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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거창한 것만이 문화인가?

by 생각비행 2014. 7. 25.

의정부고등학교 학생들의 졸업사진 찍기 문화

 

생각해보니 요즘 생각비행 블로그에 무거운 주제만 다뤘군요. 오늘은 재미있는 내용을 다뤄볼까 합니다. 훈훈한 고등학생들의 귀여운 일탈(?) 이야기입니다. 최근 의정부고등학교 졸업사진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교복 정장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질서정연하게 서서 찍는 일반적인 졸업사진에서 벗어나 애니메이션 캐릭터부터 당대에 이슈가 된 인물에 이르기까지 패러디해서 재미있는 졸업사진을 찍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코스프레 쇼처럼 말이죠. 

 

출처 - SBS

 

실제로 몇 년 전부터 인터넷 게시판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이 기상천외한 졸업사진이 이슈가 되곤 했습니다. 올해 의정부고등학교가 화제의 중심에 놓이게 된 또 다른 이유는 교감선생님이 이러한 졸업사진 촬영 문화를 저지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너무 유명해진(?) 나머지 학생들의 행위가 학교의 위신을 떨어뜨린다는 게 주된 이유였습니다. 일부 학부모와 졸업생 사이에서도 자제를 부탁한다는 요청이 들어왔다고 말입니다. 이에 교감선생님은 학생들이 정갈하게 교복을 입은 모범생처럼 보이지 않으면 졸업앨범 촬영을 할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의정부고등학교 학생들은 선배들에게 지지 않을 졸업사진 촬영을 위해 1년을 준비해왔습니다. 그런데 촬영 당일 갑자기 교복을 입은 모습이 아니면 졸업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을까요? 결국 의정부고등학교 학생들은 단체로 촬영을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졸업사진을 찍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졸업사진을 찍는 행위를 두고 두 가지 시선이 엇갈리는데요, 생각비행은 여기서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를 구분하는 시선의 폭력성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교감선생님을 비롯한 어른들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튀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이런 것이죠. 단정하거나 멋진 모습이 아니라 이상하고 추잡한 모습으로 졸업사진을 찍으면 남부끄럽다는 겁니다. 평생 남을 졸업사진인데 기괴한 모습만 남는다면, 학생 개인이야 그렇다 쳐도 학교 위신이 떨어지고 이런 졸업사진을 찍기 위한 준비로 학교생활도 소홀해진다는 게 이유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거창하고 남들이 인정할 만큼 훌륭한 것만을 문화라고 생각하는 콤플렉스가 뒤섞인 시각의 폭력성이 숨어 있습니다. 거창하거나 훌륭하지 않더라도 <강남스타일>처럼 외국에 알려지거나 돈을 벌면 문화라고 인정하는 현실은 또 어떻습니까? 묘합니다. 과연 문화라는 게 원래부터 그런 것일까요?


잠시 우리 사회에서 시야를 돌려 세계 모든 고등학생이 꿈에 그리는 명문대학교, 그중에서도 세계 제일의 명문대 중 하나라고 하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의 문화를 살펴보겠습니다.



MIT 캠퍼스 건물 위에 자동차를 올리다


MIT에는 IHTFP(I Hate This Fucking Place)라는 해킹클럽이 있습니다. 공대생이자 해커인 이들의 관심사는 소프트웨어 해킹 이외에 또 하나가 있습니다. MIT 캠퍼스의 상징적 건물 중 하나인 그레이트돔에 무언가를 올리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게 뭐 별일일까 싶지만 일의 규모나 주제가 남다르기 때문에 유명해졌습니다. 자동차부터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일상적으로는 도저히 건물 지붕에 올라갈 일이 없는 기상천외한 것들을 올려놓기 때문입니다. 혈기 넘치는 MIT 학생들에겐 그레이트돔 자체가 일종의 해킹 대상이 된 것이죠.




<빅뱅이론>이란 미드를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영화 <스타워즈>는 MIT 학생들로서는 성전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선지 학생들은 1999년 5월 <스타워즈 에피소드1 – 보이지 않는 위협>의 개봉을 기념해 MIT 그레이트돔을 스타워즈의 마스코트 로봇인 R2D2로 만들었습니다.


 


2003년에는 첫 동력구동 비행기 100주년을 기념해 라이트 형제가 만든 비행기를 재현해 그레이트돔 위에 올렸고요.


 


2006년 9.11 테러 5주년 때는 테러 발생 당시 인명구조에 나섰다 숨진 소방관들을 추모하기 위해 소방차를 그레이트돔 위에 올렸습니다.


 


이런 행위를 MIT에 다니는 천재들의 기행, 창의력 넘치는 괴짜들의 문화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문화의 기원을 알고 나면 맥이 빠질 겁니다. 돔 위에 차를 올리는(CP Car on the Great Dome) 문화는 1994년 어느 학생이 경찰에게 억울하게 딱지를 떼이자 그 보복으로 친구들과 함께 딱지를 뗀 경찰의 경찰차를 그레이트돔 위에 올려버린 사건에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은 당연히 큰 이슈가 되었는데요. 이때 총장은 학생을 벌하거나 경찰에 넘기지 않고 대체 어떻게 경찰차를 돔 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는지부터 물었다고 합니다. 정말로 궁금하지 않습니까? 유동 인구가 많은 캠퍼스에 기중기가 나타난 흔적도 없고 UFO가 출현한 것도 아닌데 경찰차를 대체 어떻게 돔 위로 올렸을까요?

 

문제의 학생은 친구들과 합심해 경찰차를 완전히 분해한 뒤 돔 위에서 재조립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완벽하게 재조립했기에 밑에서 본 사람들은 차를 그대로 들어서 올려놓은 것처럼 보였겠지요. 이처럼 어떤 문화의 시작은 거창하지도 훌륭하지도 않은 경우가 빈번합니다. 오히려 아무런 의미가 없어 한심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함께하는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그 문화를 따르는 사람들도 즐거워한다면 그것이 바로 뜻깊은 문화가 아닐까요?

 

딱지 떼여 열 받은 김에 시작한 사건이 유쾌하고 재밌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의 참여가 시작되어 돔 위에 차를 올리는 문화는 학교의 명물이 되었고, 9.11테러 희생자를 기리는 문화로 확장되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자생적이고 참여적인 문화야말로 진정한 문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거창해야 하고 훌륭해야 한다는 보여주기식 강박증이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이 새로운 문화를 싹 틔울 가능성마저 짓밟지는 않을지 걱정입니다.



의정부고 졸업사진 문화는 계속된다


2014년 의정부고등학교 졸업사진 찍기 문화를 바라보는 다른 시각 때문에 빚어진 신구의 격돌(?)은 순식간에 퍼져 사회관계망 서비스와 인터넷 게시판을 달궜을 뿐 아니라 방송에서 취재를 나올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올해 메릴린 먼로로 분장하고 졸업사진을 찍으려던 의정부고등학교 한 학생은 인터뷰를 통해 공부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졸업사진 촬영이 끝나면 즐거운 추억과 성취감을 가진 채 바로 공부에 전념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5년 전부터 시작된 이 기상천외한 졸업사진 찍기 문화를 하나의 졸업식 전통으로 이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출처 - 한국경제TV

 

“메릴린 먼로 최연호 학생입니다. 제가 그렇게 선정적이었나요, 교감선생님? 이렇게 찍는 게 이제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은데, 저희가 이걸 한다고 갑자기 공부를 손 놓겠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학교 또는 다른 분들께서도 '얘네는 공부도 잘하면서 놀기도 잘 노네'라는 아주 좋은 말씀도 해주시는데, 선생님들도 저희 되게 좋게 보고 계시는데 저희 좀 도와주세요.”

 

다행히 의정부고등학교 교감선생님을 비롯한 어른들이 꽉 막힌 분들은 아니었습니다.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 언론까지 나서서 개성 넘치는 졸업사진을 찍지 못하게 된 것에 아쉬움과 질타의 목소리를 내자 촬영을 막았던 교감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사과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졸업사진을 검열하겠다던 방침을 철회하고 학생회 주도하에 졸업사진 촬영을 학생들의 자율에 맡기기로 했다고 합니다. 요즘 보기 드문 훈훈한 모습입니다. 이를 계기로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학생들이 주축이 된 자생적인 문화가 더 많이 생겨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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