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집행유예 - 재벌의 3.5 법칙은 아직도 통하는가?

세기의 재판으로 귀추가 주목되었던 삼성의 이재용이 2심에서 집행유예로 감형되어 풀려났습니다. 박근혜와 최순실 측에 뇌물을 건넨 혐의 등으로 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 5년이 선고되었는데, 2심에서는 1심을 깨고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한 겁니다. 이재용뿐 아니라 삼성 미래전략실장이던 최지성과 차장이던 장충기도 2심에서 집행유예로 감형되어 석방되었습니다. 2심 판결에 대해 삼성 측은 재판부에 경의를 표한 반면 박영수 특검팀은 편파적이고 무성의한 판결이라며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2심에서 집행유예로 뒤집힌 이유는 1심에서 유죄로 인정된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후원금과 재산국외도피 부분이 무죄로 뒤집어진 게 형량에 크게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재판부는 국정농단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던 최순실의 딸 정유라에 대한 승마 지원은 1심과 마찬가지로 뇌물로 인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박근혜가 이재용에게 뇌물을 요구하고 최순실은 뇌물 수령으로 나아갔다며 박근혜와 최순실의 뇌물 관련 공모 관계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정확히는 말을 '빌려준 것'에 대해서만 뇌물로 인정했고, 말의 '소유권'과 '구매 대금' 등은 뇌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으니까요.


출처 - 머니투데이


게다가 뇌물공여와 함께 적용된 재산국외도피죄가 무죄로 인정된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2심에서는 삼성이 최순실 소유의 독일 법인인 코어스포츠를 통해 송금한 승마지원금과 마필 구입대금 등에 대해 재산을 국외로 도피한 행위가 아니라는 해괴한 판단을 했습니다. 재산국외도피죄는 도피액 50억 원 이상일 때 무기 또는 10년 이상 징역이 선고되고 도피액이 50억 원 미만이어도 5년 이상 징역에 처하는 등 중형이 나오는 혐의입니다. 이 때문에 특검과 변호사 양측 모두 이 부분에서 첨예하게 대립했죠.


출처 - JTBC


이재용의 2심 선고 결과에 대해 시민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이 대부분입니다. 아무리 판사의 판결에 의한 법조문의 적용과 집행이 국민의 법감정과 다르다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판결문에 나온 표현은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라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관건이었던 재산국외도피죄가 무죄라면서 판결한 "재산 국외 도피 의사 없어, 단지 장소가 외국"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벌써 시민들이 패러디를 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시민들의 표현을 보노라면 재판부가 무죄 판결을 한 게 아니라 무죄를 주기 위해 참으로 노력했구나 싶습니다.

 

"범죄자 해외도피 의도 없어, 단지 방문 장소가 외국이었을 뿐"


"김정은 남침 의도 없어, 단지 진격 방향이 남쪽이었을 뿐"


"도둑 물건 훔칠 의도 없어, 단지 넣은 장소가 내 호주머니였을 뿐"


"염전 노예 주인 노예로 부릴 의도 없어, 단지 돈을 안줬을 뿐"


"부러진 화살 판사를 해할 의도 없어, 단지 석궁 앞에 판사가 있었을 뿐"


"이재용의 전재산은 원래 내 돈, 단지 이재용 통장 안에 들었을 뿐"



출처 - 페이스북


대부분의 시민이 느끼는 감정과 달리 이재용 석방을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삼성뿐 아니라 자유한국당 얘깁니다. 자유한국당의 김진태 의원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축! 삼성 이재용 석방"이라면서 그래도 아직 이나라에 희망이 아직 있다는 소릴 했습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좌파 정권 코드 인사를 해도 사법부가 아직 살아있다며 자유대한민국이 살아있음을 보여준 항소심 재판부에 거듭 경의를 표했습니다. 이처럼 자유한국당 패거리가 이재용 판결에 대해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것만 봐도 이 판결이 얼마나 국민의 법감정과 동떨어져 있고 잘못된 것인지 증명하는 것 같군요.


출처 – JTBC


그나마 이번 판결에서 건질 만한 것은 박근혜와 최순실이 뇌물 수수 공동정범이라는 것을 법원이 인정했다는 것, 항소심에서 인정된 36억 수뢰만으로도 박근혜와 최순실은 중형을 피하기가 한층 어려워졌다는 점 정도일 겁니다. 반대로 '삼성 공화국'이라는 표현을 실감할 정도로 이 나라의 최후 권력이 과연 재벌임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재벌을 대상으로 앞으로 어떤 개혁적 조치들을 해야 할지가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출처 - 연합뉴스


최후의 판단은 대법원에서 날 것입니다. 키워드는 묵시적 청탁이 인정될 것이냐에 달렸다고 보는 쪽이 많은데요. 박근혜와 이재용 사이에 명확한 청탁이 없었더라도 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금품을 주고받았다는 것을 법적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태까지 법원이 이 묵시적 청탁 법리에 대한 판단이 왔다 갔다 한다는 점입니다.

 

과거 전두환과 노태우 뇌물 수수에 관해 대법원은 묵시적 청탁을 인정했습니다. 청탁 내용이 특정되지 않아도 포괄적 뇌물죄를 인정할 수 있고 국정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대통령이기에 더욱 그렇다는 거였죠. 그런데 작년에 넥슨으로부터 주식을 수수한 진경준 검사장 재판에서는 이런 묵시적 청탁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대법원조차 진경준이 청탁을 받았다는 점을 일부 인정했음에도 말입니다.

 

국민의 법감정은 전두환, 노태우 때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과 사회 시스템에 간섭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저런 혐의를 더욱 엄중히, 어떻게 보면 가혹할 정도로 적용해야 한다는 쪽일 겁니다.


출처 - JTBC


이번 항소심에서는 적폐청산의 흐름 속에서도 한국 사회에 만연한 재벌 총수 3.5 법칙이 아직도 먹힌다는 걸 드러냈습니다. 다른 그룹 총수들은 휠체어 타는 환자 연기라도 했는데 이재용은 그런 시도조차 없이 걸어 나온 걸 보고서 사람들은 재벌 중에서도 '삼성은 환자 연기조차 필요 없구나' 하는 자조 섞인 농담을 합니다. 최근의 만평이 대한민국의 현실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들의 감정이 어떤지를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진정한 적폐청산은 아직 시작도 안 됐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하루였습니다. 이재용과 삼성이 아니라 필부필부였다면 법원은 과연 같은 판결을 내렸을까요? 추후 대법원에서 정의로운 판결이 내려질 수 있도록 국민이 관심을 기울이고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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