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낮아지는 출산율을 걱정하는 시대인데 얼마 전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경찰이 낙태한 여성을 색출하겠다고 특정 산부인과를 이용한 여성 26명에게 참고인 조사 출석을 요구하고 낙태 사실을 취조한 사실이 확인된 겁니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지난 21일 성명을 통해 경남 남해경찰서가 20여 건의 개인정보를 얻어 해당 여성들에게 낙태했는지를 취조했다고 밝혔습니다. 경찰은 출석 통지 우편물을 확인 후 출산한 지 얼마 안 되어 신생아가 있어 못 간다고 전화한 여성에게조차 재차 출석을 요구했습니다. '개인정보가 어디서 난 거냐'는 여성들의 질문에는 경찰서에 나오면 답해주겠다며 답변을 회피했다고 하죠.


출처 - 여성신문


낙태죄 자체가 위헌의 요소가 많은 법률입니다만, 경찰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수사를 했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모조리 출석하라고 윽박지를 게 아니라 출산한 지 얼마 안 되어 신생아가 있어 못 간다는 사람의 경우 병원에 문의하거나 출생신고를 확인하기만 하면 될 일이죠. 게다가 당사자들이 개인정보의 출처를 질문했는데 경찰이 이에 대해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는 것은 경찰 스스로 수사의 무리함을 알았다는 방증이 아닐까요?


출처 - 시사위크


한 여성은 경찰 조사에서 임신을 하려고 노력했으나 아이를 사산해 치료를 받았다는, 다시 끄집어내고 싶지 않은 일까지 진술해야 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경우 동네에 산부인과 병원이 하나밖에 없는데 여성이 어디로 가서 진료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남편이 출석 통지서를 보고 임신중절을 한 게 아닌데도 의심을 하는 가정도 있다고 하니, 이런 경우 가정불화를 경찰이 대체 어떻게 책임을 질 겁니까? 가정에 불화를 조장하고 산부인과도 못 가게 하면서 출산율 운운할 염치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출처 – 민중의 소리


경찰은 다른 분들은 다 이해를 하더라며 민원이 들어와 조사할 수밖에 없었다는 궁색한 변명을 내놓았습니다. 9월 초 해당 산부인과가 낙태수술을 한다는 진정을 접수하고 지난달 27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참고인 26명의 인적사항을 받았다고 하죠. 진정인이 낙태 받은 사람들과 병원을 지목했기 때문에 사실을 확인하려고 압수수색에 출석까지 요구했다는 겁니다. 살인범이나 국정농단 사범도 아닌데 하루 만에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하고 소환 통지를 하는 신속함을 보인 이유를 당최 모르겠습니다. 정말 신속함이 필요할 때는 뭉그적거리는 경찰이 말입니다.

 

출처 - 시사저널

 

한국여성민우회의 발표대로 특정 기간에 특정 산부인과를 이용한 특정 연령대의 여성을 무작위로 조사하는 건 반인권적이며 행정편의주의적인 작태입니다. 쌍팔년도처럼 한 놈만 걸려라는 심산이 아니라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벌인 일일까요? 현재 낙태죄 폐지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뜨겁고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위헌성을 검토하고 있는 판국에 낙태죄로 여성을 처벌하는 데 반인권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경찰의 행태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경남여성단체연합 등 도내 여성단체들은 지난 24일 경남지방경찰청 수사과를 찾아 항의 서한을 전달했습니다. 이들 단체는 "개인 의료정보 수집을 통한 경찰의 반인권적 임신중절 여성 색출 수사를 규탄한다"면서 "여성의 건강권 보장을 요구하며 낙태죄 폐지 등을 촉구하고 있는 사회 상황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경찰이 시민 안전과 치안을 위한 민중의 지팡이가 맞는가"라고 비판했습니다.


출처 -KBS


6년 전 낙태죄를 합헌으로 판결했던 헌법재판소가 이번에 다시 낙태죄 위헌 여부를 검토 중입니다. 여성들은 물론 학자, 변호사들도 잇따라 낙태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냈습니다. 6년 전 헌재 결정의 가장 큰 문제는 임부의 자기 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을 양자택일의 대립 구도로 설정한 점이었습니다. 두 가치를 어떻게 조화시킬지가 아니라 여성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결정이었죠. 이와 관련된 청와대 국민청원 답변에서 조국 민정수석은 태아 대 여성, 전면금지 대 전면 허용의 이분법을 넘어야 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현재 하루 평균 낙태 여성이 3000명에 달하고 대부분 음지에서 불법으로 이뤄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 낙태는 더 많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태죄, 임신중단의 권리는 양지에서 더욱 심도 있게 다뤄져야 합니다. 6년 전에 4:4로 겨우 합헌 판결이 났던 만큼, 여성의 권리에 대한 인식과 최근 들어 달라진 사회적 분위기를 생각할 때 이번에는 위헌 결정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출처 -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헌재가 낙태죄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리면 국회는 관련 형법과 모자보건법을 개정해야 합니다. 낙태죄 폐지가 임신 중단 합법화 논의의 끝이 아니라 시작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미성년자가 임신중절 수술을 받을 경우 보호자의 동의를 요건으로 둘 것인지, 임신 주수에 따라 임신중단 규제를 어떻게 나눌지, 임신중단의 기본 절차를 어떤 식으로 구성할지 등등 이후에 논의해야 할 의제는 차고도 넘칩니다.


출처 - 뉴시스


미성년자의 임신중단 문제는 미성년자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문제와 함께 다뤄야 하므로 미성년자의 법적 지위와 연령에 대한 논의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또한 합법적으로 임신중단이 가능해지면 임신중단을 원하는 여성들이 올바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창구와 이를 뒷받침하는 법적 장치와 사회적 서비스가 충분히 제공되어야 합니다. 임신중단과 출산, 양육의 가능성 사이에서 여성 스스로 충분히 고민하고 선택할 수도 있도록 해야 하며, 임신중단 시 따르는 신체적 변화와 합병증 등에 대한 상담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임신중단을 위한 수술비는 건강보험과 공공재정에서 부담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임신중단을 위한 법 개정은 국가가 허용하는 임신중단 사유를 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임신한 여성이 올바른 정보를 토대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시작이 될 낙태죄에 대해 헌재가 현명한 판단을 하기 바랍니다.

청와대는 한 달 안에 20만 명 이상이 동의한 청원에 대해 담당자가 관련 답변을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 및 도입을 부탁드립니다"라는 청원에 대해 지난 26일 조국 민정수석이 공식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오늘은 '낙태죄' 문제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출처 - 청와대

 

출처-청와대

 

현재 우리나라 형법 269조, 270조는 낙태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형법 제269조 1항은 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리도록 했고, 형법 제270조 1항은 의사나 한의사 등이 동의를 얻어 낙태 시술을 하면 2년 이하의 징역에, 동의가 없었을 땐 징역 3년 이하에 처하도록 하고 있죠. 

 

예외 사항으로 모자보건법 14조 1항에 따라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해 임신된 경우,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 간에 임신된 경우는 처벌하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낙태를 한 여성은 물론 시술한 의사까지 처벌하도록 하면서도 낙태를 시키거나 동의한 남성에 대한 처벌 규정은 없습니다. 뭔가 이상하죠?

 

출처-청와대

 

근본적으로 여성의 선택권을 무시했던 낙태죄는 우리 사회에서 사문화되어 왔습니다.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2011년 낙태한 여성을 처벌하는 한국 형법 조항을 재검토하라고 권고한 바 있습니다. 낙태죄가 한국 여성의 건강과 사회적 지위를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절을 여성이 가져야 할 근본적 권리로 규정했습니다. OECD 30개국 중 23개국이 낙태를 합법화하고 있으며, 이 중 다수가 공공 의료체계를 통해 여성이 필요한 경우 안전하게 임신중단 상담과 진료를 받고 시술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습니다.

 

출처 - 청와대 

 

그런데 모든 것을 과거로 퇴행시켰던 박근혜 정권은 음성적으로 이뤄지던 낙태 수술을 비도덕적 의료행위로 보고 처벌을 강화하려 하여 논란을 일으킨 바 있죠. 여성단체는 물론이고 의사협회는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현실을 무시하고 낙태죄를 강화할 경우 오히려 피해가 여성들에게 돌아갈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2006년 세계보건기구 연구를 보면 매년 전 세계에서 2000만 명의 여성이 안전하지 않은 임신중절 수술을 받고 그중 6만 8000명이 사망하고 있다고 합니다. 임신중절을 불법화하고 낙태죄로 처벌하는 것은 여성을 음성적이고 위험한 임신중절 시술로 내모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안전하지 않은 시술로 여성은 건강을 위협받고 사망률은 높아집니다. 낙태 수술을 금지한 필리핀만 보더라도 모성 사망률이 치솟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토론이나 사회적 합의도 없이 처벌만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건 박근혜 정부의 특기였지만, 낙태죄 처벌을 강화하려 했던 경우는 국가의 폭력, 위선의 극치였습니다. 수많은 여성의 시위와 민원, 의사들의 항의가 빗발쳐 낙태죄 형량 강화 시도가 무산되긴 했으나,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한국 사회에서 낙태는 여전히 불법입니다.

 

출처 – 한국 여성의 전화

 

낙태를 신고하겠다는 위협을 빌미로 여성들에게 폭력적인 관계를 강요하거나 협박을 하는 사건들은 지금도 버젓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이제는 인식을 바꾸고 법을 바꿔야 할 때입니다. 낙태죄 폐지는 임신 중단의 '권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임신 중단과 지속의 선택은 여성의 삶을 건 중요한 결정입니다. 그러니 우리 사회의 복합적인 현실을 들여다보지 않고 여성의 결정을 범죄화하거나 여성을 범죄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출처 - 한겨레


녹색당은 2017년 9월 29일 임신중지를 개인의 도덕성 여부로 환원하는 것은 피임과 임신, 출산과 양육을 둘러싼 숱한 사회정치적 문제와 구조를 은폐하고 공동의 행위인 임신을 여성 일방의 책임으로만 전가하는 일이 된다며 낙태죄를 폐지하라는 논평을 낸 바 있습니다. 

 

출처 - 녹색당

 

아울러 아이를 낳아 키우는 데 최소한의 안전망이 갖춰진 사회적 토대, 피임이 당연하며 여성이 주체적으로 피임을 제안할 수 있는 평등한 관계, 비혼모에 대한 편견 없는 존중과 제도적 보장, 다양한 가족 형태의 인정, 남성과 국가가 적극적으로 양육을 분담하는 등 사회적 조건이 마련되면 여성이 건강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신중단을 할 이유가 줄어든다고 밝혔습니다. 피임, 임신, 임신중단, 출산, 양육의 전 재생산 과정을 여성에게만 책임 지우지 않고 국가가 보장하는 사회라면 임신중단율은 당연히 낮아지겠지요.

 

출처 - 청와대

 

청와대가 정리한 위 도표를 보면 OECD 회원국 가운데 우리나라는 사회, 경제적 사유로 임신중절을 금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눈에 들어오는 도표가 있어 여기에 소개합니다.

 

출처-미디어브리지

 

표를 보면 낙태 불법화가 해결책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낙태율을 줄이기 위한 낙태를 불법화하는 것은 위험한 불법 낙태를 증가시킬 뿐입니다. 이 때문에 낙태를 원하는 여성들이 위험에 처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겨레21》 1134호에 소개된 루마니아의 사례를 보면 이런 사실이 더 명확해집니다.

 

1966년 루마니아의 국가원수였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낙태금지법 시행을 결정합니다. 이는 루마니아의 출산율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위기감에서 기인한 것인데요, 'Decree 770'이라고 불리는 낙태금지법은 1989년 12월 루마니아 혁명으로 법이 폐기될 때까지 23년 동안 지속되어 사회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루마니아와 세계보건기구의 몇몇 연구자는 1966년부터 1989년까지 지속된 낙태금지법이 루마니아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검토하고, 그 결과를 1992년 미국 공중보건 학회지에 실었습니다. 

 

'Decree 770'이 시행되고 첫 4년 동안 여성 1인당 출산율은 두 배 증가하고, 인구 1000명당 태어나는 신생아 수를 지칭하는 조출생률은 14명에서 21명으로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출산율 증가는 일시적이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데 필요한 충분한 경제적 지원이 없는 상황이라 의사에게 뇌물을 건네 낙태수술이 가능한 거짓 진단명을 받아내는 사람이 늘어났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여성들은 의사의 도움 없이 유산하기 위해 위험한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불과 4년 뒤인 1970년부터 조출생률은 다시 감소하고 1985년에는 법이 시행되기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Decree 770'이 낙태뿐 아니라 피임 제한까지 포함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낙태금지법을 통해 출산율을 높이려 한 시도가 실패했음이 명확히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고아원 등의 시설에서 자라나는 아이 수가 증가하게 된 것이죠. 'Decree 770' 때문에 많은 여성이 원치 않은 아이를 낳은 결과였습니다. 아이를 돌보고 키울 경제적 자원도, 스스로의 동기도 없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방치되거나 시설에 맡겨졌습니다. 열악한 시설에서 아이들은 영양결핍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는 유아사망률 증가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출처 - 《한겨레21》

 

그리고 모성사망비가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의사로부터 안전한 수술을 받을 수 없게 되자, 많은 여성이 불법 시술을 했고 이로 인해 여러 합병증을 앓으면서 매년 500여 명이 출혈과 감염으로 사망했습니다. 낙태금지법이 시행되기 이전인 1966년에 비해 1983년 루마니아의 모성사망비는 7배 높아졌으며, 1989년을 기준으로 루마니아는 주변 국가인 불가리아나 체코보다 9배 가까이 높은 모성사망비를 보였다고 합니다. 1989년 12월 혁명으로 낙태금지법이 철폐된 다음 해에 루마니아의 모성사망비는 이전의 절반으로 감소했습니다. 이는 낙태금지법이 모성사망비 증가의 원인이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임신중단을 결정한 여성을 형법으로 처벌하는 사회는 여성을, 여성의 삶을, 여성의 판단을 존중하는 사회가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확합니다. 인구가 많을 때는 낙태죄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국가가 나서서 산아제한 정책을 펼치다가, 이제 출산율이 낮다고 여성의 임신중지 결정을 탓하는 것은 국가 폭력이며 인권침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성을 탄압하는 낙인의 굴레 낙태죄를 폐지하고 임신, 출산, 육아를 여성의 책임으로만 강요하는 사회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조국 민정수석은 '낙태죄 폐지 청원'에 대한 답변에서 "자연유산 유도약의 합법화 여부도 이러한 사회적·법적 논의 결과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와 함께 정부 차원에서 임신중절 관련 보완대책도 다양하게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아울러 프란체스코 교황의 발언을 인용하며 임신중절에 대해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고도 밝혔습니다. 청와대의 이번 답변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 낙태죄 폐지에 대한 공론화가 본격화할 양상입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귀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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