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사/보도

포털의 갑질, 부산대 한국어 맞춤법 검사기 논란

by 생각비행 2016. 8. 18.

출판 편집자, 기자, 공무원 등 한국어로 업무를 하며 맞춤법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분들이라면 [한국어 맞춤법/문법 검사기]의 도움을 꽤 받으셨을 줄 압니다. [한국어 맞춤법/문법 검사기]는 부산대학교 인공지능연구실과 ㈜나라인포테크가 함께 서비스 하는 검사기죠.


출처 – 부산대학교 맞춤법 검사기

 


부산대학교 전기컴퓨터공학부 권혁철 교수가 'SNS'와 '인터넷'은커녕 '컴퓨터'라는 말조차 생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던 1992년부터 개발해온 서비스로 이를 통해 은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죠. [한국어 맞춤법/문법 검사기]는 저사양 컴퓨터나 느린 인터넷 환경에서도 큰 불편 없이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시스템에 부담을 주지 않고 가볍게 돌아갑니다.

 

[한국어 맞춤법/문법 검사기]는 문맥에 따른 오류를 고치는 규칙 2만 3000개, 오류 패턴 20만여 개 이상을 탑재해 입시 철이나 입사시험 기간에는 하루에 약 40만 건 이상의 문건을 처리한다고 합니다. 또한 도움말이 8만 가지 이상으로 풍부히 제공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말 배움터'는 한국어 평생 교육에 대한 뜻을 바탕으로 운영되고 있기도 하지요. 이처럼 [한국어 맞춤법/문법 검사기]는 컴퓨터를 이용해 인터넷 환경에서 한국어로 일하는 사람이라면, 아예 안 써봤을 수는 있어도 한 번만 써봤을 리는 없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인기 있는 서비스입니다.

 

그런데 최근 제작자인 권혁철 교수의 페이스북에 안타까운 글이 올라왔습니다. 24년 동안 개발한 [한국어 맞춤법/문법 검사기]를 대형 포털 사이트인 네이버와 다음에서 거의 베끼다시피 가져가 서비스하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출처 – 권혁철 교수 페이스북


권혁철 교수의 설명을 보면 [한국어 맞춤법/문법 검사기]는 규칙 하나 만드는 데 하루가 걸리지만 다른 사람이 만든 걸 보고 추가하는 데에는 1분도 안 걸린다고 하는군요. 그러므로 자본력과 컴퓨팅 파워 그리고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포털 사이트라면 26년 동안 개발한 결과물을 6개월 만에 거의 따라잡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출처 - 네이버

출처 - 다음


권혁철 교수가 페이스북에 공유한 글의 내용으로 설명해 드리자면, 10년 전 네이버 과장이 와서 맞춤법 검사기 서비스를 네이버에서 하게 해줄 테니 돈을 내라고 했답니다. 이를 웃어넘겼더니 6개월 후쯤 무료로 해주겠다고 하고 6개월쯤 더 지나자 연 5000만 원 줄 테니 달라고 했답니다. 그 이상은 비싸서 안 된다고요. 네이버의 무례함에 화가 난 권 교수는 월 5000만 원은 내야 하고 너희 회장이 직접 와야 한다고 쏘아줬다고 합니다. 그러자 네이버는 부산대가 돈독이 올랐다는 소문을 퍼뜨렸다고 합니다.

 

권 교수가 로마자 변환기를 만들었더니 곧바로 네이버도 따라 만들었고, 다음의 경우는 API를 무료로 공개해버렸답니다. 상업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말이죠. 이 때문에 부산대 권 교수 측이 진행하던 은행과의 계약 건이 모두 엎어졌다고 하네요. 현재 99퍼센트가 [한국어 맞춤법/문법 검사기]를 무료로 사용하는 사람들이어서 권 교수 측은 1년 수입이 2억 정도에 불과하지만 어렵게 개발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두 대형 포털 중 한 곳은 권 교수 측의 결과물의 자료 조사(리버스 엔지니어링)에만 8명을 투여했다고 합니다. 그 돈만 따져도 권혁철 교수팀 연수입의 2배입니다. 참고로 부산대 인원은 5명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현재 그나마 부산대 팀이 내는 매출은 방송사와 신문사의 오류 검사용 판매분이라고 하는군요.

 

현재 맞춤법 검사기의 성능은 부산대 권혁철 교수팀의 것이 앞서고 이후 다음, 네이버 순이라고 합니다. 네이버는 부산대 맞춤법 검사기를 참고했다고 밝혔고 다음은 부산대와 네이버를 참고했다고 밝혔죠. 맞춤법 검사기의 API를 공개했던 다음 측은 권혁철 교수의 페이스북 글이 사람들의 호응을 얻자 API를 비공개로 전환했습니다. 그렇지만 부산대 권혁철 교수팀과 계약하려던 업체 일부들은 다음이 공개한 API 사용을 고려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느 분야든 선행 연구의 업적을 분석하여 개선하는 것이 당연한 과정이긴 합니다만, 네이버와 다음의 서비스가 포장만 바꾼 수준의 표절인지 아닌지는 법적으로 다룰 사안으로 보입니다. 더구나 거대 기업이 작은 대학연구팀을 상대로 벌인 일이기 때문에 윤리적으로도 충분히 비난받을 수 있는 문제입니다.

 

출처 - 한국경제


사실 이 문제가 IT 산업이 제대로 발달해 있는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부산대 맞춤법 검사기를 사이에 두고 대기업인 네이버와 다음이 인수·합병(M&A) 전쟁을 벌였겠죠. 선도적인 연구와 결과물을 낸 권혁철 교수팀은 합당한 부를 거머쥐고, 인수한 포털은 이를 가다듬어 더 좋은 서비스를 내는 것이 순리였을 겁니다. 유튜브도, 인스타그램도 구글과 페이스북에 천문학적인 가격으로 인수되어 시대를 대표하는 서비스로 성장했죠.


출처 - https://medium.com/@iox


하지만 이번 한국어 맞춤법 검사기 사례만이 아니라 한국의 스타트업의 출구(Exit) 전략은 절대 다수가 주식상장, IPO입니다. 인수·합병을 통해 스타트업이 '엑시트'하는 경우는 2퍼센트가 채 안 됩니다. 미국 스타트업의 경우 반대로 엑시트의 80퍼센트 이상이 M&A로 이루어집니다. 앞서 말씀드린 구글이 유튜브를 인수하고, 페이스북이 인스타그램을 인수한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나라 스타트업들이 IPO에 이르는 기간은 평균 12년에 달합니다. 7년인 미국 스타트업 평균에 비하면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기간입니다. 이는 우리나라 IT 산업이 정당하게 기업을 인수하거나 아이디어를 사기보다 하청업체를 쥐어짜거나 적당히 베껴서 규모로 찍어 누르는 걸 선호한다는 뜻입니다. 가장 창조적이어야 할 IT 산업조차 제조업 재벌의 구조를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포켓몬 고를 우리도 만들어야 한다'느니, '닌텐도 같은 게임업체를 우리는 왜 못 만드나' 같은 소리만 하다 세금 도둑들에게 사기만 당하기 일쑤입니다. '창조경제' 같은 뜬구름 잡는 소리는 이제 그만해야 합니다.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이를 바탕으로 삼아 더 새로운 서비스를 창출하는 기업 문화부터 정착되어야 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