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추석 명절을 보낸 가을, 유난히 고향이 그립습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에게 시골의 고향은 그림이나 영화 또는 여행에서 본 인상적인 장면처럼 아련하기만 합니다. 방학 때 친척을 찾아 시골에서 논 추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고향 하면 앞에 강이나 바다가 있고 뒤엔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을 떠올리지 않을까요?

오늘 소개할 〈참깨를 털면서〉라는 시를 쓴 김준태 시인은 전라남도 해남 출신입니다. 그는 "살구꽃이 피고, 보리꽃이 피고, 봄마다 뜸북새가 울고, 여름마다 물꼬싸움이 찾아들고, 매미가 울고, 가을엔 저녁노을처럼 들기러기가 내려앉는 곳. 뿐이랴, 논밭들이 헐떡거리는 들판 건너 바다도 보이는 곳. 그곳이 나의 고향이다" 하고 자신의 고향을 소개합니다.

시인의 말마따나 고향은 우리가 돌아가고 싶은 편안함을 주고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곳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성장 일변도인 정부와 지자체의 개발 논리 앞에서 전국의 고향은 위태롭습니다. 댐을 만들어 수몰되거나, 공장이 들어선다고 파헤쳐지거나,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고층 아파트가 세워지거나, 항구를 만든다고 사라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어린 시절 뛰어놀던 산과 들과 강과 해변이 추억으로만 남을 위기에 처한 곳도 많습니다. 4대강 공사로, 해군기지 건설로, 간척사업 등으로 지금 이 시간에도 아름다운 우리의 고향이 훼손되고 있습니다.

참깨를 털면서

산그늘 내린 밭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世上事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都市에서 십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댄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번만 기분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世上事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에서 표현되어 있듯이 시인은 도시생활에서 돌아와 오랜만에 참깨를 터는 작업을 하며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都市에서 십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기가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라고 심경을 직접 드러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휘파람불며 참깨를 털어내는 손자에게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되느니라” 하며 가볍게 일러주십니다.

‘참깨 털기’가 도시생활에 익숙한 손자에게는 큰 즐거움이겠지만, 할머니에게는 해마다 돌아오는 일상생활입니다.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며 참깨를 텁니다. 깨가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젊은 손자는 해지기 전에 집에 가려고 빨리 털어내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선지 할머니는 귀여운 손자에게 가벼운 꾸중을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도 흔합니다. 농촌의 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농촌의 삶을 막연히 즐겁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조선 시대 윤선도처럼 가난하지만 낭만적인 생활을 하고 왔다는 식으로 농촌생활을 '쉼'과 '재미'가 있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윤선도가 자연과 어촌의 평화로운 풍경을 노래하며 즐기는 동안 보길도 주민은 일상의 힘겨움을 온몸으로 견뎌야 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체험'을 하러 내려가는 사람들에겐 그곳의 일상이 재미로 다가올 수 있겠지만 논밭에서 땀 흘리는 현지인들로서는 일상을 재미로 국한하여 말할 수는 없겠지요. 젊은 손자의 모습과 농촌을 문화체험의 현장 정도로 생각하는 요즘 도시인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김준태 시인이 <참깨를 털면서>를 발표한 1970년대는 농촌에서 많은 젊은이가 빠져나와 도시로 이주하던 때였습니다. 농촌에서 젊은이를 찾아보기 어렵고 노인들만 남은 곳이 허다했습니다. 누군가는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파헤치고 개발 논리를 내세워 고향을 배반하고 팔아먹기도 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런 일이 지금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김준태 시인은 《참깨를 털면서》라는 시집 후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아, 사람들아. 고향을 잊어먹거나 고향을 배반하거나, 고향을 뒷발로 차버리거나, 고향을 올라타고 말채찍을 휘두르는 사람들아. 고향! 이제 우리는 고향을 찾아가야 할 것 같다. 고향을 깊이 어루만져야 할 것 같고, 고향을 사방팔방으로 입맞추어야 할 것 같고, 고향을 노래해야 할 것 같고 고향을 울어주어야 할 것 같고, 아주 우리가 진짜로 고향이 돼버려야 할 것 같다. 사람들아, 오 사람들아. 이제 우리는 저마다 고향이 되어서 기실 천지간이 온통 고향으로 둘둘 뭉쳐졌으면 환장하게 좋을 것 같다.
몇 주먹 더 털어놓자면, 사람들아, 나의 고향은 나의 宇宙다. 나의 고향은 나의 敎科書요, 바이블이요, 눈알이요, 망원렌즈요, 배꼽이요, 귓구멍이요, 속옷이요, 머슴이요, 스승이요, 보리밥이요, 天國이요, 개똥이요, 구정물통이다. 요컨대 나의 고향은 나의 모든 것이다. 나의 未來다.

글을 마무리하며 《참깨를 털면서》의 발문을 쓴 조태일 시인과 천상병 시인의 일화를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조태일은 김준태의 시를 읽고 자신보다 인생의 연륜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했다가 보내온 약력을 보고 대학교 초년생이라는 사실에 놀랐다고 합니다. 그 뒤 김준태는 중앙의 발표지면을 통해 좋은 시를 맹렬히 발표합니다. 하루는 《창작과비평》에 실린 김준태의 <감꽃> 등의 시를 읽고 천상병 시인이 조태일 시인을 찾아왔습니다. 

감꽃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대낮부터 청진동 막걸릿집으로 조태일을 데려간 천상병 시인은 백 원어치의 막걸리를 이 세상에서 남에게 사는 처음이자 마지막 술이라며 권했다고 합니다. 김준태의 좋은 시를 읽고 매우 기쁘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옛동무를 만나 고향의 추억을 나눠보시기 바랍니다.

김준태

1948년 해남에서 태어나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독어과를 졸업했다. 1969년 월간 《시인》지로 등단했다. 베트남전쟁에 1년 동안 참전했으며 13년간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이후 11년간 전남일보, 광주매일 편집국, PBC광주평화방송 시사자키, 5·18구속자 회장,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 한국문학평화포럼 부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조선대학교 문창과 초빙교수로, 광주 금란로에 작은 학교 <금남로리케이온>을 마련하여 교육과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집 《참깨를 털면서》《나는 하느님을 보았다》《국밥과 희망》《아아 광주여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칼과 흙》《지평선에 서서》, 소설 〈오르페우스는 죽지 않았다〉 외 액자소설 88편, 통일시해설집 《백두산아 훨훨 날아라》, 세계문학기행집《세계문학의 거장을 만나다》, 평전《명노근 평전》 베트남전쟁소설《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등이 있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4월 초파일을 맞아 천상병 시인의 <歸天>이란 시를 소개합니다. 4월 초파일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 즈음에 천상병 시인을 생각하는 까닭은 인사동 조계사 앞에 천상병 시인의 아내인 목순옥 여사가 운영하던 찻집 '귀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문학가와 문학 지망생이 즐겨 찾던, 작지만 유명한 문화공간이었습니다. 고통과 슬픔을 초월한 듯한 마음과 어린아이와 같은 웃음을 가진 천상병 시인은 저에겐 마치 득도한 고승 같은 이미지로 남아 있습니다. 

歸  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의 삶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가 표현한 '아름다운 이 세상'을 실제로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순탄하지 않았던 그분의 삶 때문이겠지요. 천상병 시인은 비교적 이른 나이인 고등학교 3학년 때 추천을 받고 대학 2학년 때 추천이 완료되어 문단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른 활동과는 어울리지 않게 살아생전에 《새》라는 유고시집을 남겼습니다. 

천상병 시인과 부인 문순옥 여사

천상병 시인은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1967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되어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가 이 사건에 휘말린 이유는 간첩 혐의를 받던 친구의 수첩에서 천상병 시인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천상병 시인을 친구들은 죽었다고 생각하고 유고시집을 출간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중앙정보부에서 받은 전기고문으로 몸과 마음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채로 풀려나 거리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시인은 행려병자로 오해를 받아 서울시립정신병원으로 보내졌습니다.  

가난했지만 막걸리 한 잔에 행복을 노래했던 시인은 돈의 맛에 길든 세상, 이기심이 가득한 욕망의 세상을 향해 어린아이와 같은 웃음으로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행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나의 가난은> 중에서)이라며 작은 일에도 행복함을 느낄 수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천상병

1930년 일본에서 출생했으며 1993년 4월 28일 지병인 간경변증으로 죽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강물>로 《文藝》지에 추천받고 서울대 상과대학 2학년에 추천이 완료돼 등단했다. 전기고문의 후유증으로 자식을 낳지 못했지만 평생의 후원자이자 독자였던 목순옥 여사와 결혼해 시를 썼으며 중광, 이외수와 함께 3대 기인으로 불렸다. 
시집으로는 《새》《주막에서》《천상병은 처상 시인이다》《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등이 있다.

* 천상병 시인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한 번 더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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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제주도 바닷가엔 보말[각주:1]이 아주 통통합니다.
6월이 되면 또 고메기가 한창입니다.
보말이나 고메기[각주:2]는 아마도 바다 다슬기 종류일 겁니다.
보말이나 고메기로 죽을 쒀 먹으면 맛이 특이하고도 맛이 있습니다.
건강에도 좋다고 합니다.
5, 6월의 제주도 사람들은 바닷가 검은 돌에 붙어사는 보말이나 고메기 따는 일이 부업입니다.
부업으로 끼니를 대신할 때도 있습니다. 죽이라도 배가 든든하거든요.
이들의 간식 같기도 한 보말죽이나 고메기죽이 가끔은
제주도로 옮겨와 사는 외지인에게도 한 그릇 담겨 옵니다.
제주도 이웃인심이지요.
한 그릇의 인심이 참으로 그득합니다.
바닷가의 한 펜션에 머물던 관광객들이 바다로 나와 보말을 채집하고 있습니다.
예, 보고 있으면 어른이든 아이든 채집 같습니다. 마치 학교에 도로 내야 할 숙제라도 하는 듯합니다.
서툴러서 그런 게지요.
이런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우리도 오늘 밤 죽 쒀 먹자!”
그냥 했을 것 같은 이 말이 왜 그렇게도 웃기던지요.
‘죽 쒔다.’ ‘죽 써서 남 준다.’
평소 새겨하지 않던 이런 말들을 새겨봅니다.
이러면 죽 쑤는 일도 즐거울 때가 있습니다.
오늘은 바닷가 동네 식당에 나가 보말죽 한 그릇을 사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인심이 언제나 내 맘에 맞게 채워지진 않거든요.
인심이 박해서가 아닙니다.
인심을 기대하는 얄궂은 공짜심이 어느덧 생겨났나 봅니다.
돈 주고 사먹어도 따뜻한 인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침 장마가 시작되었다니 그릇 감싸는 두 손마저 따뜻하게 하는 죽을 더 먹고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혼자 가서는 안 될 듯합니다.
지난번 보말죽을 받으면서,
“저는 드릴 게 없는데….”
했던 말이 문득 떠오릅니다.
말 한마디도 허투루 하며 살아선 안 되겠지요.
손수 죽을 끓이는 정성은 못 나눠도 식당은 함께 가서라도 인심을 나눠야 할 것 같습니다.
막걸리도 마시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수 있지만, 뭐 어떤가요.
마음을 어찌 돈 따위 것으로 환산할까요?


  1. 보말은 제주도 지방의 사투리로 ‘고둥’을 뜻한다. 고둥은 숙취, 해독, 간, 위를 보하는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2. 제주도에만 서식하는 연체동물. 바다에 아주 작게 더덕더덕 붙어산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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