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고(故) 박원순 시장의 실종 보도와 연이은 사망 보도를 보면서 마치 꿈을 꾸는 듯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고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호감을 품게 된 것은 그가 작년에 추진했던 ‘On Seoul Safe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였다. 생각비행 출판사에서 출간한 《누구나 흔들리며 페미니스트가 된다》라는 책이 계기가 되어 나는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고 박원순 시장이 작년에 처음으로 추진했던 그 프로젝트에서 나는 10여 명의 크리에이터 중 한 명으로 카드뉴스를 제작했고, 프로젝트 출범식에도 참석했다.


출범식에서 만난 그는, 이 프로젝트에 상당히 열의가 있어 보였다. 당시 이 프로젝트는 고 박원순 시장이 전국 지자체 중에서 최초로, 그리고 서울에서도 제1회로 추진하는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그의 각별한 관심과 적극적인 의지 없이 추진되기 어려웠을 것은 자명했다.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서울시에서는 초등학교에서부터 성희롱 예방교육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서울 시내 지하철역 어디에서나 디지털 성범죄 예방 공익광고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고 박원순 시장이 그간 여성 인권을 위해 했던 노력은 손에 꼽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다. 과거 변호사 시절 그는 국내 최초로 성희롱 재판 변호를 맡아 승소했으며,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에도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서울시장 재임 시절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출산율’이 아닌 ‘출생률’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남다른 성인지감수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성인지 예산을 도입했고, 성평등 관련 조례를 제정했으며, 여성안심귀가서비스, 여성안심택배함 설치 등 여성 안전을 위한 제도들도 운용했다.


그는 대권 물망에 오르내리는 정치인 중 여성 인권에 관한 한 그 누구보다 앞서갔다. 그래서 내심 그가 다음 대통령이 되길 바랐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신뢰하고 지지하던 정치인이었던 만큼 슬픔과 배신감이 뒤얽힌 복잡한 심경으로 요 며칠을 지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기대를 걸던 많은 사람들의 슬픔을 짐작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어쩌면,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람 중에는 자신의 슬픔과 배신감을 감당하지 못해 화살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지자가 겪는 슬픔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것을 이유로 피해자를 비난해서는 안 될 일이다.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박원순을 무너뜨린 사람은 피해자가 아닌, 박원순 자신이기 때문이다.


여성 인권 분야에서 가장 앞서가던 정치인이 사실은 자신의 비서에게 성범죄로 고발당했다는 데서 그가 과거에 추진했던 여성 인권 정책들도 진정성을 의심받게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인으로서의 공과와 개인적인 비위는 구별해서 보아야 할 것이다. 서울시가 서울시장의 소유물이 아니듯, 그의 정책들도 개인적인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변호사 시절 개인적으로 했던 활동들은 논외로 하더라도, 정치인으로서 추진한 정책들은 유권자를 대변했을 따름이다.


그의 곁에는 여성 인권을 부르짖는 이름 없는 수많은 여성들이 있었고, 여성 정책을 연구했던 연구자들이 있었고, 그를 뽑아준 유권자들이 있었다. 그가 추진한 정책들은 우리가 모두 함께 만든 것이지, 그의 개인적인 성과가 아니다. 여성 관련 정책뿐만 아니라 다른 정책들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없이도, 우리를 대표할 다른 사람을 선출하여 잘 해낼 수 있다. 한 사람이 한 진영 전체를 대변하는 듯 착각하는 것이야말로 지나친 우상화요, 한국 정치의 커다란 문제점이다. 어떤 진영을 대표하는 지도자가 쓰러지면 그 진영 전체가 쓰러지는 듯 과도하게 개인에게 의존하는 것은 우리 시민사회가 그만큼 약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네가 잘나가는 정치인을 무너뜨렸다.”라는, 피해자에 대한 비난이 2차 가해라는 점에서도 문제이지만, 우리 민주주의에도 심각한 위협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2018년부터 시작된 미투 운동으로 인해 많은 유력한 정치인이 추락했다. 하지만 이는 우리 민주주의의 위기가 아니다. 오히려 한국 민주주의가 가진 문제점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서,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그것을 고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러한 미투 운동이 장기적으로는 한국 민주주의의 체질을 개선하여 더 단단하게 만들어줄 것으로 믿는다.


남성 쪽은 사회적 입지가 굳건하고 여성 쪽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여성에 대해 “너 하나 참았으면 사회 전체에 더 보탬이 되었을 텐데”라는 비난이 제기되곤 한다. 하지만 바로 이런 풍토 때문에 여성 지도자가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적기 때문에 남성을 밀어주기 위해 참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바로 그러한 사회 분위기 때문에 여성이 사회에 기여할 수 없게 되는 것인가?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장래가 촉망되던 수많은 여성들이 사회 초년 시절 성범죄로 인해 싹도 틔워보지 못한 채 무너진다. 유력한 남성을 상대로 성범죄를 고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고발한 여성들이 이토록 많다면, 피해 사실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가. 성범죄가 없었더라면 여성 기업인으로, 여성 정치인으로 성공했을지 모르는 수많은 여성들이 젊은 나이에 성범죄로 인해 자신의 커리어를 잃고, 더 성장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 결과만 보고 ‘어차피 성공하지도 못할 여성들이 성공한 남자의 발목을 잡는다.’라고 비난한다. 자기실현적 예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피해 여성이 가해 남성의 미래를 위해 참았다면, 우리 사회 전체에 더 보탬이 되었을까? 이런 의문은 우선 인권의 차원에서 옳지 못하지만, 잠시 그 문제를 제쳐두고서라도, 나는 그렇지 않다고 답하고 싶다. 가해 남성이 능력을 인정받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짓밟은 수많은 피해 여성 중 그보다 더 큰 능력을 갖춘 사람이 있었을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남에게 가해 행위를 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킨 사람은, 그 능력으로 사회에 기여한 바 이상으로 사회 전체에 피해를 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미래의 인재를 잃었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주의는 한 사람의 위대한 능력보다 여러 사람의 작은 능력이 모여 이뤄내는 결과를 더 중시하는 체제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정치인의 범죄는 용인될 수 없다. 단지 ‘악한 자가 벌 받아야 한다.’라는 정의의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 전체의 발전을 위한 관점에서 바라보더라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단지 피해자와 가해자의 대결로 몰아가선 안 된다. 범죄는, 특히 정치인의 범죄는 특정인에 대한 범죄일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한 범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유주 _《누구나 흔들리며 페미니스트가 된다》 저자.

 

* 생각비행 저자 중 한 분인 이유주 작가의 기고문입니다.

2018년에 이어 2019년에도 미투운동은 계속되었습니다. 조금씩 진전되고 있긴 하지만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습니다. 다음 달이면 한국 미투운동이 본격화한 시발점이 된 서지현 검사의 미투 폭로 2주년이 됩니다. 서지현 검사는 JTBC 뉴스룸에 출연하여 안태근을 시작으로 검찰 조직 내 성폭력의 실상을 고발했습니다. 뒤이어 연출가 이윤택, 노벨 문학상 단골 후보로 거론되던 고은, 유력 대선 후보였던 안희정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미투 폭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일부는 처벌받고 일부는 법망을 빠져나가기도 했습니다. 미투운동이 우리 사회의 인식을 진일보시킨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미투 폭로가 있을 때마다 가해자 개인의 문제로 대할 뿐 성폭력의 문제를 사회구조의 문제로 보는 인식은 여전히 낮은 수준입니다.


출처 - 한겨레


대표적인 예는 진짜 미투와 가짜 미투를 남성들의 기준에서 판별하려 드는 것입니다. 피해자의 나이, 출신 평소 행동, 성폭력 전후로 보인 태도 등을 기준으로 소위 '피해자다움'을 감별하려는 것이죠. 일반인은 물론 범죄를 판결해야 할 판사, 검사, 변호사에 이르기까지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이런 잣대로 순결한 피해자인 여성과 소위 꽃뱀으로 피해자들 사이를 갈라치기하고 사회적 낙인을 찍습니다. 이런 행위를 통해 2차 가해가 이어집니다.


출처 - KBS


성폭력만큼이나 2차 가해가 고통스럽다는 건 미투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목소리입니다. 2017년 5월 체육계에서 첫 미투 폭로를 한 이경희 리듬체조 국가대표 코치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대한체조협회 김 모 전무이사를 성추행과 강간미수 혐의로 고소했는데 수사 과정에서 검찰에게서 받은 조사가 자동차 안에서 성폭력을 당한 경험을 재현해보라는 등 인격 침해적인 것투성이였다고 하죠. 이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본격적인 감사와 수사가 시작되자 가해자는 물론 체육계 주변인들로부터 각종 음해를 당하기 시작합니다. 두 사람이 원래 연인 사이였고 결혼까지 생각하는 깊은 사이이지 않았냐는 겁니다.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입니다. 이경희 코치는 2019년에 이르러서야 2차 가해에 대해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승소를 합니다. 판결은 벌금 300만 원의 약식명령. 액수가 크지 않아 몇 년간 감내한 고통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지만 가해자가 잘못하고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는 걸 인정받은 것만으로도 올림픽 금메달을 딴 기분이라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2차 가해가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범죄이며, 올해부터 불법 영상물 피해자 대신 정부가 삭제 비용을 대고 이 비용을 가해자와 유포자들에게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 것은 큰 진전이었습니다.


출처 - 한겨레


하지만 사회구조적인 여성혐오와 차별은 여전합니다. 이전에 생각비행에서도 여러 사례를 든 바 있죠. 젊은 남성들을 중심으로 요즘은 오히려 남성이 역차별을 당한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데, 사례와 통계를 보면 사실이 아닙니다.



남성 역차별? 여성이라 차별당하는 구조적 현실이 더 문제다! : https://ideas0419.com/998



학교, 학과, 학점이 같아도 여성 소득은 남성의 82.6%에 불과하며, 심지어 여성이 더 우수한 성적을 거둬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입사에 탈락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습니다. 업계 전체가 사상 검증을 하듯 페미니즘을 검열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3년 전 김자연 성우가 자신의 SNS에 메갈리아 후원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올렸다는 이유로 넥슨 게임에서 퇴출당한 적 있는데요, 3년이 지난 지금도 게임 업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아르카나라는 게임의 일러스트레이터가 3년 전 김자연 성우 지지글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일러스트 작업에서 퇴출당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이 게임 회사는 사회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작가 리스트를 언급해 게임 업계 내에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의심을 샀죠. 자신들은 그저 업계 내 리딩 컴퍼니인 넥슨의 사례를 따랐을 뿐이라면서 말입니다. 게임 업계 내에서는 외주 일러스트 등의 작업을 하는 여성에게는 SNS 사용 유무 등을 체크하며 사실상 여성주의에 대한 검열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업계 특성상 남성 소비자의 비율이 높기 때문인 듯한데, 일부 극렬 소비자의 입장만을 대변할 경우 그 업계나 장르 자체가 점점 좁아지며 도태될 수 있으니 업계와 소비자의 자성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공공 부문은 좀 나아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지난 11일 전남도청 여성 공직자들의 승진이 불공정하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전남도 공무원 직급별, 성별 분포 자료에 따르면 4급 공무원 99명 가운데 여성은 7.1%인 7명입니다. 3급은 19명 중 1명, 2급과 1급은 아예 없습니다. 여성이 공무원 성별 채용률의 56%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여성 합격자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인데 어째서 고위직은 남성이 독점하고 있는 걸까요? 능력과 자질 대신 조직 내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관행과 문화라는 이름으로 굳어져서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출처 - 한겨레


교육계에서는 서울교대 집단 성희롱 사건으로 연루돼 서울시교육청이 중, 경징계 처분을 내린 현직 교사 4명과 임용대기자 7명 등 11명이 처분이 과하다면서 전원 재심을 신청했습니다. 이들은 서울교대 재학 시절 단톡방 등에서 여학생 외모를 품평하고 성희롱 발언을 해 징계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한 현직 교사는 겉모습이 예쁘고 성숙한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애는 따로 챙겨 먹는다는 입에 담기도 더러운 말을 서슴지 않았다고 하죠. 매일 아이들을 대면하는 교사의 인식이 이 모양이니 학급 남아들이 뭘 보고 배우겠습니까?


출처 - 한국일보


언론의 경우 진일보한 면도 있습니다. KBS 9시 뉴스를 진행하는 메인 앵커로 40대 여성 기자가 발탁되었죠. KBS 9시 뉴스 앵커를 여성 기자가 맡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MBC와 SBS가 일찌감치 메인 앵커로 여성 기자들을 발탁했던 것과 달리 KBS는 중년 남성 앵커와 젊은 여성 아나운서 조합을 고수했던 과거의 전례를 비추어볼 때 변화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한 면도 많습니다. 광주MBC 라디오 프로그램의 사례처럼 여성을 외모로 품평하고 미투를 우습게 여기는 말투를 여과 없이 공중파에서 내뱉는 일도 있었으니까요. 진행자가 여성 트로트 가수들 몸매를 품평하더니 미투에 걸리지 않는 선에서 자신이 한 번쯤 만져보겠다는 소리를 낯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했습니다. 같이 있던 진행자도 사실상 동조했고요.


출처 - 한겨레


기술 발달에 따라 점점 인공지능이 사회에서 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는데요, 그런 인공지능조차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감점을 합니다. 아마존은 2014년부터 개발해 온 AI 채용 프로그램을 폐기했다고 하죠. 프로그램이 경력 10년 이상 남성 지원자 서류만 후보로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 채용 프로그램이 여성이라는 단어 자체를 감점 요소로 분류하기 시작한 겁니다. 지난 10년간 회사가 수집한 이력서 패턴을 AI가 학습한 결과를 토대로 지원자들의 서류를 심사하니 남성 비율이 높은 IT 업계의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게 된 겁니다. 아무리 AI라고 해도 무에서 창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의식적으로 쌓아온 사회 시스템을 데이터의 원천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입사에 AI를 도입하기 시작한 기업들이 있는데요, 기술이 중립적이고 객관적이지만은 않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올해 세계은행이 발표한 〈여성, 비즈니스 그리고 법〉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에게 경제적, 법적 권리를 동등하게 보장하는 나라는 187개국 중 단 6개국뿐이라고 합니다. 벨기에, 덴마크, 프랑스, 라트비아, 룩셈부르크, 스웨덴이 그런 나라입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100점 만점 기준에 전체 평균 74.71점으로 여성이 누리는 권리는 남성의 4분의 3 수준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한국은 전체 평균보다는 높았지만 50위권 안에도 들지 못했습니다. 세계경제포럼의 세계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전체 153개국 중 108위에 머물러 성 격차가 큰 국가에 속했습니다. 다행히 작년보다는 7계단 상승했습니다. 하지만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세계경제포럼은 세계 성 격차 해소에 99.5년이 걸린다고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남녀평등을 이루기가 이토록 어려운 일일까요? 우선 현실 인식부터 바꿔야 합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이 있습니다만 100년씩이나 기다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남녀가 정말로 평등해지는 날이 속히 오길 기대합니다.

지난 주말 혜화역을 중심으로 1만 명이 넘는 사람이 붉은 옷을 입고 광장으로 나섰습니다. 내로라하는 노조 조직이나 즐거움을 위한 페스티벌도 만 명 정도가 모이기는 쉽지 않죠. 그런데 혜화역에 모인 이들은 SNS 등을 통해 소식을 듣고 자발적으로 모인 여성이었습니다. 

 

출처 - 이데일리

 

남성이 피해자였던 홍대 몰카 범죄 수사의 편파성을 규탄하는 한편 한국 사회에서 성별에 따라 사건의 해결 방식과 걸리는 시간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현실에 대한 항의의 뜻을 표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때문에 모임의 대표 구호가 "남자만 국민이냐? 여자도 국민이다!"였습니다.


출처 - KBS


미투 폭로에 이어 이번 대규모 시위가 진행된 이유는 여성의 절박한 위기감과 평소에 느껴왔던 차별감에 대한 공감 때문이었습니다.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로 몰카 범죄를 걱정해야 하는 여성들은 홍대 남성 몰카 사건처럼 누가 범인일지 뻔히 보이는 사건조차 접수가 힘들다고 토로합니다. 유명 유튜버 한 명도 스튜디오 비공개 촬영에서 성추행과 성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했습니다. 그런데 기사의 헤드라인은 여성이 찍혀도 몰카녀 사건, 여성이 찍어도 몰카녀 사건으로 달리는 현실입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 질리지 않은 여성이 있을까요? 이번 혜화역 집회를 주도한 운영진들조차 한꺼번에 터져 나온 여성의 분노에 공감하면서도 놀라워했고 최종적으로 1만 2000여 명이나 나와서 함께 시위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출처 - 연합뉴스


최근 여성 인권에 대한 의식이 고양되고 사회적 변화가 조금씩 이뤄지기 때문인지, 오는 24일 낙태죄 헌법 위배 여부에 대한 공개변론을 앞두고 여성가족부가 의견서를 제출했습니다. 정부 부처가 공식적으로 의견서를 내기는 처음입니다. 헌법재판소에 낙태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취지의 공식 의견서를 제출한 것입니다. 여가부는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한 현행 형법이 여성의 생명권과 건강권, 임신, 출산을 자유롭게 결정하는 재생산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지난 2012년 헌재는 낙태죄에 관해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지만 당시 합헌 4, 위헌 4로 간신히 합헌 판결이 났던 만큼, 이번에는 위헌 결정이 내려질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습니다. 2017년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 약 합법화 및 도입을 요청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20만 명 이상의 동의한 바 있습니다. 당시 조국 민정수석은 현행 법제에 모든 법적 책임을 여성에게만 묻고 있다는 문제가 있으며 이를 넘어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단계에 왔다고 말하며 임신중절과 관련해 정부 차원의 보완대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출처 - 중앙일보


그런데 법무부는 이에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법 적용과 변화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법무부다운 입장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이유가 해괴합니다. 24일 공개변론을 앞두고 작성된 법무부의 변론요지서를 보면 이 논란을 생명권 대 여성의 자기결정권으로 전제하고 낙태를 원하는 여성을 성교는 하되 그에 따른 결과인 임신 및 출산을 원하지 않는 사람으로 폄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강간이 아닌 다음에야 남녀가 성교를 한다는 건 응당 임신에 대한 미필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라는 말인데요. 법무부 입장은 한마디로 성교만 하고 책임은 안 지겠다는 점이 못마땅하다는 식으로 보입니다.


여러 부분에서 허점이 보이죠. 우선 조국 수석의 말대로 왜 그 책임을 낙태죄란 형태로 여자만 져야 하는가부터 볼 수 있겠습니다. 법무부의 말대로라면 임신은 여자와 남자의 공동 책임일 텐데 말이죠. 또한 1970~1980년대 산아제한, 특히 심각한 남아선호사상 때문에 낙태된 여자아이들을 생각한다면 이는 국가가 낙태를 조장했거나 적어도 보고도 못 본 척했다는 말이 되는데 왜 생명권의 무게가 그때와 지금이 달라져야 하는 건지도 이상합니다. 나아가 산아제한처럼 임신과 출산을 국가가 통제하겠다는 발상은 개인의 신체의 자유를 통제하는 쪽으로 나아갈 여지가 있어 더욱 위험한 발상이기도 합니다.


출처 - KBS


오는 26일에는 서울 청계천 한빛광장에서 성차별적 수사 규탄을 위한 시위가 다시 열린다고 합니다. 지난주보다 더 대규모 시위가 되지 않을까 싶군요. 사회는 개개인이 당하는 부당한 차별에 대한 저항으로 바뀝니다. 이 시위를 통해 우리 사회의 차별적인 현실이 개선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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