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 민주주의 혁명의 교과적인 표본이라고 할 '촛불혁명'으로 헌정 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 탄핵을 끌어낸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로 인해 시작된 '국정농단 재판'이 지리하게 이어지다 2년 반 만에 대법원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대법원은 박근혜와, 최순실, 이재용의 2심 재판을 모두 다시 하라고 파기환송 결정을 내렸습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29일 박근혜에게 징역 25년과 벌금 200억 원, 최순실에게 징역 20년 및 벌금 200억 원, 이재용에게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한 2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대법원은 박근혜의 1, 2심 재판부가 다른 범죄 혐의와 구별해 따로 선고해야 하는 뇌물 혐의를 분리하지 않아 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공직선거법상 대통령 등 공직자는 특정범죄 가중처벌에 관한 법률상 뇌물 혐의에 대해 다른 범죄 혐의와 분리해 선고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공직자의 뇌물죄는 선거권 및 피선거권 제한과 관련되기 때문에 반드시 분리해 선고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죠.


출처 - 연합뉴스


이렇게 될 경우 박근혜 전 대통령은 2심 판결인 징역 25년보다 형량이 더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2심처럼 여러 범죄 사실이 경합할 경우 가장 무거운 범죄의 형량에서 2분의 1만큼만 가중해 총 형량을 정하게 되는데, 이번 대법원의 판결처럼 형을 각각 분리 선고할 경우 각각의 형량을 더해 최종 형량을 산정하기 때문입니다.


출처 - 뉴시스


박 전 대통령은 2심에서도 상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파기환송심에 대해서도 상고를 하지 않을 경우 형이 그대로 확정돼 올해 안에 최종 결론이 날지도 모릅니다. 박근혜의 기존 총 형량은 징역 32년이었죠.

 

 

출처 - 뉴시스

 

최순실의 경우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박근혜와 공모 관계가 인정된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박근혜, 최순실 두 사람이 국정농단의 공범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최순실의 경우 미르·K스포츠재단으로 돈을 내라고 기업에 강요한 혐의는 무죄라는 취지로 사건을 고법에 돌려보냈습니다. 하지만 다른 범죄 혐의가 워낙 많아 이 부분이 최종 형량에 끼칠 영향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최순실의 강요죄가 무죄로 결론 나면서 대기업들이 그간 주장해온 '강요의 피해자'라는 논리가 앞으로의 재판에는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고로 이재용, 신동빈, 최태원 등 국정농단과 연관된 대기업 총수들은 추후 재판에서 불리해졌다고 할 수 있겠네요.


출처 - 연합뉴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은 삼성그룹 부회장인 이재용입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번 판결에서 이재용에 대한 경영권 승계작업이 존재했고 이재용이 박근혜에게 승계와 관련해 부정한 청탁을 했다고 판단했습니다. 2심에서 뇌물로 인정되지 않았던 최순실에게 준 말 3필도 이번에는 뇌물로 인정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이로 인해 이재용의 뇌물 액수는 36억에서 88억으로 50여 억 원이 늘어났습니다. 게다가 이 돈은 삼성 법인자금이라 횡령에 해당하기도 합니다. 횡령 액수가 50억이 넘으면 최소 징역 5년에 무기징역이니 2심처럼 집행유예로 빠져나가기는 거의 불가능해졌습니다. 또한 앞서 얘기한 대로 최순실의 강요죄에 대한 판결로 그간 되뇌던 '피해자 논리'마저 깨졌으니 파기환송심에서 이재용은 재구속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현재로는 1심과 마찬가지로 징역 5년이 나올 것으로 예측됩니다.


출처 - 경향신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시민단체들은 사법정의와 국민상식에 부합하는 판결이었다며 환영의 뜻을 나타냈습니다. 수년의 시간을 넘어 이제야 국정농단 재판의 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없진 않지만, 국정농단의 주범들에게 법의 단죄가 돌아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입니다. 이제는 국정농단 세력이 망가뜨린 시스템을 복구하고 그들이 치부한 돈을 환수할 방법을 마련해야 할 때입니다. 그 돈은 애초 국민에게서 나왔을 뿐만 아니라 국민을 위해 쓰였어야 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주도한 혐의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항소심에서 원심보다 무거운 판결을 받고 법정 구속되었습니다. 김기춘에게는 원심의 징역 3년보다 무거운 징역 4년을,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던 조윤선에게는 원심을 깨고 징역 2년을 선고했습니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 문화계에 지원 혹은 지원 배제를 좌지우지했던 조윤선은 블랙리스트 존재를 모른다던 증언 또한 위증죄로 다스려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박근혜의 인식에 따라 청와대에서 좌파 배제 국정 기조가 형성됐고 이 지원 배제 관련 보고를 받고 승인했다며 박근혜의 블랙리스트 공모 관계까지 인정되었습니다. 이른바 청와대 캐비닛 문건이 핵심증거로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블랙리스트에 관련된 모든 행위는 정책이 아닌 위법행위라고 적시한 것이며, 이는 박근혜의 1심 선고에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됩니다.


출처 - 연합뉴스


하지만 또 다른 블랙리스트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습니다. 사법부 블랙리스트 조사위가 발표한 내용을 보고 일선 판사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습니다. 법원행정처가 특정 판사의 성향을 파악하고 핵심그룹, 주변그룹 이렇게 구분해 개입한 정황이 여러 차례 확인되었으며 블랙리스트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았을 뿐 특정 판사와 그룹의 차단, 견제, 고립을 논의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문건에는 이름, 직책, 연수원 기수, 생년월일, 출신학교, 경력 등은 물론 우리법, 노동법, 젠더법, 인권법에 대한 특성, 보수 진보 성향, 우리법연구회 회장 역임, 여성친화적 가치관 등 꼼꼼하게도 사찰해 리스트를 만들어놓았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관리에 방해가 되는 판사 익명 카페 자진 폐쇄 유도 방안 등도 검토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리스트를 통해 대법원은 이른바 강성으로 불리는 진보 법관들을 배제하고 보수 법관들을 요직에 추천한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조선일보》 등 수구 언론은 블랙리스트란 단어가 쓰이지 않았으니 사법부 블랙리스트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머리기사를 올렸지만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어린아이조차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일선 판사들은 여기까지 드러난 이상 특검을 통해 진상조사를 해야 하며 법원행정처에 대한 강도 높은 개혁으로 행정처가 법관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반헌법적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습니다.


출처 – JTBC 유튜브


사법부 블랙리스트 조사에서도 청와대 캐비닛 문건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국정원 댓글 사건 항소심 선고 전후로 대법원이 청와대와 교감한 정황이 새롭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사법부 블랙리스트에는 국정원 댓글 사건 항소심 판결 전후로 법원행정처가 청와대와 연락해 의견을 나누고 정치권, 언론, 법원 내외부 동향을 파악하고 대응 방안을 검토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선고 전 항소기각을 기대한다는 청와대의 요구에 법원행정처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어서 우회적, 간접적 방법으로 재판부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합니다.

 

출처 - 경향신문

 

이 요구를 한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 바로 우병우였습니다. 그는 전원합의체라는 특정한 선고 방식까지 요구했는데 이 요구가 받아들여져 그해 4월 국정원 댓글 사건은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회부됐습니다. 박근혜, 우병우, 국정원, 대법원 등 민주주의 국가의 근간인 삼권분립을 그들이 얼마나 유린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출처 - 한겨레


이에 따라 이미 사퇴하긴 했지만 이를 대법원 안에서 총괄 지휘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여론이 거셉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판에 참여해 청와대와 거래를 한 대법원장은 물론 대법관들도 모두 책임을 져야 한다며 인사조처를 넘어 형사책임까지 주문하고 있습니다. 사법부 블랙리스트 문건 작성만으로도 직권남용죄가 성립할 것으로 보인다며, 재판을 두고 대법원이 청와대와 거래를 했다는 건 업무 방해, 직권 남용 위반 소지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법은 사회 최후의 양심의 보루입니다. 법관이 양심에 따라 공정히 판결할 때라야 법이 그 사회에서 권위를 가질 수 있죠. 문체부 블랙리스트와 마찬가지로 사법부 블랙리스트도 철저한 조사가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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