 국정농단의 핵심이자 이 사태로 가장 오랜 기간 수사를 받은 우병우 전 민정수석의 구속영장 기각이 있었습니다. 박영수 특검 당시 영장이 기각되어 국정농단의 마지막 보스는 박근혜도 최순실도 아닌 우병우가 아닌가 하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죠. 보강 수사로 수많은 자료를 모아 영장을 재청구했을 땐 100퍼센트 구속영장이 발부될 것으로 검찰이 호언장담했습니다. 물론 국민도 그렇게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4월 12일 서울중앙지법 권순호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구속영장을 기각했습니다. 혐의와 관련해 다툼의 여지가 있다는 겁니다.


출처 - 노컷뉴스


우병우가 혐의를 잘 감춰서 그러한가 했는데, 밝혀진 이야기를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정황이 보입니다. 지난 13일 사정 당국에 따르면 검찰이 청구한 우병우 구속영장의 분량은 20쪽 정도였습니다. 검찰이 특수본을 세워 우병우의 범죄를 밝히겠다고 호언장담했으나 정작 특검 때보다 범죄 사실 분량을 3분의 1로 줄여 영장 청구를 했기에 검찰의 제 식구 봐주기라는 질타가 쏟아졌죠.

 

출처 - 경향신문

 

검찰이 우병우를 손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 검찰총장을 비롯해 국정농단 당시 수천 번 전화 통화를 했던 검찰 수뇌부가 물귀신처럼 함께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일 겁니다. 박영수 특검이 우병우 일가가 가족회사의 자금을 횡령한 사실을 확인하고 자료를 넘겼으나 검찰이 이를 뭉갠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법의 칼날이 누구 앞에선 무뎌지고 누구 앞에선 날카로워진다면 '법 앞에 평등'이라는 헌법 정신이 훼손됨은 명명백백합니다.


출처 - 뉴스1


법의 정신을 짓밟는 것은 검찰만이 아닙니다.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파문도 유야무야 지나가는 중이죠. 양승태 대법원장을 비롯한 법원 수뇌부가 법관들의 사법개혁을 논의하는 국제인권법연구회를 탄압했고 이른바 진보 성향의 법관들을 대상으로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는 의혹이 제기됐죠. 문체부의 문화계 인사를 대상으로 한 블랙리스트가 사실로 드러나 사회적 충격이 컸는데, 공명정대한 법 집행을 해야 할 법원 안에서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사회적 파장이 컸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사건의 배후로 의심받는 양승태 대법원장이 직접 임명한 진상조사위원회는 꼬리 자르기를 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국제인권법연구회에 대한 부당한 압력은 일부 인정했지만 법원 블랙리스트와 관련해서는 조사 자체가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내놨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제기한 판사들이 블랙리스트 파일이 든 것으로 추정되는 법원행정처 컴퓨터 조사를 요구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이후 이 컴퓨터의 파일이 대거 삭제됐다는 진술까지 나왔습니다.


법의 날을 맞이해 묻고 싶습니다. 법과 관련된 종사자들이 과연 대한민국 국민에게 법을 계몽할 자격이 있습니까? 검찰과 법원의 부끄러운 자화상만 드러나는 법의 날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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