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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1억 2000만 원 농협 인출 사건으로 본 금융의 현실

by 생각비행 2014. 11. 27.

쥐꼬리만 한 월급이라도 알뜰살뜰 적금을 들어 내 집 한 칸 마련할 수 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언감생심입니다. 워낙 저금리 시대라 이젠 적금을 들어도 예전 같은 이율을 바랄 수 없습니다. 복권이라도 당첨되어 수십억을 예금해놓고 이자나 받아먹으며 사는 부자가 월급쟁이들의 꿈 중 하나였지만,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이자율이 너무 낮아 예금을 할 경우 오히려 은행에 보관료를 내는 꼴이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절대다수가 은행에 꼬박꼬박 월급을 저축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은행보다 안전한 보관처는 없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이러한 기본적인 믿음마저 송두리째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피땀 흘려 모은 전 재산 1억 2000만 원이 농협 통장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출처 - 한라일보



피해자는 보이스피싱은커녕 인터넷뱅킹도 가입한 적이 없어


여러분 중 대부분이 보이스피싱이나 스미싱에 걸렸거나 인터넷뱅킹을 해킹당하는 등 피해자 쪽에서 뭔가 잘못했겠거니 하고 생각하셨을 테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습니다.


출처 - YTN


19년 전 충남 삽교 농협에서 통장을 만든 50대 이씨는 지난 7월 돈을 찾으러 은행을 들렀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1억 2000만 원이 들어 있어야 할 통장의 잔액이 0원도 아니라 마이너스 500만 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전 재산을 털린 것도 모자라 본인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대출까지 받은 상황에 처한 겁니다.


문제는 피해자가 어떠한 잘못이나 실수를 한 적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보이스피싱이나 스미싱에 걸린 적도 없고, 은행 보안카드를 잃어버린 적도 없었습니다. 사실 이씨는 애초에 인터넷뱅킹조차 가입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용한 거라곤 농협에서 제공하는 텔레뱅킹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씨의 전 재산이 감쪽같이 사라진 겁니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죠.


알고 보니 원인은 중국 쪽의 해킹이었습니다. 대포 통장을 통해 3일에 걸쳐 41번에 나눠 피해자의 계좌에서 1억 2000만 원을 빼내고 거기에다 500만 원의 마이너스 대출까지 해간 겁니다.



출처 - SBS


아무튼 바로 농협과 경찰에 신고한 피해자는 농협이 사기에 대비해 손해보험에 들어있다는 말을 믿고 3개월을 기다렸습니다. 사고 처리에 2~3개월이 걸린다고요. 그런데 3개월이 지나 농협은 갑자기 말을 바꿨습니다. 경찰 조사 결과 피해자의 과실은 아니지만 원인을 밝혀낼 수 없으므로, 은행 잘못이라고 단정할 수 없고 또한 전례가 없어 피해액을 전혀 보상해줄 수 없다는 얘기였습니다. 한술 더 떠 농협은 피해자 본인이 모르는 사이에 빼간 마이너스 대출에 대한 이자까지 독촉했습니다.


피해자로서는 황당한 상황에 기가 막혔을 겁니다. 농협을 믿고 돈을 맡긴 고객 입장에서 농협이 돈을 잃어버린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사고 처리를 해주겠거니 믿고 기다렸으나 사과는커녕 뒤통수를 아주 제대로 친 셈이니까요. 이씨가 모은 돈은 새 보금자리의 중도금을 치를 용도였다고 합니다. 이번 사건으로 이씨는 월세를 전전하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뻔뻔하고 비열한 농협, 법도 무시하고 보안책임은 나 몰라라


중국의 해킹도 좌시해선 안 될 일이지만, 사람들은 더 분노하게 했던 건 뻔뻔하고 비열한 농협의 처신입니다. 피해자가 신고했을 때는 마치 손해보험으로 다 보장해줄 것처럼 얘기하다가 경찰 조사 결과 피해자의 무과실이 드러났음에도 보상은커녕 이자마저 내놓으라니 말문이 막히지 않겠습니까? 원인이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채 수사는 종결되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농협은 전례가 없기 때문이라는 옹색한 변명으로 피해자의 믿음을 배신했습니다.


출처 - SBS


하지만 이는 명백한 농협 측의 불법행위입니다. 2006년 4월 제정된 전자금융거래법에 의하면 피해자의 중대 과실이 없는 경우 은행이 보상하도록 법이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은행의 부실한 보안에 의한 해킹 사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2005년 6월 외환은행의 5000만 원 해킹 사건을 기억하시는지요? 그때도 외환은행 측은 과실이 아니라며 피해자의 돈을 보상할 수 없다며 버텼습니다. 이때 우리나라 모든 언론과 여론의 엄청난 비난이 외환은행 측에 집중되었습니다. 그 계기로 제정된 것이 전자금융거래법입니다.

 

전자금융거래법에 의하면 원인이 없고 과실이 없는 사건의 경우 일단 은행이 전적으로 책임지게끔 규정하고 있습니다. 법적으로 말이죠.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돈을 맡은 쪽이 지킬 방책을 세워야지 맡긴 쪽이 대책을 마련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니까요. 돈을 맡긴 쪽에 과실이 없다면 응당 돈을 맡은 쪽이 사고의 책임을 지는 건 지극히 합당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농협이 뻔뻔이 버티고 있는 이유는 억울하면 피해자가 소송을 하라는 겁니다. 으름장을 놓고 버티면 피해자는 알아서 나가떨어지던가 혹은 배상을 하게 되더라도 배상 규모를 줄이거나 배상 시기를 최대한 늦출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반면 피해자 입장에서는 믿고 맡긴 돈을 잃은 것도 억울한데 소송을 하려면 추가로 돈과 시간을 들여야 하니 참으로 곤란한 상황이 빚어지는 겁니다. 우리나라 법이 미비해서 이런 은행의 비열한 행태를 막을 방법이 현재로써는 없다고 하니 그냥 넘길 일이 아닙니다.


출처 - JTBC


애초에 농협은 돈을 맡은 자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보안의 의무에 나태했습니다. 농협에서 1억 2000만 원이 사라진 사건이 공론화되자 비슷한 시기에 50여 명이 자신의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갔다는 신고를 했습니다. 이들은 스마트폰에 해킹코드를 심는 이른바 파밍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금융결제원에서 중국발 해킹 IP에 대한 경고를 무려 100여 번이나 각 은행에 보내며 이 IP를 차단하거나 관찰하라고 했음에도 농협은 이를 귓등으로 흘린 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고도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1억 2000만 원의 피해를 본 이씨는 이 경우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인터넷뱅킹이나 스마트폰 뱅킹에 가입조차 한 적이 없으니까요. 이씨 사건으로 볼 때 농협의 시스템 자체가 해킹된 것은 아닌지 불안함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이 경우 피해자가 앞으로 더 생길 우려가 있기 때문이지요.


농협은 정부에서 보안 강화 조치의 일환으로 지시한 이상금융거래 탐지시스템(FDS) 구축에도 나태했습니다. 혹시 신용카드로 처음 해외 결제를 해보신 분이라면 한밤중에라도 전화를 받으신 적이 있을 겁니다. 본인이 결제한 게 맞는지 확인하는 절차 때문입니다. 평소 이용자의 결제 유형과 너무 다르거나 이상 행동을 하면 일단 이상이 생긴 것으로 보고 거래를 중단하는 시스템이 바로 FDS입니다.

 

이번에 피해를 본 이씨의 경우 3일에 걸쳐 대포통장으로 41번의 인출이 있었습니다. 하루에 10번 이상의 인출이 있었다는 건데요. 일반인의 경우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연달아 하루에 10번이 넘는 거래를 하지도 않을뿐더러 41번의 인출을 통해 통장을 전부 비우는 일도 웬만해선 발생하지 않겠지요. 만일 FDS 시스템이 농협에 구축되어 있었다면 이번 사건도 사전에 방지할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농협은 정부가 지시한 지 1년 반이 지나도록 이 시스템 구축을 구축하지 않고 시간만 보냈습니다.


한마디로 농협의 행태는 적반하장도 유분수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은행으로서 최소한의 보안 책임도 지지 않고, 고객의 잘못이 없음이 입증된 사건에서조차 법적으로 정해진 피해보상을 미루며 버티고 있으니까요.



징벌적 배상제와 제도 정비로 고객의 억울함 없게 해야


이번 사건은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농협의 나태한 보안의식과 무책임함 그리고 법률적 제도적 미비함이 맞물려 일어난 금융 참사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소비자들이 금융사고의 책임을 떠안고 있는데, 이제는 이러한 책임을 은행이 우선 지도록 해야 합니다.



출처 - 아주경제


일본에서는 전화 사기를 당해 고객이 자기 정보를 유출하는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이를 가벼운 잘못으로 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를 중대 과실로 보고 보상해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애초에 사기를 친 쪽이 잘못이지 당한 쪽의 잘못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미국의 경우 우선 사고로 피해를 본 금액을 10일 안에 고객에게 되돌려주고 45일간 은행이 조사에 나선다고 합니다. 그래서 만약 고객에게 과실이 있었다면 그에 해당하는 돈을 회수하고 무과실이 입증되면 그대로 수사를 종결합니다. 또한 미국에서는 농협처럼 뻔뻔하게 법적으로 정해진 피해보상을 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기업의 행태를 막는 방안으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10일 안에 고객에게 일단 피해액을 전부 보상하지 않으면 3배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매기겠다고 정부가 보증하는 것이죠.


스미싱까지 포함해 27만 건의 사고, 피해액 총 1조 6000억 원. 이것이 우리나라 금융사기의 민낯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은행들은 5억이면 도입할 수 있는 보안 시스템을 돈 아깝다고 미루면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번 농협 사건 경우 보안의식이 투철한 제대로 된 사회였다면 예금자들의 인출이 속출하는 뱅크런으로 은행이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대체 이 나라와 기업, 기관들은 언제까지 피해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지우려고 하는 걸까요. 은행은 대한민국 경제의 근간입니다. 시급한 개선이 필요합니다!

 

농협 계좌에서 주인도 모르게 억대의 돈이 인출된 사건과 관련해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가 진상파악을 위해 오늘 전체회의를 열고 긴급 현안보고를 받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 회의에는 최원병 농협중앙회장, 임종룡 NH농협금융지주회장, 김주하 NH 농협은행장 등이 출석하며 여야 의원들은 이들을 상대로 불명의 예금 인출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피해 방지 대책을 추궁할 예정이라고 하니 피해자를 구제함은 물론 좀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오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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