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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정규직 되려면 옷 벗으라는 출판사의 갑질

by 생각비행 2014. 9. 22.

과거 남양유업 사태로 폭발한 '갑'의 횡포 때문인지 켜켜이 쌓인 분노가 사회적으로 표출되는 일이 빈번합니다. 분노한 '을'들의 제보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최근 갑의 횡포에 따른 성희롱, 성폭력 문제를 보도하는 언론 기사를 자주 접합니다. 국가기관과 공직자부터 사기업 임원에 이르기까지 이 시대에 갑질이 만연합니다. 

 

최근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골프장 캐디의 가슴을 만져 물의를 일으킨 뒤 "손녀 같아서" 그랬다며 치졸한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성희롱이나 성폭력이 남성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성적 본능 때문에 일어나는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의외로 많습니다. 하지만 실생활에서 벌어지는 성희롱과 성폭력 사건의 대부분은 우발적인 판단 착오로 발생하는 문제라기보다는 힘, 즉 구조적인 권력의 문제로 파악하는 편이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왜 이 지경일까? 일부 주장처럼 '남자의 성 욕구는 본능적'이고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강해서'일까? 그렇다면 그 본능적 욕구는 왜 늘 높고 강한 사람이 낮고 약한 사람을 대할 때만 발동할까? 한국 남자들이 다른 인종이나 민족의 남자들보다 진화가 덜 된 미개한 인종집단일까? 게다가, 최근엔 여성 상관이나 직장 상사, 혹은 교사들이 남자 신입사원이나 학생들을 성추행하는 사건들도 늘고 있다. 지위가 높아지면 여성 성호르몬이 남성 성호르몬으로 바뀌고 남성적 성 욕구가 생기는 놀라운 '생물학적 변화'가 발생하는 것일까?


[표창원의 단도직입]'성(性) 갑질'을 멈추게 하라(경향신문)


우리 사회에서 권력 구조상 상위에 있는 사람이 힘과 신분을 앞세워 발생하는 성희롱이나 성범죄가 비일비재한 현실입니다. 사회적 '갑질'도 이와 같은 구조에서 기인합니다. 만일 박희태 전 국회의장 옆에 있던 여성이 대통령의 측근이었다면 감히 손가락이나 델 수 있었겠습니까? 힘없고 하소연할 데 없는 사람들이 성희롱과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 정규직 되고 싶으면 벗으라는 현실

 

 

출처 - 쌤앤파커스


최근 출판계에서도 어이없는 성범죄가 불거져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김난도 서울대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대표작으로 《이기는 습관》 《가슴 뛰는 삶》 《세상에 너를 소리쳐》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등 매년 베스트셀러를 쏟아내며 성장한 쌤앤파커스 출판사는 최근 발생한 성추행 문제로 며칠간 언론에 오르내렸습니다.

 

아시다시피 여성으로서 입지전적인 성과를 이루어낸 박시형 쌤앤파커스 대표는 많은 여성의 롤모델이자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박시형 대표를 롤모델로 삼아 177대 1의 살인적인 경쟁률을 뚫고 쌤앤파커스 마케팅팀 사원으로 취직한 책은탁 씨(@Bookistak)도 언젠가는 박시형 대표 같은 사람이 되기를 꿈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밝지 않았습니다. 쌤앤파커스 출판사의 베스트셀러 제목처럼 안 그래도 힘든 청춘을 아프게 만들기로 작정했는지 쌤앤파커스 출판사는 책은탁 씨를 수습사원 신분으로 무려 17개월 동안이나 일하게 했습니다. 3개월도 6개월도 아닌 17개월 동안 수습사원 신분으로 일을 시키다니 같은 출판계 종사자로서 할 말이 없습니다. 있어서는 안 되는,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쌤앤파커스 출판사는 이 부분에 대해 책은탁 씨에 대한 내부 평가가 엇갈려 재차 수습 기간을 연장하였고 "수습 기간 6개월이 되는 시점부터 정직원과 동일한 급여와 복지를 제공했고, 그와 동일한 업무가 부여되었습니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직원과 똑같은 대우를 해준다면 정직원으로 채용하면 될 일이지 왜 17개월간 수습사원 신분으로 일을 하게 했던 걸까요? 뭔가 잘못을 저지르기만 하면 바로 해고할 수 있도록 하려 했던 건 아닐까요? 기형적이고 비상식적인 대한민국 기업의 현실을 고려하더라도 쌤앤파커스의 이상한 조처를 보면 상식이 있는 출판사인지 의구심이 듭니다.


책은탁 씨가 17개월의 수습기간을 끝내고 정규직 전환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인사권자인 상무가 최종 면담격인 술자리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술자리 후 자리를 자신의 오피스텔로 옮긴 상무는 A 씨에게 옷을 벗을 것을 요구하고 침대로 끌고 가 입을 맞췄습니다. 술에 취한 책은탁 씨는 그 시점에서 저항하기 어려웠으나 나중에 뛰쳐나와 1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정신을 잃었지만 주민의 도움으로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남에게 밝히지 못할 치욕스러운 일을 겪은 뒤 정직원이 되긴 했으나 이런 일이 자신만이 아니었고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가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지난해 7월 사내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출처 - 아시아투데이


사실이 공개되자 상무는 회사를 그만뒀지만 책은탁 씨는 내부고발자로 몰려 9월에 쌤앤파커스를 사직하게 되었습니다. 치욕스러운 일을 겪으면서까지 얻어낸 정규직을 말입니다. 사직하면서 이 상무를 성추행으로 고소했지만 서울서부지검은 올해 4월 어이없는 판결을 내립니다. 이 상무가 옷을 벗으라고 요구한 것이나 키스를 한 사실 등은 인정되지만 책은탁 씨가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며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한 겁니다. 

 

선거에 관여한 것은 인정되지만 선거법 위반은 아니라는 최근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과 똑같은 판결이 아닐 수 없습니다. 피해 당사자가 뛰쳐나와 도망치기까지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더 저항하라는 걸까요? 성추행 혐의가 분명한데도 어이없는 판정이 나오는 한심한 현실입니다.


쌤앤파커스 출판사는 법원의 무혐의 처분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 상무를 복직시켰습니다. 책은탁 씨는 재정신청을 했습니다. 그러자 돕겠다는 동료들이 나섰습니다. 그들이 밝힌 이 상무의 추태는 눈 뜨고 못 봐줄 정도입니다.


 

이 출판사의 전 직원 ㄴ씨는 “이 상무는 회식 때마다 여직원들만 한 명씩 이름을 부르며 껴안았고 거부하면 ‘살려면 어쩔 수 없는 거야’라고 했다. 저자와의 룸살롱 접대 자리에도 여직원들을 데리고 나가 블루스까지 추게 했다”고 재정신청을 위한 증인진술서에서 밝혔다. 이 회사는 저자, 유관업체, 타출판사 관계자를 초청한 송년회 때 여직원들을 드레스 등을 입게 한 뒤 각 테이블에 한 명씩 배치했다고 한다. ㄴ씨는 “나도 피해자였다. 한번은 술 취한 채 전화를 해 내가 사는 집 호수까지 대며 ‘술자리에 나오지 않으면 (집으로) 올라가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ㄱ씨의 전 동료 ㄷ씨도 증인진술서에서 “인사권을 가진 이 상무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며 “ㄱ씨의 재정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법원에 출석해 진술하겠다”고 했다.


유명 출판사 상무 성추행 사건 뒤늦게 공개… 여직원 “수습 때 오피스텔 데려가 옷 벗으라 요구”(경향신문)


‘살려면 어쩔 수 없는 거야’라는 이 말에 권력과 직위를 통한 갑질의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아픈 청춘을 무려 17개월이나 수습사원으로 일하게 하고 정규직 채용 권한이 있는 인사권자인 이 상무에게 다른 직원들은 모두 을로 보였겠지요. 쌤앤파커스는 법률대리인을 통해 회사는 중립적으로 법대로 하고 있다며 무혐의 처리된 이 상무의 복직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이미 성추행 사실 자체는 모두 인정된 상황인데 여성 대표로서 피해 여성의 어려움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박시형 대표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쌤앤파커스 신입사원 초봉이 3000만 원 수준이라고 자랑하기 바빴습니다. 17개월이나 수습사원 신분으로 일을 시킨 회사의 대표가 말입니다.

출처 – 조선일보


 

난 대학졸업하고 2005년까지 별로 유명하지 않은 출판사 한 곳에서만 20년 동안 편집자로 일했다. 그 사이에 출판사 잘되는 것은 봤어도 편집자가 잘되는 것은 보지 못했다. 운동권 출신이라는 출판사 사장들조차 돈 많이 벌어 직원들에게 적정하게 되돌리기보다는 사옥이나 짓고 자기만 부자가 됐다. 출판계 하면 '박봉'을 떠올리는 직군이 돼버렸다. 이래서야 어떻게 좋은 인재들이 출판에 뛰어들겠는가? 그러니 독자 수준과 동떨어진 책이나 내고 독자들이 외면하니 불법 편법 마케팅이 판을 치고 경영은 악화되고 사장들은 엉뚱한 재테크나 하고 다니게 되는 것이다.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돌리지 않으면 출판계의 미래는 없다고 본다.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첫 걸음이 직원들의 연봉을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한우의 聽談] '떠오르는 출판권력' 박시형 쌤앤파커스 대표(조선일보)


언론의 보도만으로 본다면 쌤앤파커스는 정말 떠오르는 출판 ‘권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성 대표로서 자기 회사에서 벌어진 성추행 당사자를 복직시킨 행위를 보면, 자신이 욕하던 부자 된 운동권 출판사 사장과 전혀 다를 바가 없어보이니까요. 박시형 대표는 성추행 사건이 공개된 이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떤 이익을 대가로 성을 요구하는 사람은 당연히 물론, 충분히 거절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그것에 응하는 사람도 징계를 받아야 한다”고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해질 정도입니다. 피해자로 나선 사람이 한둘이 아닌 상황에서 어떻게 출판사 대표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걸까요? 




출처 - 트위터


피해자인 책은탁 씨는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트위터에 상무가 가해자고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명확히 가리는 것이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세월호 유족들이 보상을 마다하고 진실이 명백히 밝혀지기만을 바라는 것처럼요. 책은탁 씨의 바람이 이뤄지려면 재정신청이 받아들여지고 재판이 열려 유죄 판결이 내려져야 합니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성추행 성희롱의 갑질을 멈춰라!

[성명] 사내 성폭력에 눈감는 출판사 쌤앤파커스는 각성하라

(전국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 출판분회)

http://cafe.naver.com/booknodong/2270


사내 성폭력 사건이 불거진 후 전국언론노조 출판분회는 성명을 내고 책은탁 씨를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누리꾼들을 중심으로 사내 성폭력 사건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시민들의 연대 움직임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혜민 스님이나 조국 교수처럼 쌤앤파커스에서 책을 낸 저자들이 이 사건에 대해 공적인 목소리를 내주기 바랍니다. 그들이 저서에서 한 말이 진심이라면 응당 그렇게 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성(性) 갑질'이 더 문제인 이유는, 가해 행위가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피해자는 극도로 수치심을 느껴 큰 충격과 긴 후유증에 시달리는 데 반해 신고나 항의 혹은 피해구제 노력을 하기 어렵다는 특성 때문이다. 만약 '성(性) 갑질' 피해 사실을 알리거나 신고할 경우 피해자들을 도와야 할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오히려 숨기고 무마하려 애쓰거나 피해자에게 불이익을 가하기도 한다. 가해자들은 이런 피해자들의 약점을 너무 잘 알고, 서로 공유하거나 학습하면서 '성(性) 갑질'을 상습적으로 저질러왔다. 이제는 멈춰야 한다. 부끄럽고 안타깝게도 누이와 딸과 손녀를 생각하라며 '갑들에게 반성과 자각'을 호소해 봐야 효과가 없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을 고소한 용감한 골프장 경기진행요원 같은 '을'들의 자기 권리 찾기 노력과 이들의 용기와 노력을 지키고 보호하고 북돋워 주는 국가와 사회의 시스템이 '성(性) 갑질'을 멈추게 해야 한다. '발본색원' '4대 악 척결' 같은 용어는 '성(性) 갑질'에 적용되어야 한다.


[표창원의 단도직입]'성(性) 갑질'을 멈추게 하라(경향신문)


'을'의 신분에 따른 학습된 무기력함을 어쩔 수 없다며 묻어버리면 권력을 이용한 성추행은 끊임없이 반복될 것입니다. 을의 용기 있는 발언과 행동은 물론 그들에게 피해가 돌아가지 않게끔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가해자를 엄하게 벌할 법률 그리고 애초에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다양한 예방책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책은탁 씨의 용기 있는 발언과 행동에 상응하는 정의로운 결과가 나오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언론의 보도가 뒤따르자 상무는 사직서를 냈고 박시형 대표가 이를 수리하긴 했습니다. SBS라디오 <한수진의 SBS 전망대>에서 피해자 책은탁 씨와 쌤앤파커스 대표를 인터뷰한 내용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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