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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보도

호봉제 폐지? 불평등의 대가

by 생각비행 2014. 3. 21.
지난 19일 고용노동부가 '임금체계 개편 매뉴얼'을 발표하자 재계와 노동계의 희비가 극명하게 갈렸습니다. 고용부가 발표한 이 임금체계 개편안에 따르면 연공(근속기간)급을 개편해 직무,직능급 등을 도입해야 한다고 합니다. 개편 방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고정적인 상여금, 수당 등을 기본급에 포함하는 임금 구성 체계의 단순화, 기존 호봉제(연공급)를 대신할 직무급, 직능급 등의 도입, 실적에 비례하는 변동 상여금, 성과급 비중 확대 등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뭔가 복잡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근속 위주의 호봉제를 단순화하거나 폐지하고 성과 위주의 연봉제, 성과급으로 임금체계를 개편하라는 얘깁니다. 재계는 아직 공식 논평을 하지 않았지만 개편안을 환영하는 눈치고, 노동계는 즉각적으로 반발했습니다.


"노동환경 변화해야" vs "사실상 임금 삭감"

재계가 은근히 이번 임금체계 개편안을 환영하는 까닭은 결과적으로 전체 인건비를 줄일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철행 고용노사팀장은 19일 "현행 연공서열 체계에서는 임금이 근무경력 20년이면 2∼3배가 증가하고, 정년까지 늘면서 기업들의 인건비 부담이 커지는 구조"라며 "통상임금 확대나 근로시간 단축, 임금피크제 등 노사 현안도 임금체계 개편이 선행돼야 해결할 수 있다"고 밝혔다. 재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공식 논평은 내지 않았지만 정부의 임금체계 개편안에 찬성하는 분위기다. 경총의 한 관계자는 "정부의 매뉴얼은 노사 어느 한 쪽에 유리한 것이 아니라 정년 연장을 비롯한 노동환경의 변화에 맞춰 임금체계를 개선할 필요성을 정부가 강조했다는 데 의미를 둘 만하다"고 평가했다.


이번 조치는 최근 대법원의 통상임금 판결로 골머리를 앓던 재계에 정부 차원에서 선물을 안겨준 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동안 근로시간 단축, 2016년부터 시행한다는 60살 정년제 등으로 마치 기업을 압박하는 듯 보였던 정부가 재계에 슬그머니 빠져나갈 뒷구멍을 알려준 셈이 됐습니다.

출처 - 강원일보

반면 친기업적인 변화 조치에 노동계는 즉각 반발했습니다. 지금의 우리나라 노동 상황에서 호봉제를 폐지하고 연봉제만을 도입하는 건 노동자로서는 사실상 앉아서 임금 삭감을 당하라는 얘기와 다름없다는 겁니다.

민주노총은 논평을 내고 "젊은 노동자가 많은 시대의 저임금체계인 연공급(호봉제)을 중고령 노동자가 늘어나자 직무, 성과급의 저임금 체계로 바꾸려는 것"이라면서 "지금까지 연공급이 유지된 것은 기업에 가장 유리한 체계였기 때문이며, 애초 노동자들은 연공급을 통해 생활보장적 생애임금을 보장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상여급에 성과를 반영하는 것도 상여금 성격을 부정기적·비고정적으로 만들어 통상임금에서 제외하려는 시도"라고 비판했다.


민주노총과 함께 한국노총도 반발했는데요, 이번 개편안은 고령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아 사측의 이윤만 보장하려는 것이고, 통상임금에 포함되지 않는 성과급 확대는 법원 판결을 비껴가기 위한 꼼수이며, 이는 결국 노동자의 임금 총액을 낮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점이 있는 호봉제를 옹호하는 실제적 이유

당연한 얘기지만 호봉제와 연봉제는 장단점이 있는 임금체계입니다. 언뜻 보면 각자 능력과 성과에 따라 임금을 받는 연봉제가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정부나 재계는 바로 이런 입장에서 바람몰이하고 있지요. 그런데 왜 많은 노동자가 이에 대해 반발하는 걸까요?

출처 - 한겨레

우선 우리나라 절대다수 사업장의 임금체계가 호봉제를 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호봉제 또한 처음에는 기업이 원한 임금체계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어 장기 불황의 여파 속에서 기업이 오로지 인건비를 더 절감할 수 있다는 판단하에 호봉제를 연봉제로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는 셈입니다. 능력대로 받는 임금이라는 바람몰이를 재계와 보수언론이 손을 잡고 지속하는 것도 다 그들만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호봉제는 상용노동자 100인 이상 사업장의 71.9%, 300인 이상 사업장의 79.6%에 적용될 만큼 지배적인 임금체계다. 50~60살 노동자의 임금이 정점에 이르는데 생산성은 떨어져 기업 부담을 키운다고 재계와 정부, 일부 학계가 지적해왔다. 여기에 지난해 말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해 초과근로수당 등을 지급하라는 대법원 판결이 이번 개편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임금 상승, 정년 연장→기업부담 증가→신규고용 위축→비정규직 확대→청년실업’이라는 위기감이 재계나 보수언론을 통해 극대화한 탓이다.


실질적으로 노동계에서도 호봉제의 단점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호봉제는 근로자의 근속이나 연령, 직급에 따라 급여가 인상되는 연공적 임금체계로, 연공이 대체로 숙련도를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임금 산정 방식의 하나로 인식되어왔습니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돈 쓸 일이 많아지는 나이에 따라 임금이 안정적으로 인상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사측 입장에서는 숙련도가 높고 나이가 많은 노동자가 해마다 늘어나니 노무비와 급여 테이블이 복잡해진다는 부담이 있습니다. 게다가 임금이 노동자의 능력이나 노력 정도에 따라 달라지지 않고 근속과 근태로 결정되기 때문에 노동자 스스로 동기 부여가 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죠. 일명 복지부동하는 공무원처럼 되기 쉽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노동계에서 호봉제를 옹호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사회안전망이 열악하고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심하다는 게 하나의 이유일 것입니다. 실직이나 노후 대비를 위한 사회안전망이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오직 안정적인 임금이 비빌 언덕인데, 이마저 성과 위주의 불명확한 임금 체계로 바뀐다면 노동자들의 삶은 한층 더 피폐해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더구나 성과급 임금 체계로 개편된다고 할 때, 그 기준과 판단이 오로지 사측의 판단에 근거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선진국에서는 이를 견제하는 한 방법으로 노동쟁의의 활성화가 쓰이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파업을 통해 임금 수준을 사측과 조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합법적인 파업이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파업 후 사측의 가압류 소송으로 풍비박산이 난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이제 뉴스에서조차 다루지 않을 정도로 친기업적인 정서가 팽배한 곳이 우리 사회입니다. 

노조 활동 때문에 기업의 손해배상 가압류를 당한 노동자들을 위한 '노란봉투' 캠페인이 33일 만에 9억 4000만 원 모금을 달성했다고 최근 아름다운재단 측이 밝혔습니다. 모금액은 손해배상 가압류로 고통받는 노동자, 가족의 긴급 생계비와 의료비를 지원하는 데 쓰인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노동자를 사측과 국가가 죄인으로 만들고 선량한 시민을 그들을 돕고 있는 현실입니다.   

출처-일상의 실천

이런 현실에서 성과 위주의 연봉제를 노동자들로 하여금 그저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창 든 거인에게 방패도 없이 맨몸으로 맞서라는 소리와 진배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임금체계 개편과 더불어 노동자의 삶의 질이 하락하는 문제도 좌시할 수 없습니다. 성과 위주의 연봉제가 전적으로 도입된다면 지금보다 임금을 수십 배 수백 배 받는 사람이 분명히 나올 겁니다. 재계에선 본보기로 이런 사례를 언론에 대대적으로 홍보하겠죠. 이는 분명 특정한 사례일 뿐인데도 모든 사람이 좋은 싫든 고연봉자가 되기 위해 지옥 같은 무한 경쟁에 뛰어들게 됩니다. 안 그래도 월화수목금금금에 저녁 없는 삶을 버티며, 세계 자살률 1위를 자랑하는 삶의 질이 바닥을 치는 나라에 살고 있는 노동자가 얼마나 더 나락으로 떨어져야 할까요? 


복지부동하는 공무원 임금부터 개혁하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임금체계개편안을 놓고 노동계는 노동자들을 상대로 이런 임금개편안을 제시하기 전에 공무원의 임금체계부터 고쳐야 하는 게 아니냐고 거세게 비판했습니다. '철밥통'이라고 부르는 호봉제의 대명사는 이런 개편안을 내놓은 공무원이니까요.

출처 - 뉴스1

공무원의 호봉체계는 12개 직종별로 다르게 설정돼 있으며 직위별로 고정되는 고정급적 연봉제는 차관급 이상, 정무직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다. 호봉제로 급여를 받는 공무원의 경우 9급부터 공무원 생활을 10여년 이상 해온 공무원은 시험을 통해 5급으로 입사한 신입 공무원보다 급여를 많이 받는 것이 현실이다. 능력 중심으로 급여를 받아야 한다면 결국 공직사회 호봉제가 먼저 개편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주장이 노동계 입장이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이날 성명을 내고 "고용부 주장대로면 직무 성과와 상관없이 순전히 시험점수로 선발되고 정년까지 꾸준히 호봉이 올라가는 공무원 임금체계부터 확 뜯어 고쳐야 한다"며 "그렇지 않을 경우 정부의 임금체계 개편안은 진정성도 없는 허구에 불과하다"고 강력 비판했다.


그러면서 노동계는 정액 인상 방식의 임금인상안 채택, 젊은 노동자의 초임 인상, 재벌사 임원의 임금 제한, 비정규직에 대한 기본급 호봉제 도입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습니다.

재계와 노동계의 시각차가 큰 만큼 이번에 발표한 임금체계 개편안은 실효를 거두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양대 노총을 포함해 노동계가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고, 대화를 중재해야 할 노사정위원회는 개점휴업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 측이 일방적으로 노동자의 양보를 강요하여 불에 기름을 부은 꼴입니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과연 우리 사회는 언제까지 노동자에게 희생을 강요할 생각일까요? 지그문트 바우만이라는 사회학자는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라는 책에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모든 연구들이 동의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전 세계의 거의 모든 곳에서 불평등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는 부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최상위 부자들은 더 부유해지는 반면 빈자들, 특히 최하위 빈자들은 더 가난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는 상대적으로는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절대적으로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사례들을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더군다나 부자들은 단지 부자이기 때문에 점점 더 부유해진다. 빈자들은 단지 가난하기 때문에 점점 더 가난해진다. 오늘날 불평등은 자체의 논리와 추진력에 의해 계속 심화된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도움이나 추진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외적 자극이나 압력, 충격 같은 것은 전혀 필요없다. 오늘날 사회적 불평등은 역사상 최초로 영구기관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세계적인 석학 스티글리츠 또한 비슷한 시각에서 시장을 "불평등을 생산하는 기계 장치"라고 봅니다. 《불평등의 대가》라는 책의 추천사에서 홍기빈 교수는 "시장이 이처럼 가공할 전쟁터로 변질되어 갈 때,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라 이를 시정하고 바로잡아야 할 각종 정치적, 사회적 영역의 제도 장치들 또한 이 1퍼센트의 특권과 안녕을 영구화하기 위한 장치로 변질된 지 오래"라고 말합니다. 

출처-모던 타임즈

오늘날 빈부 격차는 교육 기회의 격차, 건강 격차, 사회적 이동성의 축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경제적 기득권은 독과점과 담합을 통해 경쟁을 회피하면서 약자들에게는 피눈물 나는 경쟁을 강요합니다. 보수언론과 정부는 "삼성이 망하면 한국이 망한다"는 식의 거짓말로 일부 재벌의 중요성을 대중에게 끊임없이 주입합니다.

사회적 불평등이 극에 달한 상태에 이르렀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과 같은 불평등을 바꿀 수 없는 흐름으로 인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사회의 공정성을 강화함으로써 빈곤의 악순환과 구조적 불평등을 종식해야 합니다.


골목에서 시작하는 생활정치

6.4 지방선거가 다가왔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이 많다고 합니다. 대선 때만 되면 대통령 한 명 바꾸면 온 세상이 다 바뀔 것처럼 전국이 들썩들썩합니다. 하지만 막상 그들의 공약이 빈 껍데기에 불과한 헛된 공약이 되어도 대부분의 국민이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는 얘깁니다. 국가 기관이 증거를 조작하여 죄 없는 시민을 간첩으로 내몰아도, 민영화 꼼수로 국가의 중요한 재산을 사적 소유로 되돌려도, 정치의 실패를 국민의 혈세로 메우는 실태를 보고서도 나 몰라라 한다면 그 대가는 결국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돌아오고 말 것입니다.

출처-화성시 블로그

거대 정치로 우리 삶을 바꿀 수 없습니다. 지역에서 일할 일꾼이 누구인지, 그들이 내세우는 공약이 정말로 우리 마을을 살리는 것인지부터 살펴야 합니다. 마을을 변화시키는 진짜 일꾼을 키워 국회로 내보내면 경제 구조도 바꿀 수 있습니다. 약자를 배려하는 정책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국민의 대표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풀뿌리 정치가 별다른 게 아닙니다. 이번 6.4 지방선거에 나온 지역의 일꾼부터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 소중한 투표권을 행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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