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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지옥은 텅 비었고, 모든 악마들이 헬조선에 있도다

by 생각비행 2016. 9. 29.

"지옥은 텅 비었고, 모든 악마들이 여기에 있도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희곡 〈템페스트〉에 쓴 구절입니다. '1% 대 99%'라는 구호가 상징하는 자본주의의 불평등한 현실을 월스트리트의 실상 폭로로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책, 《모든 악마가 여기에 있다》의 제목이 바로 이 구절을 빌려 쓴 것이기도 합니다. 셰익스피어가 쓴 구절을 우리 사회에 적용한다면 이 글의 제목 "지옥은 텅 비었고, 모든 악마들이 헬조선에 있도다"가 될 겁니다. 어떻습니까? 실제로 그러하지 않습니까?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 시위에서 경찰이 직사한 살인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1년여 동안 사경을 헤매던 백남기 농민이 지난 25일 숨졌습니다. 억울한 죽음 자체가 참담한 일인데, 더 잔악한 일은 그다음부터였습니다. 국가공권력에 의해 명백히 살인을 당한 분에게 대통령이 사과하고 배상을 말해도 늦을 이때, 박근혜 정부의 선택지는 다름 아닌 독재정권 시대에 횡행하던 시체 탈취와 강제 부검이었으니까요.


지난 25일 백남기 농민이 사망하자마자 경찰은 서울대병원을 압수수색하고 법원에 부검 영장을 청구했으나 기각당했죠. 하지만 재청구 끝에 28일 법원의 부검 영장을 발부받습니다. 법원은 부검 방법과 장소에 관해 유족의 의사를 반영할 것을 전제로 영장을 발부했다는 핑계를 달았지만, 유가족과의 합의가 아닌 협의만으로도 영장을 집행할 수 있게 했기 때문에 경찰이 독재 시대처럼 대부대를 이끌고 강제 집행으로 시체를 탈취할 조건을 갖춰준 것입니다.


출처 - SBS


당연한 얘기지만 유가족은 백남기 농민의 부검을 명백히 반대하고 있습니다. 시위 당시 CCTV 화면과 다른 증거들을 봐도 경찰이 직사한 살인물대포에 의해 발생한 뇌출혈이 그동안의 투병과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임이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경찰이 이토록 집요하게 강제로까지 부검을 집행하겠다는 것은, 독재 시대 때처럼 어떻게든 법의학적 원인을 만들어 고인이 물대포가 아닌 지병으로 숨졌다는 소리를 하고 싶기 때문일 겁니다.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는 핑계가 저들에겐 절실한 겁니다. 악마가 따로 없습니다.


외신은 평화로운 장례식을 왜 수백 명의 경찰이 감시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국가공권력에 의해 사망한 사람의 장례식을 국가공권력이 감시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도 안 되고 말도 안 되는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지난 28일 마이나 키아이 유엔 평화적 집회 및 결사의 자유 특별보고관은 백남기 농민의 사망 소식과 관련해 경찰의 물대포 사용에 대해서는 독립된 기관에서 철저한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진상조사를 통해 가해자에게 상응하는 처벌을 하고 유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면서 키아이 유엔보고관은 유가족이 부검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한국 정부에 촉구했습니다.



출처 - 서울신문


이 땅의 악마들을 제외하고는 백남기 농민의 부검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에 대한 서울지방법원 판결문에 경찰이 직사살수로 백남기 씨에게 뇌진탕을 입게 했고 응급차량에까지 직사살수를 해 이때의 경찰의 시위 진압은 의도적이든 조작적이든 실수든 그게 뭐든 간에 위법한 것이었다고 명시하는 법적 판단이 이미 나왔기 때문입니다. 

출처 - 경향신문


게다가 경찰은 살수차 운용 지침을 위반한 당사자이므로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직사살수할 때는 안전을 고려해 가슴 이하 부위를 겨냥해야 한다고 했지만 지켜지지 않았고, 최루액 혼합살수도 경고살수 없이 처음부터 섞어 쓴 것 또한 지침 위반이었습니다. 살수차 사용 중 부상자가 발생한 경우 즉시 구호조치하고 지휘관에게 보고한다는 지침을 지키긴커녕 구호하러 온 응급차량에까지 직사살수한 것이 영상자료로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경찰이 법과 지침을 어겨 공권력을 남용해 무고한 시민을 죽인 것이 너무나 명백합니다.


출처 - 뉴스타파


출처 - 이데일리


지금까지 다양한 정권에서 무고한 시민이 시위 도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해왔습니다. 하지만 독재정권의 후예인 노태우 정부 때도 내무부 장관을 경질했고, 하다못해 이명박 정부조차 대통령이 사과하고 경찰청장 내정자가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에서는 경찰청장이 사과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평화로이 고인을 보내드려야 할 장례식장을 되레 경찰들로 봉쇄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이 헬조선임은 명백합니다. 헬정치로 무고한 시민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있어야 할 악마들이 헬조선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법원이 부검 영장을 발부하자 백남기 농민의 딸인 백도라지와 백민주화 씨 등 유족 대표는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만든 이들의 손이 다시 아버지에게 닿게 할 수 없다"고 하며 사인이 명확한 만큼 부검은 필요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막을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아버지를 지키겠다"고 말했습니다. 자식 된 도리로 아버지를 고이 보내드려야 할 이때 경찰과 언론의 괴롭힘에 대응해야 하는 유가족들의 비통한 마음이 애처로울 따름입니다.

출처 -민중의소리

출처 - 경향신문

출처 - 오마이뉴스


종로경찰서 관계자는 야간이라 영장집행이 어렵다며 29일 중 영장 집행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백남기투쟁본부는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입구에서 철야 농성을 벌이며 대응할 예정입니다. 장례식장 앞에서는 촛불문화제가 이어지고 있으며 조문객 행렬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야당은 백남기 특검을 추진할 태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유가족의 안위가 우선입니다. 딸들이 아버지의 장례식을 무사히 치르기를 두 손 모아 바라야 할 정도로 대한민국이 망가졌다는 현실이 참으로 슬픕니다. 다시 한 번 백남기 농민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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