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1일 선명히 엇갈리는 2개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김학의와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행에 대한 결과입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넘어간 건 아닌가 싶어 돌아봅니다.


출처 - AFP


미국의 거물 영화제작자였던 하비 와인스타인은 지난 3월 11일 뉴욕 1심 법원에서 징역 23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수많은 아카데미상 수상작으로 영화계에 군림하던 와인스타인은 1급 성폭행 혐의로 20년형, 3급 강간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번 선고는 2006년 자신의 아파트에서 미리엄 헤일리를, 2013년 뉴욕 호텔에서 제시카 만 등 2명을 성폭행한 혐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이들의 고소, 고발에 따라 앞으로 형량이 더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미투운동을 촉발시킨 원흉이니까요. 하비 와인스타인은 할리우드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앞세워 90명이 넘는 배우와 스태프 등의 여성에게 성폭력을 일삼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출처 - 스톰픽쳐스코리아


와인스타인은 항소하겠다고 했는데요. 지겹게 들어온 수많은 가해자들의 단골 멘트처럼, 자신은 합의된 관계를 맺은 것이라면서 그 여자들이 자신과 자고 싶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성의 기색이 전혀 없는 그는 현재 67세입니다. 그러니까 이번에 선고된 징역 23년 만으로도 사실상 종신형에 가깝다도 봐야겠죠.


 

출처 - 문화일보

 

그런데 같은 날 우리나라에서는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별장 성범죄 의혹과 관련해 전혀 다른 결론이 나왔습니다.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 수사권고 관련 수사단(단장 여환섭 대구지검장)은 지난 1월 말 최모 씨를 건설업자 윤 씨와 함께 성폭행한 혐의(특수강간치상)로 고소당한 김학의 전 차관을 무혐의 처분했습니다. 이로써 지난해 3월 관련 수사단이 출범한 지 10개월 만에 수사는 아무런 소득없이 종결되었습니다.

출처 - YTN


검찰은 피해자 진술에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이를 허위로 입증할 반대 증거 또한 충분치 않다며, 김학의가 진술을 거부해 구체적 증거 없이는 기소가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아무 말 잔치를 할 거면 대체 수사를 왜 다시 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출처 - 노컷뉴스


검찰은 2013년과 2014년 두 차례 김학의를 수사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2013년 수사지휘 때부터 경찰이 신청한 영장을 11차례 반려하는 등 검찰이 수사 의지가 없었던 것은 드러난 사실입니다. 당시 검찰은 경찰이 신청한 체포·통신사실조회·압수수색·구속 영장을 9차례, 출국금지 요청을 2차례 반려하기도 했죠. 검찰에 대한 국민의 불신 속에서 지난해 3월 문재인 대통령은 김학의 사건을 언급하며 권력형 범죄에 대해 재수사를 강조했습니다. 이에 검찰은 어쩔 수 없이 세 번째 수사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한솥밥을 먹은 법무부 차관에 대한 검찰의 제 식구 감싸기로, 첫 수사부터 부실 수사와 늑장 기소로 가해자에게 이미 면죄부를 준 셈이었습니다. 

 

출처 - 서울신문

 

문재인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던 검찰이 세 번째 수사로 진실을 밝혀낼 수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그 결과가 지난 3월 11일 김학의에 대한 무혐의 처분으로 드러났습니다. 김학의는 지난해 11월 뇌물 수수 혐의에 대한 검찰 수사에 대해서도 1심 무죄를 받았고, 현재 2심을 앞두고 있죠. 검찰의 짬짜미가 국민의 인식과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한 겁니다. 김학의에 대한 이번 판결로 결국 검찰은 짜고치는 고스톱에 대한 비난에 직면하게 됐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제는 김학의 개인 차원이 아닌 검찰의 부실, 은폐 수사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마저 나오고 있습니다. 다 검찰의 자업자득입니다.


 

출처 - 미디어오늘

출처 - 미투시민행동

 

같은 권력형 성폭행 사건을 두고 한쪽은 종신형에 가까운 죗값을 치르게 된 반면 다른 한쪽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습니다. 대체 이런 차이가 어디서 나온 것일지 생각해봐야 할 때입니다.

2018년에 이어 2019년에도 미투운동은 계속되었습니다. 조금씩 진전되고 있긴 하지만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습니다. 다음 달이면 한국 미투운동이 본격화한 시발점이 된 서지현 검사의 미투 폭로 2주년이 됩니다. 서지현 검사는 JTBC 뉴스룸에 출연하여 안태근을 시작으로 검찰 조직 내 성폭력의 실상을 고발했습니다. 뒤이어 연출가 이윤택, 노벨 문학상 단골 후보로 거론되던 고은, 유력 대선 후보였던 안희정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미투 폭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일부는 처벌받고 일부는 법망을 빠져나가기도 했습니다. 미투운동이 우리 사회의 인식을 진일보시킨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미투 폭로가 있을 때마다 가해자 개인의 문제로 대할 뿐 성폭력의 문제를 사회구조의 문제로 보는 인식은 여전히 낮은 수준입니다.


출처 - 한겨레


대표적인 예는 진짜 미투와 가짜 미투를 남성들의 기준에서 판별하려 드는 것입니다. 피해자의 나이, 출신 평소 행동, 성폭력 전후로 보인 태도 등을 기준으로 소위 '피해자다움'을 감별하려는 것이죠. 일반인은 물론 범죄를 판결해야 할 판사, 검사, 변호사에 이르기까지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이런 잣대로 순결한 피해자인 여성과 소위 꽃뱀으로 피해자들 사이를 갈라치기하고 사회적 낙인을 찍습니다. 이런 행위를 통해 2차 가해가 이어집니다.


출처 - KBS


성폭력만큼이나 2차 가해가 고통스럽다는 건 미투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목소리입니다. 2017년 5월 체육계에서 첫 미투 폭로를 한 이경희 리듬체조 국가대표 코치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대한체조협회 김 모 전무이사를 성추행과 강간미수 혐의로 고소했는데 수사 과정에서 검찰에게서 받은 조사가 자동차 안에서 성폭력을 당한 경험을 재현해보라는 등 인격 침해적인 것투성이였다고 하죠. 이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본격적인 감사와 수사가 시작되자 가해자는 물론 체육계 주변인들로부터 각종 음해를 당하기 시작합니다. 두 사람이 원래 연인 사이였고 결혼까지 생각하는 깊은 사이이지 않았냐는 겁니다.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입니다. 이경희 코치는 2019년에 이르러서야 2차 가해에 대해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승소를 합니다. 판결은 벌금 300만 원의 약식명령. 액수가 크지 않아 몇 년간 감내한 고통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지만 가해자가 잘못하고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는 걸 인정받은 것만으로도 올림픽 금메달을 딴 기분이라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2차 가해가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범죄이며, 올해부터 불법 영상물 피해자 대신 정부가 삭제 비용을 대고 이 비용을 가해자와 유포자들에게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 것은 큰 진전이었습니다.


출처 - 한겨레


하지만 사회구조적인 여성혐오와 차별은 여전합니다. 이전에 생각비행에서도 여러 사례를 든 바 있죠. 젊은 남성들을 중심으로 요즘은 오히려 남성이 역차별을 당한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데, 사례와 통계를 보면 사실이 아닙니다.



남성 역차별? 여성이라 차별당하는 구조적 현실이 더 문제다! : https://ideas0419.com/998



학교, 학과, 학점이 같아도 여성 소득은 남성의 82.6%에 불과하며, 심지어 여성이 더 우수한 성적을 거둬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입사에 탈락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습니다. 업계 전체가 사상 검증을 하듯 페미니즘을 검열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3년 전 김자연 성우가 자신의 SNS에 메갈리아 후원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올렸다는 이유로 넥슨 게임에서 퇴출당한 적 있는데요, 3년이 지난 지금도 게임 업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아르카나라는 게임의 일러스트레이터가 3년 전 김자연 성우 지지글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일러스트 작업에서 퇴출당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이 게임 회사는 사회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작가 리스트를 언급해 게임 업계 내에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의심을 샀죠. 자신들은 그저 업계 내 리딩 컴퍼니인 넥슨의 사례를 따랐을 뿐이라면서 말입니다. 게임 업계 내에서는 외주 일러스트 등의 작업을 하는 여성에게는 SNS 사용 유무 등을 체크하며 사실상 여성주의에 대한 검열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업계 특성상 남성 소비자의 비율이 높기 때문인 듯한데, 일부 극렬 소비자의 입장만을 대변할 경우 그 업계나 장르 자체가 점점 좁아지며 도태될 수 있으니 업계와 소비자의 자성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공공 부문은 좀 나아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지난 11일 전남도청 여성 공직자들의 승진이 불공정하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전남도 공무원 직급별, 성별 분포 자료에 따르면 4급 공무원 99명 가운데 여성은 7.1%인 7명입니다. 3급은 19명 중 1명, 2급과 1급은 아예 없습니다. 여성이 공무원 성별 채용률의 56%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여성 합격자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인데 어째서 고위직은 남성이 독점하고 있는 걸까요? 능력과 자질 대신 조직 내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관행과 문화라는 이름으로 굳어져서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출처 - 한겨레


교육계에서는 서울교대 집단 성희롱 사건으로 연루돼 서울시교육청이 중, 경징계 처분을 내린 현직 교사 4명과 임용대기자 7명 등 11명이 처분이 과하다면서 전원 재심을 신청했습니다. 이들은 서울교대 재학 시절 단톡방 등에서 여학생 외모를 품평하고 성희롱 발언을 해 징계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한 현직 교사는 겉모습이 예쁘고 성숙한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애는 따로 챙겨 먹는다는 입에 담기도 더러운 말을 서슴지 않았다고 하죠. 매일 아이들을 대면하는 교사의 인식이 이 모양이니 학급 남아들이 뭘 보고 배우겠습니까?


출처 - 한국일보


언론의 경우 진일보한 면도 있습니다. KBS 9시 뉴스를 진행하는 메인 앵커로 40대 여성 기자가 발탁되었죠. KBS 9시 뉴스 앵커를 여성 기자가 맡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MBC와 SBS가 일찌감치 메인 앵커로 여성 기자들을 발탁했던 것과 달리 KBS는 중년 남성 앵커와 젊은 여성 아나운서 조합을 고수했던 과거의 전례를 비추어볼 때 변화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한 면도 많습니다. 광주MBC 라디오 프로그램의 사례처럼 여성을 외모로 품평하고 미투를 우습게 여기는 말투를 여과 없이 공중파에서 내뱉는 일도 있었으니까요. 진행자가 여성 트로트 가수들 몸매를 품평하더니 미투에 걸리지 않는 선에서 자신이 한 번쯤 만져보겠다는 소리를 낯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했습니다. 같이 있던 진행자도 사실상 동조했고요.


출처 - 한겨레


기술 발달에 따라 점점 인공지능이 사회에서 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는데요, 그런 인공지능조차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감점을 합니다. 아마존은 2014년부터 개발해 온 AI 채용 프로그램을 폐기했다고 하죠. 프로그램이 경력 10년 이상 남성 지원자 서류만 후보로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 채용 프로그램이 여성이라는 단어 자체를 감점 요소로 분류하기 시작한 겁니다. 지난 10년간 회사가 수집한 이력서 패턴을 AI가 학습한 결과를 토대로 지원자들의 서류를 심사하니 남성 비율이 높은 IT 업계의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게 된 겁니다. 아무리 AI라고 해도 무에서 창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의식적으로 쌓아온 사회 시스템을 데이터의 원천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입사에 AI를 도입하기 시작한 기업들이 있는데요, 기술이 중립적이고 객관적이지만은 않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올해 세계은행이 발표한 〈여성, 비즈니스 그리고 법〉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에게 경제적, 법적 권리를 동등하게 보장하는 나라는 187개국 중 단 6개국뿐이라고 합니다. 벨기에, 덴마크, 프랑스, 라트비아, 룩셈부르크, 스웨덴이 그런 나라입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100점 만점 기준에 전체 평균 74.71점으로 여성이 누리는 권리는 남성의 4분의 3 수준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한국은 전체 평균보다는 높았지만 50위권 안에도 들지 못했습니다. 세계경제포럼의 세계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전체 153개국 중 108위에 머물러 성 격차가 큰 국가에 속했습니다. 다행히 작년보다는 7계단 상승했습니다. 하지만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세계경제포럼은 세계 성 격차 해소에 99.5년이 걸린다고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남녀평등을 이루기가 이토록 어려운 일일까요? 우선 현실 인식부터 바꿔야 합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이 있습니다만 100년씩이나 기다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남녀가 정말로 평등해지는 날이 속히 오길 기대합니다.

2019년에도 성폭력 피해여성들의 미투운동은 계속됩니다. 쇼트트랙 국가대표이자 금메달리스트인 심석희 선수가 2014년 여름부터 조재범 코치가 무차별적 폭력을 행사한 것은 물론 강제추행뿐 아니라 성폭행을 일삼았다며 지난달 17일 그를 고소했습니다. 성폭행이 시작됐다고 밝힌 2014년은 심 선수가 만 17살, 고등학교 2학년 때여서 더욱 충격적인데요, 이때부터 평창올림픽 개막 두 달 전까지인 4년 가까이나 지속적으로 성폭력이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가해자인 조재범 코치는 범행 때마다 "운동을 계속할 생각이 없느냐"며 협박하고 무차별적인 폭행을 행사했다고 하죠. 폭력을 이용한 성범죄의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출처 – SBS


현재 조재범은 평창올림픽을 앞둔 지난해 1월 중순께 훈련 과정에서 심석희 선수 등을 비롯한 4명에게 폭행을 가해 전치 3주의 상처를 입힌 혐의로 법정 구속 중입니다. 지난 9월 1심에서 징역 10월을 선고 받은 바 있습니다. 당시 조재범은 경기력 향상을 위해 선수들을 때렸다는 얼토당토 않은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선수들을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폭행했는데도 겨우 징역 10월에 불과한 솜방망이 처벌이 내려지자 심석희 선수가 용기를 내어 나선 겁니다. 제2, 제3의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구치소에 수감 중인 조재범이 2심 재판에서 엄벌을 받아야 한다고 호소한 것이죠.


출처 - TV조선


심 선수는 이런 폭행과 성범죄가 어렸을 때부터 있었고 상습적으로 당해 본인에 대한 상처가 말할 수 없이 많이 누적돼 고통이 매우 심한 상태라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성적과 메달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지도자의 말이라면 법처럼 따르게 하는 우리나라의 전근대적인 훈련 방식도 문제거니와 알리지 말라는 협박과 감시 때문에 도움을 청할 곳이 마땅치 않은 것도 큰 문제입니다. 심 선수는 운동을 시작한 6살 때부터 무차별적으로 맞았고 고등학생이 되자 성폭행까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선수 생활을 못 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가족에게조차 얘기를 꺼내지 못했으나 심 선수가 용기를 낸 건 팬에게서 온 편지 덕분이라고 합니다. 올림픽이든 그 이후든 선수 생황을 열심히 하는 걸 보여주는 심 선수가 자신에게 너무 큰 힘이 됐다고 고백하는 편지였다고 하죠.


출처 - SBS


경찰의 1차 조사 결과 미성년자였을 심석희 선수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모든 환경이 열악했습니다. 현실은 우리나라에서 아이들에게 운동을 꿈으로 가지라고 말을 꺼내기 무서울 정도로 끔찍합니다. 조사 결과 조재범은 2차 가해를 통해 폭행 피해자 4명 중 3명한테서 합의를 받아냈다고 합니다. 애초 폭행 피해자는 7명이었으나 3명은 두려운 나머지 피해자 진술을 거부한 터라 4명으로 재판이 시작된 것이었죠. 조재범은 쇼트트랙 현직 선수들까지 동원해 피해자들에게 합의를 종용했고 피해자들의 가족에게까지 찾아왔다고 합니다. 운동을 계속시키고 싶으면 합의하도록 종용하는 2차 가해를 한 셈입니다. 성폭력과 별도로 여러 명의 선수를 전치 3주가 넘게 나오게 때린 사실이 명백한데도 1심에서 징역 10월밖에 나오지 않은 배경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던 겁니다. 스포츠계의 고질적인 문제는 참으로 끔찍합니다.

출처 - 경향신문

 

이번 심석희 선수의 용기 있는 폭로를 보고 합의를 해줬던 2명의 선수가 조재범에 대한 합의를 취소하면서 용서가 아니라 엄벌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냈습니다. 당시 잘못을 뉘우쳤다고 하던 조재범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가식적인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겁니다. 심석희 선수 한 사람의 용기가 다른 선수들이 미투운동에 동참하게 하는 용기를 이끌어냈습니다.

 

출처 - 한겨레


아동, 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강간상해)에 해당하는 혐의는 당연합니다. 조재범의 휴대전화와 태블릿 등을 압수해 디지털 포렌식 수사 중이라고 하죠. 여기서 문제는 성범죄의 범행 장소가 한국체육대학교 빙상장 지도자 라커룸, 태릉 및 진천선수촌 빙상장 라커룸 등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시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해야 할 의무가 있는 문체부와 대한체육회, 빙상연맹은 이번 사태에 책임이 있습니다. 심석희 선수를 비롯한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행동을 체육계에 존재하는 침묵의 카르텔을 깨는 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문체부는 이날 부랴부랴 체육계 전수조사 등의 성폭행 근절 대책을 사후약방문으로 내놓았습니다. 아무 대책이 없는 것보다야 낫긴 합니다. 우선 체육계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기로 했습니다. 영구제명 조치 대상이 되는 성폭력의 범위를 종전보다 확대하는 동시에 체육단체 관련 규정을 정비해 성폭력 관련 징계자는 국내외 체육 관련 단체 종사를 막을 계획입니다. 체육계에서 성폭력을 저질렀다면 체육계에서 먹고살 생각을 더 이상 하지 말라는 것이죠.

 

금메달리스트조차 무차별적인 폭행과 성폭력에 시달리는 현실을 보면 그동안 여성 선수들이 얼마나 힘든 처지에 놓여 있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한체육회에 접수된 폭력, 성폭력 피해 신고·상담건수가 지난해 동안 348건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 중에서 성폭력 신고·상담건수는 93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한체육회는 수사 의뢰나 고발을 단 1건도 하지 않았다고 하죠. 이제 대한체육회를 비롯한 관계자들의 책임을 엄중히 물어야 할 때입니다. 스포츠계 엘리트선수 육성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조사와 성찰도 필요합니다. 아울러 미투 관련 법안에 대해 국회가 응답해야 합니다. 


출처 - SBS


심석희 선수의 폭로로 주목받은 빙상계 사건은 '조재범 성폭행 사건'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성폭력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이름으로 사건을 규정하는 것이 사회정의에 부합하기 때문이죠. 심 선수의 용기 있는 결단을 계기로 가해자에 대한 엄벌, 피해자에 대한 보호와 배상, 그리고 체육계 전체에 성폭력 전과자가 발붙일 곳이 없도록 하는 조처가 필요합니다. 오늘 선수촌에 복귀해 월드컵, 동계올림픽 출전을 위해 전념하겠다며 훈련을 다시 시작하는 심석희 선수에게 경의와 응원을 보냅니다.

베스트셀러 원작 소설을 영화화하는 것은 할리우드를 비롯해 우리나라에서도 흥행의 공식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흔한 일입니다. 그런데 지난 12일 한 베스트셀러 소설의 영화화와 주인공 캐스팅 발표가 나자 큰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82년생 김지영》의 영화화 소식입니다.



출처 - 민음사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지난 2016년 발간돼 100만 부에 육박하는 판매고를 올렸을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2017년에는 독자들이 선정한 올해의 책으로 뽑히기도 했죠. 또한 그 인기 이상의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것도 화제였습니다. 학교와 직장에서 성차별을 받는 여성, 독박 육아에 치인 주부 등 대한민국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려내 대대적으로 촉발된 페미니즘과 미투운동의 큰 호응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인지 문재인 대통령, 유재석, 방탄소년단, 레드벨벳, 소녀시대 등 유명인사들도 이 책의 독자임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출처 - 문화뉴스


《82년생 김지영》 소설의 주인공인 김지영 역에 83년생 영화 배우 정유미가 캐스팅되었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과 비슷한 나이인 정유미는 〈가족의 탄생〉, 〈옥희의 영화〉 등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예능 프로그램인 〈윤식당〉에서 싹싹한 모습으로 '윰블리'라는 애칭을 얻은 인기 배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네이버 영화에서 개봉은커녕 이제 막 제작 발표를 한 영화의 평점이 4점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별점 테러를 한 사람들은 미래로 가 영화를 보고 오기라도 한 걸까요?



출처 – 네이버 영화


이는 페미니즘을 혐오하는 일부 남성이 중심이 된 소행으로 보입니다. 영화 내용이 페미니즘 논란을 일으킨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겁니다. 정유미의 SNS에는 "좋아했는데 실망이다", "이제 남성 팬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거지?" 같은 반응부터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과 테러에 가까운 반응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출처 –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심지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영화화를 막아주세요"라는 게시물까지 올라왔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이 영화화된다면 자유국가인 대한민국의 기본권에 어긋난다며 소설이 담고 있는 특정 성별과 사회적 위치에서 바라보는 왜곡된 사회에 대한 가치관이 보편화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를 스크린에 올린다는 건 성평등에 어긋나고 사회적으로 성 갈등만 조장한다고 말합니다. 

 

과연 자유국가, 기본권, 성평등이란 단어의 뜻을 알고 하는 소리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이 청원 게시물을 올린 사람은 자신을 19세 남성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젊은 남성들의 위험수위에 달한 여성혐오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하여 더욱 안타까운 청원 글이었습니다.



출처 – 네이버 책


《82년생 김지영》은 30대 평범한 여성인 김지영과 그의 삶에 일어난 일을 통해 한국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와 성차별을 시사한 점이 높이 평가되는 작품입니다. 이유 없이 남성을 혐오하고 이런 생각을 전파하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따른 고충을 작품에 담았다는 사실만으로 남성을 비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지나친 확대 해석일 뿐입니다. 《82년생 김지영》이란 소설과 연관된 일들이 우리 사회에서 문제로 불거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페미니즘이 그간 우리 사회에 제기해온 문제들이 온당하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는 듯합니다. 《82년생 김지영》의 영화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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