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이은 씨가 [독립, 하셨습니까?] 원고를 보내왔습니다. 그간 60년 전 남장 아이돌과 열혈팬들의 삶을 담은 다큐 〈왕자가 된 소녀들〉의 스태프로 일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누굴 인터뷰했을지 궁금하시죠? 바로 소개하겠습니다. 


세상엔 남들보다 더 많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영화사 ‘꿈꾸는 오아시스’의 김효정 대표도 그런 부류(?)일 것이다. 평범한 삶에는 가슴이 뛰지 않으며 비록 현실이 모래바람일지라도 진짜 사막 걷는 것을 꿈꾸는 이들. 이들에게 삶이란 가로질러야 할 무언가이면서 가로지르는 일 자체이기도 하다. 사막에서 영화를 찍다가 진짜 사막을 가로지르는 사막 레이서가 되어버린 김효정 프로듀서는 그래서 오늘, 또 다른 꿈을 꾼다.

사막을 횡단하다

영화가 매력적인 이유는, 사람이 사람에게 들려주고 보여주는 이야기라는 점인 것 같다. ‘인터뷰도 사람과 이야기를 잇는 매개가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바람으로 이 일을 시작했고, 어느새 초심을 돌이켜볼 시점이 되었다. 인터뷰이를 고민하다가 리스트의 앞부분에 있었지만 소식이 알려지지 않은 김효정 프로듀서를 찾아 나섰다. 그가 남긴 책이자 이정표인 《나는 오늘도 사막을 꿈꾼다》를 들고서.

김효정은 ‘갈 데까지 가본 사람’이다. 2003년 모로코 사하라 사막을 시작으로 2005년 중국 고비, 2006년 칠레 아타카마, 2007년 이집트 사하라, 2008년 남극까지 세계 5대 사막 레이스에서 약 1000킬로미터를 완주했다. ‘그랜드슬래머’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서는 이 중 고비, 아타카마, 사하라, 남극을 지나야 한다. 아시아 여성으로는 최초, 세계를 통틀어도 세 번째로 타이틀을 획득한 여성이 바로 그다. 그것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영화 촬영과 촬영 사이 막간의 휴지기에 이룬 쾌거이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끝도 없는 사막과 평지, 능선이 펼쳐지는 사막 레이스. 가려도 가려도 온통 모래투성이가 되어버린다.

언뜻 보아도 스포츠 우먼과는 거리가 먼 듯한데 어떻게 사막 레이스에 도전할 생각을 다 했을까. 그는 시인이 되고 싶어 문예창작과에 진학했지만 고전영화 마니아들과 어울리며 점점 영화의 매력에 빠져들어 같은 대학 영화과로 재입학했다. 스물넷에 1999년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이었던 영화사(현 싸이더스)에 제작부 막내로 입사한 뒤로 쉼 없이 달리기만 했다. 2000년 모래바람을 맞으며 10개월간 영화 <무사> 촬영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40대 중반의 신한은행 박중헌 지점장이 사막 마라톤을 완주하는 모습을 TV를 통해 봤다. 스물다섯 청춘이 바닥부터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그로부터 3년 후, 김효정은 사하라 사막 마라톤 출발선에 섰다. 촬영 중 틈틈이 준비한 터라 뛰어서 완주할 체력도 없었지만, 전쟁터 같은 현장에서 늘 종종거린 탓에 뛸 마음도 없었다. 한낮의 태양과 밤의 적막함, 외로움과 동행하며 꼴찌 비슷한 성적으로 완주했을 때의 희열을 잊을 수 없어 그는 끊임없이 사막으로 자신을 내몰았다. 그러는 사이 <행복한 장의사> <킬리만자로> <무사> <결혼은, 미친 짓이다> <싱글즈> <역도산> <호로비츠를 위하여> 등의 영화 제작에 참여했고, 프로듀서로 권형진 감독의 <트럭> 등의 작품을 제작했다. 2008년 남극 마라톤까지 완주하고 나니 그랜드슬래머라는 영예와 함께 더 이룰 꿈이 없어졌다는 허무함이 찾아왔다.

"사막에서도 달리지 않고 열 시간 동안 같은 속도로 속보를 했어요. 처음엔 뒤로 처지지만 결국은 앞질러 뛰던 친구들보다 먼저 도착할 수도 있는 거죠. 처음엔 자아를 찾으려고 갔는데 두 번째부터는 주변 사람이 보이더라고요. 마음을 많이 키웠죠. 수업료치고 비쌌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대학생 때 배낭여행 붐이 불어도 저는 부모님께 손 벌리기 싫어서 해외여행도 안 갔어요. 그런데 사막 레이스를 하면서 근처의 대도시를 많이 경유했어요. 다섯 번 다녀오고 회사 그만두고 나서 쉴 겸 호주에 마지막 레이스를 하러 갔어요. 마음을 보듬어줄 수 있는 데가 사막이었거든요. 왜 또 왔지 싶다가도 되게 즐겁고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그러고 나니 돈도 떨어지고 이 돈이면 다른 걸 할 수 있다는 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해가 질 무렵, 꼴찌로 들어오는 참가자를 환영하기 위해 피니시 라인으로 향하는 레이서들. 사하라에서 만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란다.

남극 레이스에서 만난 펭귄. 보호 규정상 근접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영화로 세상에 말을 건네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숱한 이의 노동과 시간이 필요하지만, 스태프의 근로조건이 얼마나 열악한지는 화려한 스크린 뒤편에 가려져 있다. 제작부는 현장 통제와 세팅, 장소 헌팅과 섭외는 물론 청소까지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부서다. 제작부 신입(현장에선 '막내'라 부른다)으로 시작해서 제작부장, 실장을 거쳐야 프로듀서가 될 자격이 된다. 편당으로 계약하는 프리랜서는 참여 기한도 짧고 진급도 비교적 빠른 편이지만 김효정은 회사에 소속되어 있어서 꽤 많은 작품의 기획 단계부터 완성될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겪어냈다. 현장에서 시작한 덕분에 작품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눈을 갖게 됐다. 14년이란 시간이 지나는 동안 거의 없었던 여성 스태프의 수가 많이 늘었고, 마케터 출신이나 유학 다녀온 프로듀서가 많아지면서 현장에서만 배울 수 있었던 것들이 다소 경시되는 경향도 있다.    

"제작팀에 들어갈 때 여자 스태프가 드물었어요. 여자 선배가 절 처음 보자마자 중간에 관둘 거면 지금 그만두라면서 3~4년은 밤낮도 없고 사생활도 없을 텐데 괜찮겠냐고 묻더라고요. 사실 정말 힘들었어요. 제가 일을 제대로 못 하면 남에게 부담이 가니까 더 많이 일했던 것 같아요. 맨손으로 쓰레기 줍고 도시락 분리수거하고 잡다한 일까지 다 해요. 현장에서 하는 일이 대부분인데 성별 따져서 일 나누기도 그렇고, 무거운 거 들고 갈 때 남자 스태프들이 도와준다고 해도 마다하고 그랬어요. 남자들도 쉬이 그만두는 판에 제작이나 연출 파트 여성들은 남성적 성향이 많아야 견딜 수 있어요. 이제는 제 위치가 생기기도 했고 요즘 같으면 그렇게 하지 않겠죠. 피디도 남들보다 늦게 됐지만 차근차근 모든 단계를 경험한 것이 지금은 큰 자산이 됐어요."

처음에 한 번이라고 생각했던 사막행이 잦아지면서 점점 회사에 얘기하지 않고 다녀오게 됐다. 아무리 휴가 결재가 떨어졌다고 해도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경우, 반길 수만은 없는 부분이 있었고 그런 점이 신경 쓰여 일에 완벽을 기하려고 더욱 노력했을 터다. 영화라는 작업 자체가 계획한 일정에 맞춰 끝나기 힘든데다 개개인의 사정을 봐가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취미나 다른 일과 병행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꾸준히 체력훈련을 해야 하는 일을, 김효정은 자투리 시간만 이용해 해냈으니 대단한 성취일 수밖에. 그걸 아는 사람들은 경탄의 눈길로 바라봤을 테고 또 어떤 이들이 질시의 시선으로 보는 것도 당연했다.      

"남들 휴양지 갈 때 난 사막에 가는 것하고 다를 바가 없는 거죠. 저는 몸을 움직이는 게 행복하고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몸을 내몰았을 때 희열을 느껴요. 인생이 일과 사막, 두 가지뿐이었죠. 그러다 2009년에 회사를 그만두게 됐어요. 프로듀서로 데뷔해서 한 작품을 했는데 회사가 갑자기 어려워져서 희망퇴직처럼 나온 거예요. 독립할 요량이었으니 잘됐다 싶으면서도 불안했는데 책을 쓰면서 나름대로 극복한 것 같아요. 그동안 못 만난 친구들도 만나고 열심히 놀았어요. 그러면서 제 영화사도 차렸고요. 2년 정도 촬영한 다큐가 있는데 마무리하고, 올해 장편 상업영화를 제작할 계획이에요. 되어 봐야 아는 거긴 하지만."    

사막 레이스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아프리카'였다. 십 년간 영화를 찍어 번 돈의 절반은 사막에, 나머지 반은 아프리카 촬영에 쏟아부었다. 그 계기가 된 영화가 <데저트 플라워>(2009)였다. 아프리카 소말리아 사막의 가난한 유목민의 딸로 태어나 강제 결혼을 피해 고향에서 도망쳐 천신만고 끝에 세계적인 톱모델이 된 와리스 디리의 삶을 그린 이 영화는 그간 사막을 가로지르기만 했던 김효정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여성 할례란 여성 성기 절제술을 이르는 말로, 여성의 성기에서 성적으로 민감한 부분을 제거해 성적인 쾌감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아직도 널리 행해지고 있는 악습이다.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20~30퍼센트에 달하는 아이가 감염과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

전통할례를 치르고 있는 소녀들 (케냐 Olenguruone) -서민수
NGO 교육프로그램을 경청하는 여인들 (에티오피아 Gift)-서민수
2.6 할례 반대의 날(Anti-FGM Day) 거리캠페인 중인 학생들 (에티오피아 Addis ababa) -서민수

할례를 피해 도망온 아이들을 보호하는 캠프에서 만난 소녀의 뒷모습 (케냐 Kuria) -서민수

"한국 사람들이 할례도 잘 모르고 아프리카를 오지(奧地) 이미지로만 알고 있잖아요. 저도 사막을 그렇게 다녔는데 그곳 사람들의 삶을 전혀 몰랐더라고요. 가보면 다들 원조받은 브랜드 옷 입고 핸드폰 들고 다녀요. 아프리카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마사이족이 실제로는 제일 잘살아요. 저희는 현지인처럼 정말 가난하게 다녔어요. 싼 방에서 다 같이 자고, 현지 음식을 먹고 물만 사서 마시는 식으로. 할례를 피해서 도망쳐온 아이들을 만나려고 2010년 겨울하고 이듬해 겨울 두 번 다녀왔어요. 겨울방학이 우기라서 학교에 못 가기 때문에 그때 할례를 해요. 우리가 도와줄 건 없고 결국엔 아이들에게 교육할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이 중요하더라고요. 부모가 초등학교 중퇴니까 아이를 안 보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첫해에 하루도 안 빼고 촬영했는데 나중에 보니 쓸 게 없더라고요. 이듬해에는 할례를 피해 도망온 아이들을 돌보는 기숙학교에 한 달 있었어요. 철제 이층침대에 다 꺼진 스펀지를 깔고 아이들하고 같이 잤어요. 한 달쯤 지나서 돌아갈 때가 되니 그제야 마음을 조금 열더라고요."

아이들과 똑같이 먹고 자고 하다 보니 살이 빠졌다. 아침은 묽게 탄 짜이(밀크티 비슷한 차)와 마가린밥, 점심엔 팥 삶은 것만 먹는 약소한 식단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집보다 배불리 먹고 편히 지내서 그런지 얼굴에 윤기가 돌았다. 방학이 끝나면 집과 학교로 돌아가거나, 아예 집을 떠나야 하는 아이들. 딱히 해줄 것이 없어서 120명이나 되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뷰파인더에 담아 사진을 인화해주었다. 우리나라식으로 졸업사진을 찍어준 셈인데, 사진을 보며 아이들은 특별한 동기생과 한국에서 온 노란 피부의 언니들을 평생 떠올릴지도 모른다. 언젠가 영화가 완성되어 함께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사진 찍어서 잠깐 보여주고 마는 건 좀 아니잖아요. 카메라 두 대로 종일 찍고 인화해서 졸업날 개인 사진하고 단체 사진을 나눠줬어요. 아이들에게 안 입는 옷을 나눠주려고 수하물 무게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1인당 10킬로그램씩 챙겨갔어요. 우리는 옷을 두 벌만 가져가서 매일 빨아서 입고.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줄 수가 없잖아요. 언젠가 집 떠나 독립하려면 스스로 책임져야 하니까 돈 버는 일이 힘들다는 걸 가르쳐주고 싶어서 같이 옷을 팔았어요. 처음에는 잘 팔리니까 재밌어하더니 금세 지루해하더라고요. 남은 옷은 저희가 다른 장에 가져가서 팔았어요. 일주일 후에 옥수수가루랑 차, 비누 같은 생필품을 사줬어요. 한국에 돌아오니 후반작업 비용이 필요해서 기업 사회공헌 기금이나 단체 지원금을 주로 알아봤는데 할례가 거부감을 주는 소재라면서 나무 심기나 축구공 기증처럼 눈에 보이는 사업에 지원하겠대요. 저 같으면 생리대 판매수익이 아프리카 여성을 위해 쓰인다고 하면 살 것 같은데 말이에요. 잘 마무리해서 개봉하려고 해요."

이 다큐멘터리는 아마 상업적으로 크게 이득을 안겨주는 결과물은 아니겠지만, 그의 본업은 상업영화 프로듀서다. 더 많은 사람이 향유할 수 있는 대중영화라도 기왕이면 사람들의 마음에 조그만 행복이라도 안겨주는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바람이 있다. 짬짬이 강연이나 다른 책 작업을 하면서 영화 일에 힘쓰고 있다. 시간이 지나 어떻게 기억되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별다른 수식어 없이 '김효정'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오랫동안 다져온 꿈인 만큼 좋은 영화, 오래 회자할 만한 영화를 만들어내리라 기대한다. 꿈꾸고 노력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이루게 마련이니까. '꿈꾸는 오아시스'라는 영화사 이름을 곱씹을수록 그러하다.

"물론 오락영화도 좋고 그런 영화는 영화대로 보지만, 제가 만든 영화가 뭔가 사람들의 삶에 작용하길 바라요. 조금씩 퍼뜨려져서 전 세계가 행복해지면 좋겠다는 어찌 보면 막연한 꿈을 꾸는 거죠. 영화란 게 기획 기간이 길고 실 제작에 들어가야 펀딩이 되고 저도 인건비를 받을 수 있는데 그 과정이 너무 길죠. 대박이 나야 수익도 나는 거고. 남들은 신세가 좋은 줄 알겠지만 미치지 않으면 못 하는 일이에요. 영화 작업이 더뎌지면서 스트레스를 받지만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져요. 저는 꿈 얘기할 때가 가장 즐겁고 밤새는 줄도 몰라요. 직장 그만두고 나서 돈보다 자아를 찾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남들이 결혼하고 애 낳고 그런 건 안 부러운데,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는 친구들은 참 부러워요. 세상에 즐거운 일이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많은 걸요."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일전에 저희는  <사회적기업이란 무엇일까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기사에서 공정무역 커피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 뒤로 시간이 많이 흘렀고, 공정무역 커피를 즐기는 분도 많아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사회적기업' 혹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어떻게 커피산업과 연관되는지 더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스타벅스는 세계 40여 개국에 1만 6000여 개의 매장을 둔 세계적인 커피 체인입니다. 스타벅스의 최고경영자 하워드 슐츠는 “스타벅스는 커피를 파는 게 아니라 문화를 판다”는 말로 성공적인 마케팅전략을 설명하기도 했죠. 그런데 스타벅스가 세계 최대의 공정무역 인증 커피 구매업체 중 하나라는 사실,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스타벅스는 2012년 전체 원두 구매량의 8퍼센트에 해당하는 약 3430만 파운드의 공정무역 인증 원두를 구매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공정무역 커피를 구매한다고 해서 스타벅스를 좋은 기업이라고만 얘기할 수 있을까요?

작년 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공습했을 때 전 세계적으로 스타벅스 불매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스트벅스의 하워드 슐츠가 과격 시오니스트 중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졌고, 스타벅스 운영으로 거둔 수익의 상당액이 이스라엘 군수산업 강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정보가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커피를 둘러싼 사회, 문화, 정치적 상황이 참 기막힙니다. 세상 일이란 게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도 있기 마련이라지만, 우리가 무심코 마시는 커피 한 잔이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가는 도구로 활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깊이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독립, 하셨습니까?]를 연재하는 이은 씨가 지난 2월에 '커피 콘텐츠 기획자' 박우현 씨를 만났습니다. 원고를 지난 2월에 보내주었는데요, 3월에 나올 생각비행의 책을 마무리하는 시점과 겹쳐 제때 소개하지 못했습니다. 두루 양해를 구합니다. 찬찬히 읽어보시면 누군가의 커피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의 커피는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실 겁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커피를 드셨나요?


커피 라이터 박우현 씨가 말하는  
커피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밀려오듯 휩쓸고 지나고 있다. 이 땅에 커피산업이 번성하게 된 과정 말이다. 갑자기 에스프레소 전문점이 번성하고 목 좋은 번화가 길목마다 프랜차이즈 카페가 생겨나더니 급기야 동네 골목까지 카페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10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그러니 한국 사람들이 커피문화의 확산 속도를 근대화 과정만큼이나 재빠르다고 느껴도 놀랄 일이 아니다. 이 와중에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믹스커피 문화의 반대편에 있는 아라비카 커피 시장의 팽창과 공정무역 커피의 개발과 보급, 확산이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상품화된 공정무역 커피는 아름다운가게가 내놓은 ‘히말라야의 눈물(네팔산)’이었다. 당시 가게에서 활동하며 이 과정을 주도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박우현 씨다.

10년의 세월 동안 변한 것은 커피를 둘러싼 사회적 현상만이 아니다. 커피를 통해 그의 삶도 변했다. 박 씨는 시민단체 활동가 출신이 아니라 전업주부, 영화기획 프로듀서, 잡지사 기자, 회사원 등을 거쳐 공정무역 커피를 들여오는 일에 이르렀다. 그렇기에 폭넓은 시도와 변용이 가능했고, 지금과 같은 커피(에 관해 쓰는) 저술가, 그의 표현대로 ‘커피 콘텐츠 기획자’가 될 수 있었다.
 
커피에 관한 책이야 많이 접했지만, 그가 쓴 《커피는 원래 쓰다》가 여느 책과 다른 점은 일단 재미있다는 사실이다. 커피에 관한 문화인류학적 보고서 혹은 스토리텔링이 접목된 커피문화사랄까. 인류사에 커피가 등장한 지 추산하기론 약 1000년, 그다지 오랜 세월이 아닌데도 사료가 충분하지 않아 상상으로 그 틈새를 메워야 하기에 더욱 흥미롭다. 커피의 역사에 관한 자료가 왜 그토록 남아 있지 않은지 짐작할 만도 하다. 가장 합리적인 추론에 따르자면 커피는 (서구에서는) ‘이교도의 음료’였다. 음주를 금기시해 커피를 즐겨 마시던 이슬람 문화권에서 커피의 위상이란 독일의 맥주, 아시아의 차문화 사이 어딘가 혹은 그 둘을 더한 것만큼 일상적인 무엇이었을 터다.

커피의 등장, 생각의 발견
 
커피와 카페에 관한 책이야 근래 발에 채고도 남을 만큼 많이 나왔지만, 박우현 씨의 책이 돋보이는 점은 ‘스토리텔링’을 접목한 데 있다. 커피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야 가설이 많으니 아주 새롭지는 않다고 해도, 국내에서 가장 먼저 커피를 마신 사람으로 ‘정약용’을 추론한 것은 꽤 흥미롭다.
 
“커피에 관해 재미난 이야기가 많아요. 미국이 베트남전에 패망한 이유가 커피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어요. 인스턴트커피(나쁜 커피)로 찌들었던 미국이 전쟁에 지고 베트남에서 철수하던 시기, 비교적 양질의 커피를 표준화한 스타벅스가 창업한 사실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거예요. 《커피 견문록》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커피에 얽힌) 재미난 얘기가 많은데,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이 유배를 가는 바람에 즐겨 마시던 커피가 끊겨서 어렵게 구해 마셨다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도 지어서 썼어요.”
 
이렇듯 커피가 매력적인 까닭은 역사, 문화, 종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매우 다양한 텍스트로서 그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커피를 마시면 뇌 작용이 활발해져 생각이 깨어나게 된다는 것도 단지 우연만은 아니리라. 우연한 기회에 커피를 업으로 삼게 된 그가 이토록 매료된 것만 보아도 커피의 치명적 매력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2005년경, 프리랜서로 영화 일을 하며 이래저래 생겨나던 카페들을 떠돌며 일하던 그에게 생경한 제의가 들어왔다. 아름다운가게에서 ‘별난사업국’이란 이름의 새로운 팀을 만드는데 함께하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여기에는 당시 박원순 변호사의 진두지휘 아래 성장을 거듭하던 아름다운가게가 새로운 아이템으로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혁신적인 방식과 구성으로 팀을 꾸리려 한 배경이 있었다. 이 사업국의 아이템으로 최종 선정된 것이 재활용사업(에코파티 메아리 등 재활용 디자이너 브랜드 론칭)과 공정무역 커피 론칭 사업이었다.

“당시 한국 시장은 아라비카 시장도 미미하고 로스터리 카페가 막 생겨나는 시점이었어요. 시장이 너무 작아서 공정무역과 아라비카를 동시에 알리는 게 힘들었어요. ‘네팔리바자로’라고 네팔만 도와주는 일본 엔지오에서 네팔 원두를 어렵게 구했어요. 1년에 10톤을 재배하는데 판로가 없어서 절반을 버린다고 하더군요. 도와달라고 요청했더니 생산자가 흔쾌히 한국까지 와서 도와주고, 전광수 선생도 재능기부를 해주셨어요. 처음에는 직접 원두를 볶다가 물량이 달리니까 공장에 로스팅 시스템을 만들어주셨어요.”
 
세계적으로 아라비카 커피가 90퍼센트 정도 통용되고 있지만, 정작 ‘공정무역’이라는 공인된 시스템에 속한 커피의 수급량은 미미했다. 아름다운가게는 애초 대량생산에 적합하지 않은 공정무역 원두를 브랜드로 양산하는 것은 물론 공정무역 커피믹스를 만드는 데도 성공했다. 우여곡절 끝에 네팔 공정무역 커피가 탄생했을 때 시장의 반응은 생각보다 빨랐다. ‘착한 소비’를 내세우는 마케팅을 등에 업고 대형마트와 편의점까지 입점한 아름다운커피는 공정무역 커피의 동의어로 통용될 정도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 개발부터 론칭까지 대략 1년 반, 양산과 보급은 후임 활동가에게 맡기고 박 씨는 가게를 나왔다.

요즘 카페는 차별된 공간으로 만드는 분위기, 사람의 아우라가 있어야 한다. 사진은 홍대 카페 디스트릭트 D에서 찍은 것. 인위적인 색채를 배제한 빈티지한 톤도 요즘 인기다. 

그 뒤로 전광수커피하우스의 전광수 선생과 함께 프랜차이즈 가맹을 시작했다. 특이한 점이라면 기계로 추출하는 에스프레소로 만드는 커피가 아니라 다양한 산지별 원두로 핸드드립(쉽게 말하면 기계가 아니라 손으로 내려 마시는 커피)에 주력하는 프랜차이즈라는 사실이다. 전광수 아카데미를 이수한 사람 중 ‘슬로우 커피’라는 본연의 방식에 충실하려는 이들을 모아 가맹점을 내는 일을 했다. 그런데 고작 점포 5곳을 론칭하고는 이내 다른 일을 벌였다. 가맹 담당 직원을 뽑아 일을 맡기고서 ‘킹콩커피’라는 원두 판매 온라인 숍을 운영하고 ‘카페인’이라는 커피문화 웹진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직업이 대체 몇 개인지 헛갈릴 지경이지만, 어차피 ‘커피’나 ‘글’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통용될 만한 일들이다.
 
“저는 바리스타도 아니고, 로스터도 아니고, 냉철한 사업가도 못 되니 커피에 관한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는 일이 적성에 맞더라고요. 웹진에 실은 이야기를 엮어 책으로 내면서 ‘작가’란 타이틀도 얻게 됐지요.”
 

커피로 다양한 문화적 변용을 꿈꾸다

 
고종이 ‘고히’를 즐겨 마셨다는 이야기는 (영화로까지 만들어졌으니) 유명하다. 그런데 사실 커피 문화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계기는 한국전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미군의 인스턴트커피에 맛 들인 한국인들이 결국 세계 최초로 믹스커피를 양산해낸 것이니. 1964년 이후 근 40년 동안 우리나라는 믹스커피의 식민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뭐든 빠른 것을 선호하는 한국인의 습성이, 빠르고도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에스프레소 전문점에 쉽사리 적응한 것도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또 하나. 공정무역 커피는 이래저래 식민지 역사와 연관이 깊다. 유럽이 처음 공정무역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에 반기를 들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수익의 일정 정도를 분배해야 돌아갈 수 있어요. 미국이 중남미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서 커피를 제값 주고 사주다가 더 보호할 이유가 없어지니까 국제커피기구에서 탈퇴해버려요. 미국의 4대 커피회사가 산지를 베트남으로 바꿔버리니 안 그래도 떨어진 커피 값이 더 폭락하게 돼요. 유럽에서 그걸 보자니 미국 주도로 세계가 움직이는 것 같아 기분도 나쁘고 해서, 과거 식민지에서 수탈하던 일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지식인들이 ‘공정무역’을 만든 거예요.”
 
커피는 주로 가난한 제3세계 국가에서 생산돼, 주된 커피 소비국인 선진국으로 흘러오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손길을 거친다. 그 안에 들여다보아야 할 노동 현실과 국경을 넘나드는 이야기가 넘실거린다. 커피를 단순히 하나의 산업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산물 혹은 성찰과 실천이 필요한 무언가로 봐도 좋은 이유다.
 
“어느 언론이 ‘커피 컨설턴트’란 이름을 붙였던데, 그 말은 좀 그래요…. 제 인생도 책임 못 지는데 어떻게 남의 일을 컨설팅하겠어요? (웃음) 그저 제 경험을 조금 나눌 수 있는 정도죠. 카페 서비스는 사람을 연결하는 일이고, 감성적인 비즈니스예요. 어마어마한 일이지요. 이걸 단순히 매뉴얼화하거나 주5일 근무에 익숙한 사람들이 대책 없이 시작하면 안 돼요. 자영업도 작은 기업을 꾸리는 일인 만큼, 이것저것 배우는 것으로는 부족하죠. ‘사람들과 함께’ 해나가도록 차근차근 준비해야 합니다.” 

그의 작업실 '화수목'. 빈 공간이 사람의 온기와 커피향기로 채워지는 순간이 가장 빛나는 때가 아닐까.

박우현 씨는 오랫동안 살던 종로 안국동의 한옥을 떠나 용인시 수지 동천에서 새로운 시도를 시작했다. ‘커피가 당신을 응원합니다’라는 커피문화 교실을 여는가 하면, 작업실에서 상영회와 토론회를 겸하는 등 다양한 경로로 커피를 만나는 일을 벌이고 있다. 공간 한쪽에는 헌책방을 열어 책과 커피가 공존하는 공간을 꿈꾼다. 그의 작업실 이름은 ‘화수목’. 커피에 필수적인 나무(커피체리)와 물과 불(로스팅)을 담은 이름이기도 하고, 일주일에 3일만 일하고 싶다는 바람도 담아 지었단다. 물론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가족의 이해와 지원도 필요하다. 지금은 중학생이 된 딸이 태어났을 때부터 아내와 번갈아 육아를 맡았기에 가족의 유대감이 남다른 듯했다. ‘생명을 키우는 일’의 소중함을 알게 된 덕분에 삶에 쉼표를 허락하는 일, 마음이 원하는 대로 따라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커피에 관해 할 이야기가 여전히 많은 그는, 또 다른 꿍꿍이를 준비 중이다. 커피와 영화를 접목하는 일이 그것이다. 연출된 다큐멘터리(페이크 다큐)의 형식에 유에프오에서 커피가 내려온다거나 하는 SF적인 이야기를 담아내는 작업이 될 수도 있고, 이래저래 생각을 엮어내는 중이다. 아무튼 이 모든 것이, 커피 때문에 벌어진 일 아닌가.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커피란 삶의 매뉴얼을 새로 쓰게 할 수도 있는 존재였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2013년 들어 첫 기사를 올립니다. 큰 희망을 품고 시작한 2013년의 1월이 그새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임기말에 '셀프 사면' '훈장 남발' 등으로 다시 한 번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암울한 상황이 여전한 때에 [독립, 하셨습니까?] 기사를 연재 중인 이은 씨가 생각비행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독자분들께 이렇게 인사를 전하고 싶답니다. "아마도 선거 결과에 많이 절망하고 계실 여러분도, 새해 복 많이 짓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생각비행도 같은 마음입니다. 하늘에서 복이 뚝 떨어지길 바라기 전에 우리 손으로 2013년 복을 많이 지어냅시다. 이번 기사는 <보이스 코리아>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많은 이를 깜짝 놀라게 했던 한 가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디션의 틈바구니에서
'요아리'라는 장르를 건져올리다


한 오디션 프로그램 녹화장. 심사위원들의 의자가 무대 쪽이 아닌 객석을 향해 있다. 노래하는 1분 30초 동안 하나의 의자도 돌려세우지 못하면 그것으로 마지막이다. 그 시간 안에 자신의 모든 것을 들려주어야 한다. 긴장했음이 역력한 한 참가자가 마이크를 들었다. 정적을 깨듯 전주가 흐른 뒤 100미터 경주처럼 노래의 피치를 올려간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듣는 이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 노래였다. 몇 소절 듣지도 않은 채 '원조 아이돌' 강타가 벨을 눌러 의자를 돌렸다. 벌어지는 입을 감추지 못하며 가수 백지영, 신승훈, '리쌍'의 길도 연달아 의자를 돌렸다.


가수 타이틀 버리고 목소리로 띄운 승부수


1분도 되지 않는 시간에 깐깐한 심사위원 모두의 러브콜을 받은 참가자. 절박한 심정으로 부른 노래는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과 시청자의 귀마저 사로잡았다. 힘 있는 목소리와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단 한 번의 무대로 오디션의 강력한 우승후보로 떠오른 사람이 바로 ‘강미진_요아리’다. 


그는 아이유의 데뷔 초기 곡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미아>를 불렀다. 강미진_요아리는 올해 본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의 참가자 중에서 개인적으로는 가장 인상적인 도전자였다. 이 장면은 정말로 수십 번이나 돌려볼 만큼 극적이었다.

노래 실력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는 아마추어가 아니다. 2007년 스무 살에 데뷔, 실력파 록밴드 '스프링쿨러'의 보컬로 활약했다. 2010년에 솔로 앨범을 내기도 했지만,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6개월 연습하고서 바로 데뷔했지만(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막상 가수가 되고 나서는 인기 가도를 달리지 못했다.

2012년 말에 발표한 신곡 <Lie>

독특한 음색 때문일까, 요아리의 노래는 소수의 팬에게 강력하게 어필하는 편이다. 함께 연습하던 동료가 대중가수로 승승장구할 때 지켜보는 입맛이 썼다. 같은 소속사인 브라운아이드걸스의 멤버 물망에 오르기도 했지만, 걸그룹은 그의 자리가 아니었다. 5년이 넘도록 한 길에서 버텼지만, 언제까지 무작정 버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개 오디션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솔직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어요. 저는 프로니까 잘돼야 본전이고 떨어지면 망신이잖아요. 이번에 떨어지면 접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모든 걸 포기하고 요아리란 예명이 아니라 본명인 강미진으로 나간 거예요. 아이유 씨 앨범을 들을 때 제 노래처럼 입에 감기는 느낌이어서 기회가 되면 불러보고 싶었는데, 사실 심사위원 네 분이 다 절 선택할 줄은 몰랐어요. '벼랑 끝에 서 있는 듯이' 부분에서 마지막이라는 절실함이 묻어 있었던 것 같아요. 경쟁하는 건 무서웠지만,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어요."

본격 오디션 프로그램의 시초인 <슈퍼스타 K>와 뒤를 이은 공중파의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 <케이팝스타> 등 홍수처럼 수많은 오디션이 있었으나 요아리가 <보이스 코리아>(이하 <보코>)를 선택한 이유는 명백했다. 외모가 아닌 가창력만으로 뽑는다는 콘셉트 덕분에 <보코>에는 타오디션과 구별된 프로급 참가자가 대거 등장했다. 본선 첫 무대에 한정되기는 했으나 목소리만으로 진짜 노래 실력을 겨룬다는 점에서 <보코>는 신선했고 외모 때문에 대중 앞에 나서지 못한 '얼굴 없는 가수'들을 위한 장이 되었다. 생방송에서는 살짝 긴장감이 덜했지만, 토너먼트 식으로 둘씩 자웅을 겨루는 라이벌 매치의 긴장감은 그야말로 최고조에 달해 폭발 직전이었다. 실시간으로 투표하는 승부 예측마저 엇비슷해서 누가 떨어져도 아쉽지 않을 정도였다. 외모나 나이 때문에 아이돌이 되지 못해서, 가수가 될 만한 체구가 아니어서 쓴웃음을 삼키던 뮤지션들이 이때다 싶어 노래를 토해냈다.


가수의 재능 물려준 아버지를 향한 노래

강미진은 4강 문턱에서 아쉽게 좌절했지만,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던 만큼 얻은 것이 많았다. 늘 아쉬웠던 대중적 인지도를 고스란히 챙겼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가 새삼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중학교를 자퇴하고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으로 편모 가정에서 자랐다. 그런 그에게 노래는 다른 인생을 열어준 우연하지만 결정적인 기회였다. 그의 목소리에 무언가가 서려 있다고 말하는 데는 이런 영향이 없지 않을 것이다.

"19살 때 노래 대회에 나갔어요. 상품이 유럽여행권이었거든요. 노래를 배운 적도 없었는데 우승해서 고생하신 엄마 해외여행을 보내드렸어요. 남들한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게 노래라는 걸 알게 됐죠. 그때부터 운명을 믿기 시작한 것 같아요. 20살 때 인터넷에 '모나리자녀'로 UCC 영상을 올렸는데 그게 화제가 돼서 데뷔하게 됐어요. 길이 쉽게 열리니까 소중한 줄 모르고, 어렵게 살았던 것에 대한 보상인가 보다 했어요. 음반이 잘 안되면서 방황도 했고 음악적으로 철이 들기 시작한 것 같아요."

학교를 그만둔 후로는 늘 돈을 벌었다. 동대문에서 옷이나 신발을 팔고 미용실 스태프나 전화 상담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일은 곧잘 했지만 아르바이트 급여로는 집안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어쩌면 노래는 삶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을지 모른다. 노래를 하면 늘 칭찬을 받았고, 운이 따랐고, 즐거웠다. 소질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아 타고난 것이었다. 어릴 적을 떠올리면 늘 "날 닮아 노래를 잘한다"며 좋아하시던 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래서였을까. <보코> 마지막 무대에서 부른 노래가 인순이의 <아버지〉라는 노래였다. 리허설 때 너무 우는 바람에 감정을 빼고 부른 탓인지, 정작 생방송에서는 강미진 특유의 감성이 살아나지 않았다. 아쉬웠지만 후련했다. 마지막처럼 불렀고, 정말 마지막이었지만 그의 노래는 여전히 진행형이니까.

"그 노래를 너무 좋아하는데 그때 아니면 언제 부를까 싶었어요. 아버지가 노래를 너무 잘 하셨대요. 가족들하고 놀러갈 때 노영심의 <그리움만 쌓이네>를 꼭 시키셨어요. 5학년 때 마지막으로 뵈었는데, 아버지가 제 노래를 보실 수 있도록 흔적을 남기고 싶었어요. 절대 울면 안 된다고 와서 웃겨주시고 그러니까 무대에서는 절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컸어요. 비록 떨어졌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고 사람들이 제 음악을 궁금해 할 만큼은 한 것 같아요. 제가 자신 있는 노래나 고음으로만 승부하지도 않았고요."

우승은 스무 살 손승연에게 돌아갔다. 그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를 부러워할 시간이 없었다. 원래 자리로 돌아와 자신을 보여줄 준비를 해나갔다. 생애 처음으로 해외여행도 다녀오고 무엇보다 못 다한 공부를 열심히 했다. 주변의 도움으로 2년 만에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통과했고, 싱글 앨범도 냈다. 그렇게 2012년이 바삐 지나갔다. 그의 곁에 아버지는 없지만 빈자리를 채워준 든든한 지원군이 있으니, 톱클래스의 작곡가 겸 프로듀서 윤일상이다(인터뷰로 만난 자리에서 그는 최고의 보컬리스트를 물을 때 '요아리'를 첫손에 꼽았다. 그래선지 요아리라는 가수의 존재가 더 궁금했다.)

"음악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부자지요. 제가 데뷔할 때 회사 이사님이셨어요. 브아걸 콘서트에서 멤버 '미료'와 함께 축하 공연을 할 때 처음 보셨대요. 그때 밴드가 해체되어서 개인 앨범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음악적인 것뿐만 아니라 생활을 선물해주셨어요. 매일 나가는 연습 공간, 음악적 색깔에 대한 발언권을 주셨는데, 이십대 초반의 제겐 큰 경험이었어요. 제게 '충분히 예뻐' '살 그만 빼'라고 용기를 주세요. 그래서 더 실망시켜 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죠."

2010년 처음으로 낸 싱글《저기요》

2010년, 싱글 《저기요》를 내면서 요아리는 삭발까지 했다. 귀엽기만 한 얼굴인데 밴드 보컬로 데뷔하면서 신비주의 전략으로 가면을 썼던 것이 패착이었다. 노래하는 이의 표정을 볼 수 없는 것만큼 슬픈 일이 있을까, 여(성)가수는 무조건 아름다워야 한다는 고정관념 앞에 신인 요아리의 자존감은 낮아졌다. 큰 호응을 얻지 못한 채 스프링쿨러는 해체 수순을 밟았다. 결국 홀로 서서 싱글 음반을 내며 요아리는 대중 앞에 결연하게 자신을 얘기했던 것이다.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장면을 고스란히 담은 <저기요> 뮤직비디오는 외모지상주의를 향한 저항의 방식이었다. 성형 대신 끝없는 도전과 변신을 꾀하면서 진학을 위해 짬짬이 공부하는 요아리가 더 아름다워 보이는 까닭이다.


오디션이 주는 위로 혹은 냉혹함

오디션 프로그램은 실력만으로 등용될 뿐 아니라 누구에게든 기회가 열려 있기 때문에 스타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열망, 그리고 대리 충족의 경험을 통해 초기에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포맷 자체가 식상해진데다 억지로 긴장감을 조성하는 편집 때문에 도리어 프로그램에 꼭 필요한 긴장을 잃어버렸다. 한때는 오디션이 스타를 꿈꾸는 이들만이 아니라 경쟁 체제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많은 이에게 매력적인 기회와 희망을 건네줬지만, 이제는 누가 우승하는지가 이미 정해진 결말을 향해 가는 느낌마저 든다.

요즘은 눈물겨운 사연에 뛰어난 노래 실력을 지닌 참가자보다는 소위 '엄친아' '엄친딸'로 불리는, 집안 좋고 외모도 뛰어난 이들이 더 높은 관심을 받는 경향이 있다. (올해 <슈퍼스타케이 4> 우승상금 5억 원이 모 주조회사의 2세인 로이킴에게 돌아갔는데, 그는 이 상금을 기부했다) 최근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기존 소속사의 연습생 선발 프로그램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실제로 <케이팝스타>는 가요 프로그램에 바로 데뷔할 만한 인재를 찾아내 갈고 닦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애초 '공정한 기회의 장'으로 연예기획사의 눈에 들지 못하던 사람들의 돌파구였던 오디션도 이미 기존 스타시스템의 구조 어딘가에 안착해버린 모양새다. 참가자들의 수준이 떨어지면서 '오디션의 수가 너무 많다'는 볼멘소리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최근 방송 중인 <케이팝스타 2>를 보면 십대 초중반 참가자들의 약진이 두드러지는 현상도 보인다. 어린 시절부터 가수형 인재로 키우려는 부모들의 영향 때문에, 아이돌 가수를 인생의 모델로 삼아 차근차근 준비해온 꿈나무들이 무섭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자신의 곡을 노래할 줄 아는 싱어송라이터처럼, 끝없는 경쟁과 대중의 사랑을 얻기 위한 분투에서 결국 살아남는 이는 자기만의 고유함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가사를 쓰는 데 재능이 있는 요아리는 작사가로도 이름을 올렸다.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혼자 노래방에 가서 아이돌 노래를 맘대로 편곡해 부르는 거란다. 언젠가는 이런 모습도 보여줄 것이다.

"미디움 템포의 켈리 클락슨이나 리드미컬한 케이티 페리, 댄스 팝이나 스트레이트 창법의 부드러운 록을 좋아해요. 비욘세처럼 춤을 춰도 노래가 들리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의상에도 관심이 많아서 소품 하나까지 신경을 쓰는 편이에요. 가요계의 '낸시 랭'처럼 파격적인 것도 잘 어울린다는 말이 듣기 좋아요. 요아리라는 장르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라이브형 가수, 콘서트를 기다리게 하는 가수가 돼야죠. 남들이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고 '노래에 미친' 가수요."

일렉트로닉이 가미된 록적인 사운드의 <맘에 드니?>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인 윤일상(키보드)이 직접 세션으로 참여했다.

그렇게 강미진은 다시 요아리로 돌아왔다. 앨범 준비를 하며 틈틈이 무대를 통해 관객과 만나던 그가 1월 15일에 미니앨범 《맘에 드니?》를 발표했다. 타이틀곡 <맘에 드니>를 비롯, 전 곡을 윤일상이 작곡하고 대부분 요아리가 가사를 썼다. 아이 같으면서도 성숙함이 깃든 묘한 보이스, 힘 있는 진성의 고음과 절묘한 완급 조절, 록과 댄스음악을 종횡무진하는 요아리의 목소리. 삶은 그에게 손쉬운 성공이나 명예를 가져다주지 않았지만, 그 덕에 복잡다단한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낼 줄 아는 아주 드문 음색을 갖게 되었다.

음악만 들으면 다소 '센' 인상이지만, 장난기 많은 소녀의 이미지도 엿보인다.

오디션 무대의 화려한 무대 뒤안을 보지 못하는 시청자로선 입이 벌어지게 하는 그의 노래 실력 뒤에 어느 만큼의 땀과 노력이 배어 있는지 알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요아리는 묵묵히 노래한다. 그만의 작은 희망을 위해. 요아리의 노래를 들으며 섣부르지 않게, 작은 희망을 품게 된 것도 그의 노래가 쉽지 않아서일 테다. 이제 다시 그의 노래를 만나 에너지를 충전해야겠다.

안녕하세요? 생각비행입니다. 2012년 10월 7일 부산 해운대구 신세계 센텀시티 문화홀에서 열린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플래시 포워드 부분 감독 프레젠테이션에서 지미 라루슈 감독은 "내 영화(<상처>)는 한 인간이 아동기에 겪은 상처가 인생 전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보여준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독립, 하셨습니까?] 기사를 연재하고 있는 이은 씨가 <상처>를 관람하고 감독과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아울러 풀어냈습니다. 지난번 연재 이후 오랜만에 올리는 글입니다. 내년에 상영될 친족 성폭력 다큐멘터리 <잔인한 나의, 홈> 제작 일정으로 연재가 늦어졌다고 합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다큐멘터리에 관심 있는 분들의 후원과 참여를 기다립니다.)


〈상처〉를 대하는 태도,
지미 라루슈 감독에게 묻다

‘상처’는 삶의 복잡다단함을 보여주는 한편 삶을 직면하지 않을 핑계도 제공해준다. 때로는 삶의 중요한 순간을 은근슬쩍 피해 숨을 수 있게 해주는 편리한 장치 아닌가 말이다. 그런 태도로 면피해온 것들을 근래 자주 느끼고 있다. 어릴 적 누구에게나 일상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폭력,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가정에서 혈연가족이 가하는 폭력은 뚜렷한 족적을 남긴다. 지난 상처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일은 쉽지 않지만 결정적으로 상처와 불화하게 되는 것은 그 후폭풍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때 벌어지는 일이다.

한 편의 영화에 이끌려 부산으로

애초 부산에 갈 계획은 없었다. 화려한 레드카펫, 국경을 가로지르는 거장의 영화, 밤마다 넘실대는 술잔…. 영화 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나와 거리가 있는 것들이었다. 가치관이 비슷한 이들과 마음이 움직이는 일만 하다 보니, 그중에서도 독립의 독립, 자본과 무관한 작품들이나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영화가 관객과 만나도록 기획하는 일로 바삐 움직인 터라 정작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는 부산국제영화제에는 (관객으로도) 가본 적이 없었다.

<상처>의 메인 포스터. 붉은 색감이 무척 강렬하다. 묵직하게 쓰여진 시놉시스는 또 어떻고! 하지만 영화는 붉은 빛보다 잿빛에 가깝다. 

"잘못된 인생에서 미래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 씻을 수 없는 상처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듯, 리차드의 어린 시절 창고에서 일어난 사건의 상처는 그의 인생을 알게 모르게 바꾸어놓는다. 삼십 년이 지난 후, 그는 복수를 위해 그 장소를 다시 찾고, 한 인간이 자신의 과거와 직면하는 순간을 강렬한 심리적 서스펜스로 그려낸다."

영화 <상처>의 시놉시스를 보는 순간, 나의 무의식과 의식이 한달음에 '꼭 봐야 할 영화'라며 소리쳤다.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새벽기차를 타고 내려가 조조로 영화를 보고야 말았으니, 근래 드물게 유별난 끌림이었다. '트라우마 상담'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살아온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와중에 소란스럽던 내면이 조금 정리되는 경험을 했는데, 그 어딘가 영화가 와 닿을 것 같아서였다. 상처 많은 사람이라 여기며 실상 그 이름에 스스로를 가둔 건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이었다는 걸 조금씩 깨닫던 무렵이었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심신이 온전히 자라기 이전이므로 별 뜻 없이 저지른 일들이 큰 상처로 남아 평생의 무게가 되기도 한다. 한편으론 사건의 영향력이나 피해에 비해 빨리 아무는 경우도 있다. 어린 시절 아주 큰 트라우마를 겪고서도 남을 돕는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사람들의 예를 왕왕 볼 수 있으니 하는 말이다. 연쇄 살인범이라도 매 순간이 상처의 기억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듯, 사랑받지 못한 아이가 꼭 사람을 혐오하는 성인으로 자라는 것은 아니다. 상처나 사건 자체보다는 그 후의 처치나 오랜 시간의 관리(혹은 치유), 그리고 자라나며 접하는 환경이란 변수가 꽤 크게 작용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모든 과정이 쉽거나 자연스레 이뤄질 거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자신의 약한 부분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도리어 내면에 괴물을 키워낼 수도 있다. 꼭 가족이나 가까운 이가 아니라도 마음의 길을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가 있다면 상처는 치유의 길로 시나브로 접어든다.

영화로 돌아가 이야기하자면, <상처>는 매우 현실적으로 등장인물, 가해 혹은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판타지를 접목해 인물들의 정서를 놀랄 만큼 세세하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예측하지 못한 결말까지 숨도 못 쉬도록 몰아붙이는 촘촘한 솜씨에 소름이 돋을 정도. 학교 폭력의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였던 감독의 이중적 경험을 캐릭터의 감정으로 탄탄히 쌓아올렸기 때문이리라.

30년 전의 리차드와 폴, 그리고 폴의 친구들. 둘 사이의 권력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리차드도 그들 중의 일원이 되고 싶어 하지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폭력이었다. 

극 중 리차드는 창고에서 린치를 당하고 돌아오지만 싸늘한 집안 공기에 혼자 마음을 쓸어내린다. 공교롭게도 아버지와의 불화로 어머니가 떠난 후였다. 감싸 안아줄 이가 없었던 그의 마음은 점점 황폐해지고 그조차 마음의 빗장을 열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고, 상담이나 도움을 받으려 해보지만 상처는 봉합되지 않고 커져만 갔다. 한편 리차드를 집요하게 괴롭힌 폴에게는 위압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가 있었고, 그는 타인의 고통에 이입하지 못하는 어른으로 자라났다. 누구와도 마음을 나누지 못하는 리차드는 아들과 부인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그는 폴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고 실행에 옮긴다. 창고에서 재현되는 폭력적 상황은 판타지와 실재를 오가며 그의 분열된 상태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30년 후, 창고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 용서와 화해까지 나아갈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결말은 기대를 처참하게 배반한다.


상처를 증폭시키거나 잦아들게 하는 것

영화 속에서는 그것이 '엄마'의 부재 때문으로 그려지지만 실상이 그렇게 단순할 리가 없다. 예를 들어 '엄마 없는 아이'라고 놀린 아이를 누군가 때렸다고 치자. 거슬러 올라가면 엄마의 부재라는 근원적인 원인이 있지만, 실상 폭력을 직접 유발한 것은 친구의 놀림이다. 아이에게 엄마의 부재가 트라우마일 수는 있지만, 이를 거론하며 상처를 건드리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자신이 어쩌지 못할 상황 때문에 폭력을 행사하게 되면, 절망한 아이는 계속 주먹을 휘두르거나 그러다 때때로 당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연쇄구조를 뷰파인더에 담으며 감독은 냉랭할 만큼 거리를 둔다.

도움의 손길에도 폭력으로 대응하는 리차드는(이는 도와주려던 이를 물어뜯는 개의 모습으로 대변된다), 물어뜯긴 자국이 마음으로 번져 통제하지 못할 무기력에 휩싸인다. 감독 혹은 리차드는 30년 전의 사건을 호출하고, 그곳으로 가해한 친구를 데려와 같은 상황을 되풀이하며 어떻게든 고통을 '해결'하려 발버둥친다. '복수'를 계획했다는 사실이 그 절박한 마음을 대변한다. 그러나 자신의 약함을 강함으로 가리며 살아온 폴에게 그 사건은 기억조차 희미해진 하나의 해프닝일 뿐이었다. 폭력의 결과로 마음이 망가진 리차드의 항변도 그에겐 '약해빠진 놈들의 핑계'로 치부될 뿐이다. 실패한 복수는 삶의 의지마저 앗아간다.

혼자가 된 리차드. 아내도 아들도 그를 외면한다. 배우 마크 비랜드(Marc Beland)는 드라마 시리즈의 주연 배우로, 섬세하게 흔들리는 감정을 잘 표현했다.   
 
나는 처음에 이 이야기가 실패한 복수, 탈출구를 찾지 못한 분노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되씹어보니 그저 절망에 관한 이야기였다. 벗어나기를 포기한 게 아니라,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쓸수록 더욱 그것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하지만 "영화의 절반이 자신의 이야기"임을 고백한 감독은 장난꾸러기의 미소를 간직하고 있었다. 어두운 절반을 영화에 쏟아붓고 나니 조금은 홀가분해진 것일까. 어린 시절 아버지의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보는 법을 익힌 그는 렌즈를 통과한 자신의 이야기를 대중에게 드러내었다. 그만한 거리를 둘 수 있게 됐다는 뜻일 터.

지미 라루슈 감독

"열다섯 살에 처음으로 카메라를 들었어요. 다행히 좋은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지만 어머니의 부재를 매 순간 느꼈어요. 체구가 크다고 놀림도 많이 받았고 싸우기도 많이 했어요. 그러지 않게 된 건, 아마 본격적으로 영화를 찍게 된 무렵인 것 같습니다. <상처>는 이전에 만든 두 개의 단편을 이어 더 풍성하게 만든 영화고요."

아쉽게도 그의 영화가 거친 폭력을 연상(오해이긴 하지만)시켰는지, 평단이나 관객으로부터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작은' 영화들은 사실 영화제의 상영작 수를 채우고 가끔 의외의 발견을 위해 존재할 뿐, 스포트라이트는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라인업에서 정해진다. 영화제의 위상에 걸맞은 영화를 프로그래밍하고 추천작으로 선정하고 스타들을 레드카펫에 세워 시선을 끄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이다. 캐나다에서도 적은 예산(총 제작비가 1,100달러, 약 1억 2000만 원의 저예산 영화)으로 영화를 만들기가 녹록하지 않은 것은 별 차이가 없는 듯했다. 그렇다고 그 성취가 크지 않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생애 첫 장편영화인데, 영화제에서 초청해주어 매우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사비와 프로듀서의 출연으로 제작했는데 개런티에 무관하게 배우들이 출연해주었어요. 덕분에 무사히 완성할 수 있었어요."

아무리 자전적인 이야기로 만든 영화라도 '극영화'임이 분명한데, 나는 자꾸 만든 이의 '삶'에 집중해 이야기를 들었다. 다큐멘터리를 만들다 보니 극영화와의 경계가 조금씩 흐려지고, 영화를 통해 만든 이의 삶 혹은 정서를 들여다보게 되는 태도로 영화를 보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영화 읽기가 갈수록 어렵다. 삶과 영화의 경계, 감상과 성찰의 경계, 영화 속 삶과 영화 밖 삶의 경계를 구분하는 일이 점점 무거워지는 까닭이다.


아마도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상처는 상처에 의해 증폭되거나 묻히거나 혹은 해결되기도 한다. 갈 곳 잃은 상처야말로 가장 위험한 종류의 내상이라고 생각한다. 상처를 상처로 받아들일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세상을 사는 데 가장 필요한 자원이라고 여기는 것도 과언은 아닐 터. 포기하는 것조차 선택일 수 있지만 돌이킬 기회가 있을 때에야 그렇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수잔 브라이슨이 쓴 책,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에 나오는 문구로 글을 맺어야겠다.

"트라우마 생존자의 목표는 무엇일까? 궁극적으로는 그것은 트라우마를 초월하는 것도 아니고, 트라우마 희생자가 겪는 생존자의 딜레마를 푸는 것도 아닌 단지 견뎌내는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 때는 그저 견뎌내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일 수 있다.
트라우마에서 살아남았던 사람들은 '나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살아야만 해'라는 매일 매일 반복되는 (사무엘) 베케트적 딜레마를 푸는 것이 얼마나 자신들을 지치게 하는 일인지 잘 이해한다."

어쨌거나 삶도, 영화도 계속된다. 내놓을 용기가 있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는다. 묻어두려 하지만 않으면 어떤 상처라 하더라도 응당한 대가를 돌려준다고 '믿는다'. 감독의 다음 영화가 코미디라는 사실이 지금으로서는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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