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근혜 정부 시절의 적폐가 하나하나 드러나는 가운데 우리나라 현대사의 가장 큰 적폐라고도 할 수 있을 전두환의 5.18 관련 범죄도 차례차례 밝혀지고 있습니다. 지난 21일 SBS 뉴스에서는 지난 37년 동안 기무사에 감춰져 있던 5.18 민주화운동 사진첩 중 일부가 공개되었습니다.


출처 - SBS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민주화운동 가담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증거물로 찍거나 모은 사진이라고 합니다. 전남대 복학생으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주모자로 몰렸던 정동년 전 광주 남구청장과 홍남순 변호사, 정상용 전 국회의원 등이 수의를 입고 있는 모습 등이 담겨 있습니다. 5.18 직후 광주 상무대에서 열린 군사재판 장면입니다. 당시를 회상한 사람들에 의하면 군사재판의 공포 분위기로 변호사가 변호를 할 수 없었고 내란 혐의 판결을 해야 했던 재판부 가운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린 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진첩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주범으로 지목한 이른바 내란 범죄 개요도도 실려 있었습니다. 군사 독재 정권이 5.18을 내란으로 폄훼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고자 했던 사진들이 이제는 오히려 당시 시대의 억울함을 드러내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출처 - 광주일보


이와 함께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수많은 시민을 학살한 대표적 사건이었던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현장 명령자는 중령이었던 조창구 제11공수부대 63대대장이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1995년 작성된 서울지방검찰청과 국방부 검찰부의 5.18 관련 사건 수사결과 문서에 따르면 조창구가 대대장 지프에 보관하던 실탄을 중대장들에게 지급하고 위급 시 사용하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즉 자위권 발동 지시가 하달되고 실탄이 지급되었다는 것은 발포 허가가 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조창구는 이후 화랑무공훈장을 받았지만 2006년 서훈이 취소된 바 있죠. 이에 앞서 20일 밤 광주역 3공수 집단발포 명령자는 최세창 3공수 여단장이었습니다.


출처 – JTBC


여기에 더해 전두환 정권과 뒤이은 노태우 정권은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각종 자료를 뜯어고쳤습니다. 특히 1988년 청문회를 앞두고 당시 보안사는 511분석반을 설치하고 철저히 은폐공작에 나섰습니다. 511분석반은 발포명령자, 대량살상무기 사용, 사망자 수까지 은폐 왜곡하기 위해 각종 지시를 내린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1988년 국회 청문회와 1995년 검찰 조사, 2007년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 조사 때 511분석반에 의해 조작된 자료가 제출된 바 있습니다. 

 

최세창 3공수여단장이 최초 사격에 관여했고 발포 통제를 한 사살이 그 당시에 밝혀졌더라면 직속상관인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이 신군부 핵심 세력으로 5.18 당시 헬기까지 타고 광주와 서울을 오가며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과 수시로 접촉한 정황으로 볼 때 최종 발포 명령자 규명이 가능할 수도 있었음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출처 – 뉴시스


늦긴 했으나 양심선언을 하는 군인과 경찰들의 증언이 이제라도 나오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5.18기념재단은 지난 21일 광주 북구 문흥동 옛 교도소 일원에서 3공수여단 11대대 부대대장 출신인 신순용 전 소령으로부터 5.18 당시 광주교도소에서 민간인 희생자 암매장에 관여했다는 진술을 청취했습니다. 또한 사병으로 복무한 유모 씨 등 추가 제보자가 제시한 암매장 의심 지역들도 나왔다고 합니다. 이날 신 소령은 옛 교도소를 찾아 암매장 추정지를 지목했습니다. 호남고속도로와 인접한 옛 교도소 서쪽 담장 주변으로 5.18 이후 폐수처리시설이 증축된 곳입니다.

 

군 기록에 따르면 민간인 27~28명이 5.18 당시 옛 교도소 일원에서 숨졌는데 민주화운동이 끝나고 임시매장된 형태로 찾은 시신은 11구에 불과했습니다. 지난 8일 유해 발굴 작업으로 암매장 추정지에서 배관 8개가 잇따라 발견되면서 암매장 시신의 자취를 찾고 있습니다만, 1980년 이후 통신 배관과 상하수도 배관 등등 4번가량 이곳에서 공사가 진행된 것으로 보아 유해의 흔적이 이미 훼손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땅속에 묻힌 진실을 찾아내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출처 - 경향신문


한편 5.18과 관련해 경찰이 당시 현장 경찰관들의 증언과 기록을 토대로 처음 입장을 냈습니다. 광주 치안에 문제가 없었음에도 계엄군의 과격 진압과 발포가 이뤄졌고, 이를 왜곡하기 위해 경찰 내부 문서까지 조작했다는 겁니다. 5.18 직후 보안사에서 보존한 전남 경찰국 치안일지에는 군부의 주장처럼 시민들이 먼저 나주 경찰지서에서 총기를 탈취하고 장갑차도 빼앗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나주 남평지서 경무과장의 감찰 진술서에는 집단 발포 이후 30분이 지나고 나서야 시민들이 몰려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신군부가 먼저 시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시민들이 자위권을 행사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한 경찰은 당시 현장에 동원되었던 기동대원들이 휴식을 취하고 심지어 야유회를 갈 만큼 치안에 문제가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북한군이 개입했다거나 시민군이 약탈과 강도를 하는 무법천지였다는 보도는 신군부에 의한 왜곡된 발표였음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진 것입니다. 경찰은 계엄군의 과격 진압을 제지하지 못하고 그동안 침묵해온 것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출처 - SBS


이제 남은 것은 전두환을 비롯한 군부독재의 잔당들과 아직도 적폐를 끌어안고 놓지 못하는 우리나라 군의 현실입니다. 우리나라의 꼬인 현대사를 푸는 것은 5.18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출처 - 경향신문

 

국가의 폭력에 의해 더는 억울한 죽음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5.18의 진실을 캐내기 위한 관심과 행동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매년 돌아오는 호국 보훈의 달 6월, 모처럼 제대로 된 현충일 추념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현충일 추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곁을, 이전 정권에 늘 앉아 있던 4부 요인들 대신 원래 그 자리에 앉아 마땅한 분들이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목함 지뢰 사건으로 발을 잃은 김정원, 하재헌 중사를 비롯해 국가유공자인 박용규 씨와 아들 박종철 씨가 그 주인공들입니다. 목함 지뢰 사건으로 부상한 개개인에게 돌아갔어야 할 돈을 빼돌려 흉물스러운 발 동상을 세웠던 지난 박근혜 정부와 달리 '사람이 먼저'인 상식적인 대우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되어 다행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은 현충일 추념사를 통해 "애국의 역사를 통치에 이용한 불행한 과거를 반복하지 않겠"다면서 "전쟁의 후유증을 치유하기보다 전쟁의 경험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던 이념의 정치, 편가르기 정치를 청산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아울러 문재인 대통령은 애국, 정의, 원칙, 정직이 보상받는 나라를 만들어가자고 이야기하며 국회가 동의해준다면 국가보훈처의 위상부터 강화해 장관급 기구로 격상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국가유공자와 보훈대상자, 그 가족이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겠다면서 말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이제 한 걸음 더 나가겠습니다. 국회가 동의해 준다면, 국가보훈처의 위상부터 강화하겠습니다. 장관급 기구로 격상하겠습니다. 국가유공자와 보훈대상자, 그 가족이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가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면 보상받고 반역자는 심판받는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국민이 애국심을 바칠 수 있는, 나라다운 나라입니다.

 

애국이 보상받고, 정의가 보상받고, 원칙이 보상받고, 정직이 보상받는 나라를 다함께 만들어 나갑시다. 개인과 기업의 성공이 동시에 애국의 길이 되는 정정당당한 나라를 다함께 만들어 나갑시다.

 

'국가보훈처' 하면 지난 8년간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막은 이상한 정부 기구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으실 텐데요, 그건 이명박근혜 정권을 거치며 상식 없는 극우 인사를 보훈처장에 앉히는 등 기구 자체가 망가져서 그렇습니다. 국가보훈처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참여정부 때 장관급 기구로 격상한 바 있죠. 하지만 이명박 정권 때 차관급으로 격하하여 박근혜 정권에서도 그 상태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런 주제에 이명박근혜 정권이 안보와 보훈을 얘기했으니 우습지 않습니까?

 

이번에 보훈처를 제대로 되돌려놓자는 의미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다시 장관급 기구로 격상하자는 말을 꺼냈습니다. 최초의 여성 헬리콥터 파일럿이자 진보 성향의 예비역 여군 중령인 피우진을 신임 국가보훈처장에 임명한 것도 그런 의도로 파악됩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일입니다만 국가 유공자들을 나라가 책임지겠다는 뜻이니까요.


출처 - 노컷뉴스


이런 과정은 정상 국가로 재편되는 좋은 일이지만 그간 쌓인 군 관련 적폐는 제대로 청산해야 합니다. 사드 부지 환경 평가를 원점에서 다시 하게 되어, 국방부가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 뒤통수까지 쳐가며 강행하려던 사드 추가 배치가 사실상 내년으로 넘어갔습니다. 국방부와 군피아들이 자초한 일이죠. 사소한 군납 비리부터 국가 안위를 뒤흔드는 거대한 비리까지, 그간 '생계형 비리'라는 터무니없는 말로 국민 혈세를 후안무치하게 빼먹은 군피아들은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 것입니다.


출처 - 경향신문


이와 더불어 그동안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부분에 대해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국립 현충원 안장에 관한 것인데요, 현충원은 초등학생도 알다시피 국가와 사회를 위해 희생하고 공헌한 분들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곳입니다. 하지만 현충원에도 청산해야 할 적폐가 있습니다. 호국영령과 순국선열을 모시기 위한 현충원에 친일파와 민간인 학살, 군사독재 부역자와 관련자들이 함께 묻혀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 경향신문

 

현충원이 한국의 야스쿠니 신사도 아니고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싶으시겠지만 현실이 그렇습니다. 3.1 운동 정신과 4.19 혁명 정신을 우리나라 정통성의 양대 기둥으로 삼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을 생각해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 아닙니까? 애초에 현충원 안장 기준부터 이상합니다. 아무리 나쁜 짓을 많이 하고 독재자라도 대통령, 장관을 역임하면 그냥 현충 시설에 안장됩니다.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내용을 한번 살펴볼까요?

 

제5조 (국립묘지별 안장 대상자) 
 ①국립묘지에는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른 사람의 유골이나 시신을 안장한다. 다만, 유족이 국립묘지 안장을 원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1. 국립서울현충원 및 국립대전현충원
가. 대통령·국회의장·대법원장 또는 헌법재판소장의 직에 있었던 사람과 「국가장법」 제2조에 따라 국가장으로 장례된 사람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은 국립묘지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국가나 사회를 위하여 희생·공헌한 사람이 사망한 후 그를 안장(安葬)하고 그 충의(忠義)와 위훈(偉勳)의 정신을 기리며 선양(宣揚)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만, 위 내용대로라면 대한민국의 가치 구현을 위해 기려야 할 분을 모시는 게 아니라 생전에 성공한 사람을 자동으로 모시는 개념에 가깝습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던 어처구니없는 판결처럼 말입니다. 


현재 현충원 안에는 민간인 학살자나 군사독재 부역자, 관련자를 제외하고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사람만 해도 72명이나 됩니다. 여기에 독재나 부정부패 같은 여러 독직 사건을 더하면 100명도 넘어가게 생겼습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대표적으로 수년간 시민단체가 이장을 요구한 대전 현충원의 김창룡 준장이 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의 배후 인물로 지목된 사람인데, 공교롭게도 대전 현충원은 백범 김구 선생과 그의 모친, 아들이 안장된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김구 선생을 두 번 죽이고 있었던 셈입니다.


극우 테러 집단의 대명사로 제주 4.3 사건을 일으킨 서북청년단을 이끈 문봉제도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민간인을 대량 학살한 테러 집단의 장이 단지 이승만의 충견이었다는 이유로 현충원에 있는 겁니다. 전두환의 경우 군사독재와 광주 학살의 장본인이지만 전직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란죄 판결로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하여 그 자격을 잃었죠.

 

그 이후 형을 사면받았는데 이런 경우 어떻게 되는 건지 명확한 기준이 없는 상황입니다.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제5조 제4항을 보면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는 기준이 있긴 합니다만 전두환 같은 사례가 있으므로 더 구체적인 내용을 추가해야 할 듯합니다. 지금대로라면 자서전에서 자신이 피해자라고 밝힌 전두환이 현충원에 묻히겠다고 주장할 경우 명확하게 반박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생깁니다. 애초에 만주군관학교 출신인 박정희가 제일 양지바른 곳에 묻혀 있다는 것부터가 문제입니다만.

출처 - 오마이뉴스


현충원 안장에 관련된 법과 제도를 정비하여 대한민국 헌법정신과 시민정신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퇴출함이 마땅합니다. 앞으로는 단순 직책에 따른 안장이 아닌 국가와 공동체에 실제로 공헌하고 희생된 사람들이 안장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민간인 학살이나 독재 같은 중죄를 지은 것이 밝혀질 경우 현충원에서 다른 곳으로 강제 이장할 수 있도록 하는 근거를 마련해야 할 듯합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우리는 광복절이 돌아올 때마다 총리나 국방장관 자격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일본 정치인들을 지탄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현충일이면 매년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 요인, 시민단체들이 기리는 대한민국 현충원에 친일파와 독재자, 학살자들이 합사되어 있다는 건 참으로 모욕적인 일 아니겠습니까? 하루빨리 현충 시설에 관한 법과 제도의 정비가 이뤄지길 기대합니다.

국정농단에 이어 국기문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대통령이 바뀌어 사회 이슈에 신경 좀 끄고 살겠구나 하는 분이 많이 계셨을 텐테요, 적폐 세력의 발악이 참으로 끈질깁니다. 이번에는 특히 군이 나서서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뒷통수를 친 셈이라 국기문란이란 말 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국가안보실장인 김관진과 국방부가 짜고 사드 도입 대수와 배치 현황을 대놓고 속였기 때문이지요.


출처 - 연합뉴스


지난 4월 25일 낮까지 국방부는 사드 추가 반입이 없다고 국정기획위에 공식적으로 보고했으나 그날 밤 10시 사드 발사대를 몰래 이동시키다 언론에 틀켜 26일 새벽 사드 2기 알박기에 들어갔죠. 박근혜 탄핵으로 궐위 상태이던 때여서 국방부의 단독 행동이 지나치다는 말이 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YTN이 사드 4기가 벌써 들어와 있는 것 아니냐고 질문하자 국방부는 아니라고 답한 바 있습니다.


출처 - 세계일보


5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후 인수위가 없었다고는 하나 국가안보실장 김관진은 그 직책에도 불구하고 5월 14일 북한 미사일 발사 상황 보고를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황교안 국무총리는 사표를 던졌고 박근혜 정부와 청와대는 국정운영과 관계된 자료를 넘겨주기는커녕 모든 자료를 파쇄하고 튀어버린 상황이었죠. 국민투표로 선출된 대통령은 국민의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존재이자 대한민국 군의 최고 통수권자입니다. 당연히 전 정권에서 문제가 된 북핵과 사드 관련 보고를 빠짐없이 받을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와 청와대의 외교안보팀은 김관진 안보실장으로부터 북핵과 사드에 대한 현안 보고나 관련 자료를 넘겨받지 못했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김관진의 후임으로 임명된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지난 21일 임명되었으나 김관진 실장은 인수인계를 제대로 하지 않고 사드도 2기밖에 없다고 보고서에 적습니다. 4일 후 열린 국정기획자문위원회에서 국방부도 사드를 2기 들여왔다고 거짓 보고를 합니다. 4기가 들어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추정일 뿐이며 YTN의 보도가 있었지만 공식 확인된 바 없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모든 것이 그랬듯 아니라고 하면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 일상적이었습니다. 

 

성주에 알박기한 사드 발사대 2기도 절차상의 문제로 철수가 공론화되는 마당에 국방부는 비밀리에 4기의 발사대를 이미 국내에 추가 반입한 상태였던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문재인 대통령이 한민구 국방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을 하고서야 알게 되었다는 게 매우 충격적입니다. 사드는 국방부에서 북한에 대항하는 무기로 도입한 까닭에 초미의 관심사였고, 동북아 질서와 경제적으로는 사드 보복이란 말이 등장할 정도로 국가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문제이지 않았습니까? 그런 무기의 존재를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자신의 부하에게 전화로 직접 확인한 뒤에야 알게 되었다는 건 정말 황당한 상황이 아닙니까? 시쳇말로 '당나라 군대'도 아니고 말이죠.


출처 - 연합뉴스


우선 국방부가 발사대 4기를 반입하고서 보고하지 않은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공식 업무보고 문서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국방부의 국정기획위 업무보고에서 관련 보고가 없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드 정도 되는 무기의 존재를 회의에서 공식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국방부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고의로 보고를 누락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박근혜 정부의 요직을 차지했던 황교안 국무총리와 김관진 국가안보실장, 한민구 국방부 장관 등이 모의하지 않았다면 가능할 리 없는 일이죠.

 

출처 - 경향신문

 

이번 사드 보고 누락은 시민 사회의 논리까지 갈 것도 없이 그동안 누누이 군이 강조했던 자체 논리로 봐도 큰 문제입니다. 국방부가 그렇게나 싫어하는 상관에 대한 항명이자 명령불복종 아닙니까? 더구나 전황을 좌우할 무기를 대통령 모르게 반입했다는 건 내란죄에 해당할 수 있는 초유의 일이죠. 군과 극우 세력이 늘 강조하는 말버릇처럼 우리나라는 종전이 아닌 휴전 상태에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식으로라면 국방부를 해체할 만한 일대 사건 아니겠습니까?


출처 – 민중의 소리


이런 국방부와 군피아의 행태에 분노한 문재인 대통령은 이를 국기문란 사태로 인식하고 발사대 4기 반입 경위와 누가 반입을 결정했는지 정부 보고를 누락한 경위 등을 진상조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번 사태가 국방부의 고의 누락으로 드러날 경우 군 내부의 적폐 인력 청산과 함께 국방개혁에 탄력이 붙을 겁니다. 

 

박근혜 정부 당시 사드배치 업무를 진두지휘한 김관진부터 그의 지시를 신속히 이행한 한민구 국방부 장관, 국방부 국방정책실, 대미 관련 부서 등이 주요 타깃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새로운 국방부 장관이 임명된 후 곧 단행될 대장급 인사 등 군 수뇌부 인사 구도를 송두리째 바꿔놓을 핵폭탄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옵니다. 참여정부 때 '국방개혁 2020'에 저항했던 육군 중심의 문화가 여전히 뿌리내리고 있는 국방부에 전방위 수술이 불가피해졌음을 국방부 스스로 드러낸 꼴입니다.

 

박정희 군사독재를 경험하고, 독재자의 딸이 바로 전임 대통령인 시기를 겪은 우리로서는 군의 월권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더구나 국민의 절반 정도가 군에 복무해야 하는 징병제 국가이기 때문에 군의 비리가 얼마나 심각한 안보 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염삼 전 대통령이 하나회를 숙청했듯 문민 통제가 살아 있음을 이 기회에 추상같이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군 최고 통수권자로서 군의 올바른 명령 체계를 확립하는 길이기도 할 테니까요. 박근혜의 국정농단이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듯, 이번 국방부의 국기문란이 엄정한 군 개혁의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곧 광복절을 맞이합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대한민국은 독립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죠.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에서 벗어난 날과 독립국으로 정부가 수립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매년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 하고 국경일로 지정했습니다. 

광복절의 '광복(光復)'은 '빛을 되찾다'는 뜻으로 잃었던 국권의 회복을 뜻합니다. 1930년 3월 1일을 기념하여 소설가로 알려진 심훈이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를 썼는데요, 조국의 광복을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三角山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鐘路의 인경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져 산산散散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듯 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처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行列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오이다.

출처: 《한국대표시선》, 참한문화사, 1983년/ (원서:《그날이 오면》,漢城圖書株式會社, 1949년)

1901년에 태어난 심훈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되어 퇴학당했습니다. 그런 그였기에 <그날이 오면> “종로鐘路의 인경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오리다/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져 산산散散조각이 나도/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이라는 구절에서 민족의 해방을 갈망하는 심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토록 원하던 ‘그날’은 그가 죽은 지 9년 후에 도래합니다. 

하지만 그토록 염원하던 해방을 온전히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내지 못했기에 뼈아픈 역사의 길로 이어지고 맙니다. 해방 후 좌우의 사상대립, 동족끼리 총칼을 겨눠야 했던 한국전쟁,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성취하기까지 흘린 국민의 피... 이 모든 것이 따지고 보면 친일인사를 확실하게 처리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지 못하면 역사는 그대로 반복된다고 하지요. 해방 이후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한 채 1965년 6월 22일 도쿄에서 맺은 ‘한일기본조약’은 지금까지 일본의 침략 사실 인정과 가해 사실에 대한 진정한 사죄, 청구권문제, 어업문제, 문화재반환문제 등을 가로막는 지나치게 친일적이고 굴욕적인 조약이었습니다. 

문학계도 친일논란에서 비켜갈 수 없습니다. 일제 때 학도병 자원을 독려하는 내용의 시를 썼던 모윤숙은 이승만 정권에서는 외교관으로, 박정희 정권에서는 공화당 국회의원으로 살았습니다. 대표적인 친일 시인으로 알려진 서정주는 훗날 전두환을 찬양하는 시를 썼습니다. 이처럼 친일 인사는 사회 기득권과 연결되어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대를 이어 권세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친일 문학인 31명의 작품은 여전히 교과서에 실려 있기도 합니다. 글만 잘 쓰면 반민족 행위인 친일을 했더라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어이없는 선례로 남아 대한민국의 역사의식을 흐리고 있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 중 친일문학인 31명>

김기진(金基鎭) 김동인(金東仁) 김동환(金東煥) 김문집(金文輯) 김억(金億) 김용제(金龍濟) 김종한(金鍾漢) 노천명(盧天命) 모윤숙(毛允淑) 박영희(朴英熙) 백세철(白世哲) 서정주(徐廷柱) 유진오(兪鎭午) 윤두헌(尹斗憲) 이광수(李光洙) 이무영(李無影) 이석훈(李錫(水+熏)) 이찬(李燦) 임학수(林學洙) 장덕조(張德祚) 장은중(張恩重) 정비석(鄭飛石) 정인섭(鄭寅燮) 정인택(鄭人澤) 조용만(趙容萬) 조우식(趙宇植) 주영섭(朱永燮) 주요한(朱耀翰) 채만식(蔡萬植) 최재서(崔載瑞) 최정희(崔貞熙)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우선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변화의 움직임을 보여야 합니다. 작가 심훈은 그런 점에서 삶 가운데 온 힘을 다한 예술인이었습니다. 영화에서, 소설에서, 시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친일의 도구로 사용했던 여느 예술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태도였습니다. 특히 그가 쓴 대표적인 장편소설인 <상록수>는 1935년 동아일보사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되어 그해 9월 10일~1936년 2월 15일까지 신문에 연재되었습니다. 그는 《동아일보》에서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으며 <상록수>를 영화화하려고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심훈의 <상록수>는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한 젊은이들의 강한 저항의식과 휴머니즘이 그 기저에 깔려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농촌계몽운동은 러시아의 브나로드운동에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민중 속으로’라는 뜻의 ‘브나로드’는 말기 러시아 지식인들이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면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로 만든 구호입니다. 1874년에 많은 러시아 학생이 농촌으로 가서 계몽운동을 벌였는데, 이 계몽운동을 브나로드운동이라고 합니다. 이 운동은 국내에서 농촌계몽운동으로 발전해 1920년대 초 서울의 학생과 문화단체, 일본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담은 작품 <상록수>는 리얼리즘 농촌문학을 여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일제의 억압으로 신음하는 민중을 깨우치는 역할을 잘 담고 있습니다. 심훈은 충청남도 당진으로 내려가 살면서 <상록수>를 집필했는데요, 이런 농촌의 경험이 작품 활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를 실천적 지식인으로 살았던 심훈이 그토록 원하던 해방의 ‘그날’은 67년 전에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67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이 온전히 완성되지는 않은 듯합니다.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고 친일, 반민족주의자에 대한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그날은 오지 않을까요? 많은 국민의 바람인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완성되는 ‘그날’이 하루속히 오기를 기대해봅니다.

심훈

본명은 심대섭이며 190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영화인으로 활동했다.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당하고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해 1921년 항저우(杭州) 치장대학(之江大學)에 입학했다. 1923년 귀국하여 연극, 영화, 소설 등에 몰두했다. 처음에는 영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17년 결혼한 왕족 이해영(李海暎)과 1924년 이혼했다. 1925년 번안한 소설 <장한몽(長恨夢)>이 영화화될 때 이수일(李守一)역으로 출연했고, 1926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일본에서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받은 뒤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 각색, 감독하여 제작했으며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성공했다. 식민지 현실을 다루었던 이 영화는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목이 말썽을 빚자 개작한 작품으로 영화제작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1932년 고향인 충청남도 당진으로 낙향하여 집필에 전념하다가 1936년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영화 <먼동이 틀 때>가 성공한 이후 그는 소설에 관심을 기울였다. 1930년 《조선일보》에 장편 <동방(東方)의 애인(愛人)>을 연재하다가 검열에 걸려 중단당했고, 이어 같은 신문에 <불사조(不死鳥)>를 연재하다가 다시 중단당했다. 같은 해 시 <그날이 오면>을 발표했는데 1932년 향리에서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간하려다 검열로 무산되고, 1949년 유고집으로 출간되었다. 두 번에 걸쳐 연재가 중단된 소설 <동방의 애인><불사조>와 애국 시 <그날이 오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는 강한 민족의식이 담겨 있다. <영원의 미소>는 가난한 인텔리 계급적 저항의식, 식민지 사회의 부조리, 귀농 의지가 잘 그려져 있다. 대표작인 <상록수>는 젊은이들의 희생적인 농촌사업을 통해 강한 휴머니즘과 저항의식을 담고 있다. 행동적이고 저항적인 지성인이 등장하는 그의 작품들에는 민족주의와 계급적 저항의식, 휴머니즘이 기본적으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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