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25일, 헌법재판소는 야당에서 청구한 미디어법 권한쟁의심판청구를 기각했습니다. 총 9명의 재판관 중 4명이 인용, 4명이 각하, 1명이 기각 의견을 내어 인용을 위한 정족수 5명에 1명 모자라 안타깝게도 기각되었습니다.

참고로 문제의 핵심인 미디어법은 이런 법입니다.

미디어법 [media law]
 
법률상의 용어는 아니나, 편의상 흔히 미디어에 관련된 여러 법을 통틀어 미디어법으로 부른다. 주로 방송법, 신문법, IPTV법, 정보통신망법, 언론중재법, 디지털전환법 등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한나라당이 개정을 주장하였으나 야당과 진보 세력의 반발을 야기했고, 2009년 7월 22일 국회에서 논란 끝에 통과되었다. 통과 과정에서 투표의 유효성 논란이 발생했다. 7월 3일 민주당 등 세 야당은 헌법재판소에 방송법의 효력정지가처분 및 권한쟁의심판청구를 신청하였으나 기각되었다.

개정안에는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허용하여 대기업과 일간신문이 방송사 지분을 소유하는 것을 허용했다. 한도는 지상파 방송 10%, 종합편성 채널 30%, 보도채널 30%까지다. 또한 외국인은 종합편성과 보도 채널을 60%까지 소유할 수 있다. 지상파, 종합편성 및 보도 채널을 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최대 지분도 66%로 상향조정되었다. 외국의 경우 대부분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허용하고 있으나 언론 독과점을 방지하기 위하여 여러 제한장치를 두고 있다.

출처 : DAUM 백과사전 시사상식사전

일부 대기업과 언론사가 독과점을 이룰지도 모를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거죠. 이때 통과 과정에서 재투표, 대리투표 등 날치기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절차상의 문제까지 있었습니다. 당시 올려주신 따뜻한 카리스마 님의 예를 참조하시면 더욱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일개 국민 입장에서 미디어법 통과, 왜 잘못됐는지 설명해볼까요?( http://careernote.co.kr/686 )

문제는 이미 헌재가 국회 표결 당시 절차상의 위법은 있지만 법안 자체가 무효는 아니라고 말했다는 점입니다. 작년 10월 이 때문에 '컨닝한 것은 인정되지만 합격이 무효는 아니다,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 등 국민 사이에 헌재를 비꼬는 말이 많았죠. 절차에 법적인 문제가 있다면 그 결과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적어도 절차상 하자는 하자, 공을 돌려 받은 국회는 이 하자를 제거하기 위해 조치를 취해야 했지만 아무 것도 안 했습니다. 그래서 야당 의원들은 국회의장이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다시 한 번 헌재에 문제를 제기했고, 올해 11월 25일 결국 이런 웃지 못할 대답을 듣게 된 겁니다.

결과적으로 헌재가 한 말은 이런 말입니다. 잘못한 건 맞는데 늬들 일은 늬들이 알아서 해결해라.

자기들이 저지른 일은 자기들이 알아서 해라... 언뜻 옳은 말처럼 보이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선 헌재가 이미 미디어법 표결 절차에 하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이상 법적인 문제로 다뤄야 함에도 이를 정치적으로 해결해버렸습니다. 이번 판결에 대한 한상희 건국대 교수와 임지봉 서강대 교수의 말을 옮겨보죠.

한상희 건국대 교수 : "헌재가 존재해야 할 이유를 스스로 부정한 사건"
임지봉 서강대 교수 : "헌재가 존립하는 이유는 위법 위헌 상태를 적극적 위헌 판결을 통해 바로잡고 우리사회의 헌법질서를 수호하도록 한 것이다. 이번 결정을 보면 헌재가 있을 이유가 없고 위헌이나 위법의 유권 해석은 법학자에게 물어봐도 될 사안"

출처 : 미디어법 기각 … “헌재 스스로 존재이유 부정”(http://www.naeil.com/News/politics/ViewNews.asp?nnum=583690&sid=E&tid=0, 내일신문)

정치적인 선택으로도 직무 유기에 가깝습니다. 민주주의 정부의 근간은 삼권분립입니다.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가 서로 권력을 견제한다는 사실은 중학교 사회 시간에도 배웁니다. 헌법재판소는 사법부의 상징으로서 입법부의 잘못을 견제해야 하는 정치적 의무가 있음에도 그 의무를 방기해버렸다고 할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법조계 사람들과 의식있는 언론인들은 이번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반대로 현 정부의 방통위와 방송 시장에 진출하려는 대기업 그리고 이른바 조중동은 신이 났습니다. 헌재의 판단까지 나왔으니 더 이상 거리낄 게 없다는 거죠. 방통위는 이미 종편 심사 절차와 관련된 일정을 밀어붙이기로 했습니다. 조선, 중앙, 동아, 매경 등 종편과 보도채널을 준비하는 언론사들도 마찬가지고요.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이란 기자가 진실이란 칼을 탐사보도란 끈기로 벼려내어 그 유명한 석유 독점재벌 록펠러의 문어발을 잘라내 해체한 후 100년. 이젠 국민을 대신해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언론이 스스로 독점재벌이 되려고 합니다. 이 나라의 언론인 정신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약자의 입장에 서서 진실을 파헤치는 참다운 저널리스트와 저널리즘이 그리운 이때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미국의 반(反)독점법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한때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즈에 설치한 웹 브라우저 익스플로러 때문에 다른 기업들로부터 소송을 받은 적이 있는데요, 이는 반독점법에 근거한 것입니다.

반독점법은 1890년 7월 2일, 벤저민 해리슨 미국 대통령이 '셔먼 반독점법(Sherman Antitrust Act)'에 서명한 것으로 기인합니다. 이 법은 상원 표결에서 51대 1, 하원에선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는데요, 당시 벤저민 해리슨 대통령은 이 법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결과로 말미암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반독점법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거래나 상업을 제한하는 모든 계약은 무효
독점화 시도 금지
독점으로 피해를 입은 기업은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상원의원 존 셔면, 기업의 독과점을 막다

존 셔먼(John Sherman) - 출처 : 위키피디아

반독점법이 만들어진 계기는 무엇일까요? 우선 미국의 기업 정책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해야겠네요. 역사적으로 미국의 기업 정책은 레세페르(‘내버려두라’라는 프랑스 말)로 대표됩니다. 국가가 개인의 이익을 통제해선 안 된다는 애덤 스미스의 경제이론에서 나온 말입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무한경쟁주의 쯤으로 이해하시면 되겠네요.

레세페르가 옳다고 생각한 미국 정부는 개인과 개인, 회사와 회사의 경쟁(선의든, 혹은 그 다른 의도이든)을 방관합니다. 우리가 사회 시간이나 역사, 경제 시간에 배운 이른바 야경국가로서의 역할만 수앵한 것이죠.

근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독과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죠. 자본이 많은 기업이 상대적으로 자본이 적은 경쟁사를 무너뜨리기 위해 가격을 낮추는 식으로 악의적 경쟁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돈이 많은 기업이 승리를 거두면 그때 제품의 가격을 확 높여서 폭리를 취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오하이오 주 출신 상원의원 존 셔먼(John Sherman)은 법안을 제출합니다. '셔먼 반독점법'이 등장하는 순간이죠. 셔먼의 법안 제출에 대해 많은 기업이 반론을 제기했습니다만, 셔먼은 다음과 같이 답해 반론을 잠재웠다고 합니다.

"정치체제로서 군주를 원하지 않듯, 경제체제로서 독점을 원하지 않는다"


존 셔먼에 의해  반독점법이 만들어지긴 했지만 그 당시로서는 그렇게 큰 효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내용이 모호한데다 기업의 로비와 편법 탓으로 거의 사문화되었던 것이죠. 점차 효력을 잃어는 듯했던 반독점법은 어떠한 계기로 부활하게 됩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반독점법을 부활시키다

과연 반독점법은 어떻게 다시 부활하게 되었을까요. 여기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이죠.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 출처 : 위키피디아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는 미국의 제 26대 대통령으로 1901년에서 1909년까지 약 8년 동안 재임했습니다. 24세에 젊은 나이에 뉴욕 주의원이 되었고, 37세에는 뉴욕 경찰청장이 됩니다. 루스벨트를 뉴욕 경찰청에 임명한 이는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인데요, 그는 자신이 민주당임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인 시어도 루스벨트를 뉴욕 경찰청장에 임명했다고 합니다. 이후 루스벨트는 1898년 쿠바에서 벌어진 미국-스페인 전쟁에 쿠바 민병대를 이끌고 참전해 케틀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기도 했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고 19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윌리엄 매킨리와 더불어 당선되어 부통령이 됩니다. 하지만 1901년 윌리엄 매킨리가 암살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대통령직을 물려받습니다.

42세라는 젊은 나이(미국 역대 최연소 대통령)로 대통령이 된 시어도어 루스벨트. 그가 대통령이 되어 한 일은 셔먼 반독점법의 부활이었습니다. 당시 트러스트(동일산업 부문에서의 자본의 결합을 축(軸)으로 한 독점적 기업결합. 즉 경쟁자를 사라지게 하기 위해 같은 업종의 기업을 합병하여 독점하는 방식)를 통해 독과점을 형성해 나갔던 굴지의 대기업들, 즉 J.P. 모건, US스틸, 스탠더드 오일 같은 거대 기업을 견제합니다. 또한 그는 당시 국내적으로 어려웠던 경제, 노동 문제에도 힘을 써서 대중의 인기를 얻어 1904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합니다.
(공화당 출신인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반독점법을 옹호했다는 점에 대해서 의아하게 여기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반독점법으로 대기업을 견제한 이유는 미국에 사회주의가 뿌리내리지 않게 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하는군요.)

왼쪽 : 독점 기업가들과 싸우는 시어도어 루스벨트(풍자화), 오른쪽 : 트러스트로 많은 기업을 손에 넣은 록펠러(풍자화) - 출처 : 위키피디아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 석유재벌 스탠더드 오일을 무너뜨리다

왼쪽부터 :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Ida M. Tarbell), 헨리 H. 로저스(Henry Huttleston Rogers)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활약에 힘입어 반독점법이 부활하자 대기업를 견제하는 법으로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결국 반독점법은 대기업 견제를 넘어서 거대한 재벌을 해체하는 성과를 냅니다. 미국 석유의 95퍼센트를 독점한 존 D.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을 해체한 쾌거가 바로 그것이죠.

앞서 말씀드렸던 것과 같이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 미주리 주에서 정유한 석유의 95퍼센트를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업 규머에 이르기까지 록펠러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스탠더드 오일을 키웠습니다. 당시 석유를 운반하는 철도회사에 압력을 가해 석유 운반 운임을 협상하고 돌려받는 방식으로 이익을 챙기기도 했습니다. 이런 리베이트 건으로 말미암아 스탠더드 오일의 경쟁사들은 엄청난 불이익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나의 타개책으로 경쟁사들은 송유관을 설치해서 불이익을 감소해보려 했으나 이 또한 록펠러의 로비 활동으로 힘들어졌습니다. 휘청거리는 경쟁사를 록펠러는 앞서 이야기한 '트러스트'라는 방식으로 하나하나 무너뜨렸고, 정유업계에서 스탠더드 오일은 거대 독점재벌이 된 것이죠.

스탠더드 오일의 석유업계 독점은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는데요, 그 가운데 특출난 한 여성이 스탠더드 오일의 독점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섭니다. 그 여성이 바로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Ida M. Tarbell)입니다.

McClure 매거진 - 출처 : 위키피디아

매클루어 매거진

아이다 타벨은 선생님이자 작가, 그리고 저널리스트로 활동했습니다. 그녀는 1900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를 조수 존 시덜과 함께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헨리 H. 로저스(Henry Huttleston Rogers)와 첫 인터뷰를 갖게 되는데요, 그는 스탠더드 오일의 중역으로 미국 재계의 거물이기도 했습니다.

이 인터뷰는 큰 파장을 일으킵니다. 인터뷰 중에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거든요. 헨리 H. 로저스의 인터뷰에서 스탠더드 오일의 비즈니스 관행-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이 밝혀지게 된 것이죠. 이 내용은 당시 매클루어 매거진이라는 잡지에 1902년부터 1904년까지 총 19회에 걸쳐 연재되었고,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 매클루어 매거진 에 실린 그녀의 기사는 1904년스탠더드 오일의 역사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기도 합니다.)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제야 소송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그 소송은 5년여 정도 진행되었고 결국 1911년 연방대법원의 결정으로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는 수십 개의 회사로 해체되고 맙니다. 반독점법이 승리한 것이죠.

현재의 반독점법

반독점법은 1913년 클레이턴법과 연방거래위원회법이 제정되면서 독점에 대한 규제를 더욱 가다듬습니다. 그리고 현재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합니다. 반독점법은 커다란 기업의 독점을 막기 위해 사용되고 있어서 가끔 TV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등이 반독점법으로 몸살을 앓기도 하죠.

한국 기업도 마찬가지 입니다. 많은 나라에서 반독점법을 강화해 자국의 기업을 보호하고 해외 기업들을 규제하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은 EU와 FTA를 체결했고 머지않아 미국과 FTA를 체결할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과연 여기서 반독점법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두고봐야 할 것 같습니다.

* P.S. 말하지 못한 이야기
-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별명은 테디라고 합니다(자신은 부정했다고 하네요).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곰 사냥을 나갔는데요, 새끼 곰을 발견하곤 그냥 놓아주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뉴욕의 장난감 가게 주인이 곰 인형에 테디라는 이름을 붙여서 팔았는데요, 그것이 테디 베어의 유래라고 합니다.
- 헨리 H. 로저스는 허클베리 핀, 톰소여의 모험 등을 쓴 마크 트웨인의 절친이었다고 합니다. 마크 트웨인은 자신의 모든 자산의 관리를 헨리  H. 로저스에게 맡겼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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