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사/보도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는 우리의 초상

by 생각비행 2022. 5. 8.

올해로 어린이날이 10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참혹한 현실 속에서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어 이들의 인권을 존중해줄 것을 당부하고 아이들이 골고루 행복을 느끼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든 날이죠. 방정환 선생은 "대륙이나 전기의 발견보다 어린이의 발견이 더 위대합니다"라는 말을 남긴 바 있습니다.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이한 지금, 우리는 위대한 발견인 어린이를 그만큼 소중히 대하고 있을까요?

 

출처 - 국민일보

 

안타깝게도 '어린이'라는 단어 자체가 혐오에 오염되어 가고 있습니다. 방정환 선생이 하나의 인격체로서 사람답게 대해야 한다는 뜻에서 만든 어린이란 단어를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어떤 분야에서 수준에 미달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미숙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낮춰 쓰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 공감신문

 

주식투자를 막 시작해서 잘 모르는 사람을 '주린이', 요리를 막 배우기 시작해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사람을 '요린이', 토익 공부를 막 시작한 사람을 '토린이'로 부르고 있습니다. '어린이'라는 말은 17세기부터 써온 말이지만, 100년 전 방정환 선생이 유년과 소년을 대접하고 본래 없었던 높임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격상한 단어입니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 좋았던 의미가 퇴색된 모습을 보면 방정환 선생 앞에서 부끄러울 일입니다.

 

출처 - 경향신문

 

예전부터 쓰던 '초딩', '급식충', '잼민이' 같은 단어는 아동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조장할 수 있는 혐오 표현에 가깝습니다. 혐오 표현이 고착화하면 차별로 이어지고 사회적인 문제로 불거집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교육방송인 EBS마저 문제의식 없이 재미로 쓰는 지경입니다. 지난해 7월 EBS 공식 트위터는 ‘잼민좌’라는 단어를 사용해 논란을 일으키고 사과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잼민이는 여러 곳에서 민폐를 끼치는 무개념 저연령층을 뜻하는 표현으로 어원부터 혐오와 비하가 들어간 질이 낮은 표현입니다.

 

출처 - 인스타그램 / SBS

 

과거 찬반으로 의견의 분분했던 '노키즈존' 역시 어린이를 배제한다는 측면에서는 문제의 여지가 있습니다. 2017년 인권위는 합리적 사유 없이 나이를 이유로 아동을 배제하지 말 것을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권고'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업장의 편의에 따라 어린이를 배제하는 분위기를 무시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방정환 선생이 1923년 제1회 어린이날 기념식에서 낭독한 선언 중 첫 번째는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였습니다. 100년이 지난 현재 다시 과거의 상황이 되풀이되는 모습을 본다면 방정환 선생은 어떤 기분이 들까요?

 

출처 - 프레시안

 

이런 문제의식 때문에 어린이 차별을 실질적으로 철폐하기 위해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국가인권위나 UN아동권리위원회 등 국내외를 가릴 것 없이 인권 기관들이 한국 사회의 아동 차별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이를 시정할 법적인 수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2006년 인권위가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한 이후 17년이 지나도록 온갖 이유를 대며 미뤄온 것이 우리의 현 상황입니다.

 

출처 - MBC

 

얼마 전 우리나라 방송에서 세계적인 장난감 기업 레고의 경쟁 상대가 누구냐는 질문이 나온 바 있습니다. 뽀로로나 타요 등 다른 캐릭터나 장난감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레고 코리아의 경쟁 상대는 한국 교육 시스템이라는 답변이 나왔습니다. 한국 어린이들은 정말 우수하지만 그만큼 놀 시간이나 방법이 없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아이들의 주당 평균 학습시간은 OECD 평균의 두 배에 달할 정도입니다. 레고가 아니더라도 어린이들에게 놀이는 평화를 선물합니다. 어린 시절 놀이를 통한 심리적 안정감은 학업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입니다.

 

출처 - SBS

 

이런 이유로 방정환 선생은 아이들의 놀이를 위해 90년 전에 보드게임을 만들어 보급한 바 있습니다.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아 개최한 '오늘은 어린이날, 소파 방정환의 이야기 세상'에서는 그가 큰 애정을 가지고 제작한 보드게임판인 '세계발명말판'과 '금강껨'의 원본이 처음으로 전시되었습니다. 재밌는 보드게임을 만들기 위해 방정환 선생은 컬러 게임판을 만드는 데 잡지 7000권에 해당하는 돈을 쏟아붓기도 했습니다. 옛날부터 우리에게 놀이문화가 없었던 게 아니라 이를 지키지 못할 정도로 아이들을 몰아붙이는 사회 분위기가 문제라는 인식의 발로였습니다.

 

출처 - YTN

 

다행히 100주년 어린이날을 맞아 보건복지부는 올해 '아동기본법' 초안을 만들고 내년 중 제정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아동기본법은 어린이를 보호나 교육의 대상으로만 규정하지 않고 권리를 행사하는 주체로 인정하고 그 구체적인 권리를 선언하는 법입니다. 무엇보다 '놀 권리'가 교육만큼이나 중요한 권리로 보장받게 되며 의료서비스를 받을 권리, 발달권, 생존권, 참여권, 환경권 등 어린이가 누려야 하는 구체적인 권리들이 명시된다고 합니다. 국가가 어린이를 위해 건강한 성장환경을 조성해야 할 책임이 있고 보호자는 아이를 존중해야 할 책임이 있으며, 기업은 아이에게 유해한 환경 조성을 방지해야 한다는 점도 명시될 예정입니다. 이는 수십 년간 제기되었던 UN아동권리협약의 권고 사항이기도 합니다. 방정환 선생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어린이 뜻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출처 - 부산광역시

 

늦었지만 이제라도 권고를 받아들여 어린이의 권리를 명시적으로 선언하려고 한다는 점은 고무적입니다. 100주년 어린이날을 맞아 방정환 선생의 '어른에게 드리는 글'을 다시 한번 상기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