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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한국형 알파고? 한국 사회 진단부터 제대로 해야

by 생각비행 2016. 3. 21.

한국을 대표하는 국수 이세돌 9단과 구글 딥마인드의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 사이에 이뤄진 세기의 대결이 1승 4패로 막을 내렸습니다. 마치 월드컵을 보는 듯한 기분으로 인간 대표인 이세돌을 응원하신 분이 많으셨을 줄 압니다. 호언장담하던 이세돌의 예상과 달리 알파고가 4승을 올린 결과에 대해 '인공지능이 여기까지 성큼 다가왔구나' 하고 놀라신 분들도 계실 테고, 바둑을 둔다는 것의 의미와 그 아름다움을 살린 인간 이세돌의 1승에 감동하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아무튼 세기의 대결에 쏠린 관심을 배경으로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 끼치게 될 영향력에 대한 담론과 기사도 부쩍 많아졌습니다.


출처 - 허핑턴포스트


박근혜 정권은 창조경제란 이름으로 이번엔 인공지능에 숟가락을 얹었습니다. 이른바 '한국형' 알파고를 만든다며 5년간 3조 5000억 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한 겁니다. 미래창조과학부(미래부)는 우선 올해 300억 원을 투입해 지능정보기술 연구소를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SK텔레콤, KT, 네이버 등과 함께 설립한다고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5일 국무회의에서 인공지능 중심의 4차 산업혁명은 거스를 수 없는 세계적 현상이라며 인공지능을 자신이 직접 챙기겠다고까지 언급했습니다. 대통령이 나서서 직접 챙긴다고 '한국형' 알파고를 만들 수 있을까요?



벌여놓고 수습 안 하는 '한국형' 타령은 인제 그만

 

미래부의 인공지능 사업 육성 발표에 일각에선 우려의 목소리를 내놓았습니다. 당연합니다. 지난 이명박 정권은 강물에 국민의 혈세를 흘려보내더니 이번 정부의 눈먼 돈은 인공지능이냐는 성토입니다. 기초과학을 무시하는 한국의 풍토와 이미 벌어진 선진국과의 격차 등을 놓고 볼 때 한국형 알파고는 총선을 의식한 박근혜 정권의 냄비 정책일 뿐이니까요. 한마디로 진정성이 없습니다. 과학 분야는 하나의 연구 과업을 끈기 있게 기다려 결과가 쌓여야 발전이 있습니다. 정치권의 포퓰리즘 정책에 따라 단기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예산 집행으로 무슨 발전을 볼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정부가 주도해 '한국형 ○○'를 만들겠다고 했던 것 중에 제대로 진행되고 있거나 결과를 낸 것이 있습니까?

 

출처 - 경향신문


2004년 마이크로소프트(MS)의 영향력을 줄이고 공개 소프트웨어 기반의 안정적 프로그램 개발을 지원하겠다는 취지로 '한국형 리눅스' 개발 프로젝트가 진행돼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부요(BOOYO)'를 개발했습니다. 제대로 된 리눅스라면 공개하는 게 맞습니다. 카피레프트를 기반으로 하는 리눅스 중에 성능 좋은 게 널렸죠. 하지만 현재 부요를 쓰는 사람은 전무합니다.

 

이명박 정부는 2010년 세계 4대 곡물 유통기업인 카길처럼 안정적 곡물 확보를 위해 '한국형 카길' 사업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곡물 유통망 확보조차 못 하고 2014년에 사업을 접었습니다. 남은 건 사진 박은 공직자들과 눈먼 돈에 달려든 장사꾼들뿐입니다.

 

2011년 지식경제부는 구글 안드로이드에 대항할 수 있는 '한국형 모바일 운영체계'를 개발하겠다고 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이라면 5년이 지난 지금 한국형 모바일 OS가 있기나 한 건지 존재조차 모르실 정도로 의미 없는 사업이었습니다.


출처 - 미디어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유튜브 최다 조회수 신기록을 경신할 때 숟가락을 올렸던 '한국형 유튜브' 사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래부 주도로 2013년 말부터 진행되어 10억 원의 예산을 들여 만든 결과물인 'K-ContentBank', 기억하십니까?

 

현실이 이렇다 보니 정부가 주도하는 '한국형 ○○'은 전문가들 사이에 그냥 구림, 개악의 대명사로 전락했습니다. 현실인식 없이 전문가들의 분석과 판단을 무시한 채 정부가 정했으니 기업은 따르라는 독재 정권 시절 관치 사업의 잔재가 아직도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21세기 첨단 산업의 총아라는 인공지능이 우리나라에서, 그것도 정부 주도 사업으로 나올 수가 있다고 보십니까? 그런데 박근혜 정권의 '한국형 인공지능' 숟가락 얹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출처 - 연합뉴스


미래부 제2차관은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 승리한 제4국장에서 서비스산업발전법이 통과된다면 우리도 인공지능 개발에 속도를 붙일 수 있다는 해괴한 소리를 떠벌였습니다. 서비스산업발전법은 박근혜가 국회에 처리를 요구한 경제 개악 3법 중 하나로 의료, 보건, 교육 등 공공의 영역을 사실상 민영화하자는 악법입니다. 인공지능과 하등 상관없는 악법까지 끌어와 숟가락 올리는 해괴망측함만큼은 박근혜식 창조경제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 같네요.

 

출처 - 미디어오늘



연구보다 체면부터 차리는 한국 과학계


지난 13일 한국파스퇴르연구소는 세계적인 과학저널 《네이처》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과학 현실을 폄하했다는 이유로 미국의 유명 암센터 교수 출신인 하킴 자바라 연구소장을 해임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경력도 업적도 상관없이 한국 과학 현실을 부정적으로 인터뷰하여 한국 과학계의 체면을 실추시켰다는 어이없는 이유를 내세웠습니다. 그런데 과연 하킴 소장이 악의를 가지고 없는 사실을 만들어가며 인터뷰를 한 걸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출처 - 네이처




하킴 소장은 《네이처》의 구직활동 안내서 코너에 <SOUTH KOREA>라는 제목으로 인터뷰를 했습니다. "논문조작으로 세계 유명 저널 편집자들이 한국의 연구자들이 결점이 있다고 판단해 논문 게재가 어렵고, 학연, 지연 문화로 인해 연구과제 선정 및 정부 지원금에 공정성, 투명성이 부족하고 외국인의 과제 수탁에 어렵다, 한국사람들은 '한국에 오면 너의 조건을 들어줄게'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사전에 반드시 문서화 필요" 등의 발언을 했습니다.


황우석 사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인터뷰 내용 중에 사실이 아닌 것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하킴 소장의 인터뷰는 한국에서 생활하는 외국인 소장으로서 한국 과학계의 폐단을 알리고 비판한 것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금을 받는 주제에 감히 한국 과학계에 쓴소리를 하다니 건방지다는 이유로 그는 해임되고 말았죠. 연구나 업적보다 체면과 서열부터 챙기는데, 대체 어떻게 인공지능을 운운하고 과학의 발전을 꾀할 수 있단 말입니까? 큰 업적을 쌓은 외국인 과학자에 대한 처우조차 저런데 국내에서 연구하는 한국인 과학자들의 입장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다양성 말살하는 한국 교육이 알파고를 운운하는 아이러니


딥마인드를 세워 알파고를 만들고 구글에 인수되어 이번 대국까지 성사시킨 데미스 하사비스는 영국 출신 천재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습니다. 올해 갓 마흔을 넘긴 그는 13살에 체스 마스터에 올랐고 세계랭킹 2위였습니다. 그가 인공지능에 눈뜨게 된 계기가 바로 게임이었습니다. 17살에 게임계의 전설적인 거장 피터 몰리뉴와 함께 세계적 히트작인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 테마파크를 공동 개발했습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다니면서 그는 또 한 번 피터 몰리뉴와 함께 블랙 앤 화이트란 게임을 만들죠. 게임 플레이어가 문자 그대로 신이 되어보는 경험을 할 수 있는데 이 게임에는 크리처라는 인공지능으로 작동하는 캐릭터가 나옵니다. 하사비스는 이 게임에서 크리처를 비롯한 다양한 인공지능 프로그래밍을 담당했습니다. 그 이후 사업을 접고 대학으로 돌아간 후 신경과학 연구를 진행합니다. 이후 딥마인드를 창업해 딥러닝 기술을 바탕으로 인공지능 알파고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구글에 5000억 원에 인수되고 수십조 원의 가치를 인정받은 인공지능은 이처럼 게임으로 인해 본격적인 실험의 장을 얻고 개화한 셈입니다.


출처 - 한국일보


이번 이세돌과 알파고 사이에 이뤄진 바둑 대국으로 인해 인공지능이 주목을 받자 우리나라에서는 '코딩 사교육'이란 말부터 튀어나왔습니다.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인해 사라져버릴 일자리 1순위인 대기업 사무직을 위해 사교육을 그렇게 시켜대더니 이제는 코딩을 사교육 하겠답니다.




출처 - KBS


우리나라에서 학부모와 정부가 게임을 탄압하던 것이 바로 어제의 일입니다. '나영이 주치의'라는 프로필로 홍역을 치른 새누리당 신의진 의원 같은 사람이 게임을 마약으로 낙인 찍었죠. 하지만 알파고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게임이라는 단계가 없었다면 최첨단 인공지능 기술도 나올 수 없었습니다. 게임의 좋고 나쁨을 떠나 아이가 이루고자 하는 무언가를 폭넓게 경험해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곧 창의성의 첫걸음일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육은 다양한 경험과 창의성을 존중하고 있습니까?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출처 - 경향신문

 

우리나라에는 앞으로도 이세돌, 김연아 같은 낭중지추 같은 천재들이 등장할 겁니다. 하지만 이들이 창의성과 꿈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비뚤어진 사교육으로 내몰리기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장기적인 투자도 비전도 없이 인기에 영합하는 정책만을 세우는 정부, 수십·수백 조의 사내유보금을 쌓아놓고도 미래 가치에 투자하거나 작은 기업들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기는커녕 골목상권이나 넘보는 대기업들, 남을 짓밟더라도 제 자식만 잘되면 된다는 획일화된 생각으로 로봇 같은 아이들을 키워내는 것을 교육이라 우기는 부모들. 바로 이런 사람들 때문에 우리나라는 정치, 경제, 교육 그리고 문화 모든 면에서 점점 더 낙후되고 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대한민국 대통령과 정부는 '한국형 인공지능'을 운운하기에 앞서 한국 사회 진단부터 제대로 해야 할 텐데, 유신시대를 거슬러 일제 식민지 시대로 역사의 시곗바늘을 되돌리려 하는 세력이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고 있으니 걱정이 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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